삶의 고통이 본인 잘못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사실에 위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허스토리>와 <아이 캔 스피크>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인공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알고 난 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1992년부터 시작한 시모노세키 재판이 배경인 <허스토리>에서는 주인공들이 과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홀대한다. 반면 2007년 미국 하원의원의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배경으로 한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하며 힘을 보태주는 모습이 그려진다.
여성에 대한 전쟁 성폭력 범죄
아시아·태평양전쟁기의 일본군 위안부 사건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역사로 인식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종전 이후 일본군 출신이 집필한 전쟁 체험기나 회고록 속에서나 위안소를 찾은 내용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경리장교로 참전해 인도네시아 발릭파판에 “병사들을 위해 위안소를 만들어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마쓰우라 다카노리 편저 <끝나지 않은 해군>·1978)한 적이 있다.
그랬던 영역이 ‘문제’로 ‘발견’된 건 1990년대 이후다. 1990년대는 여성주의 역사인식이 확장되고 피해자들이 직접 발언을 한 시기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청중은 피해자의 목소리는 물론 침묵과 과장, 회피, 번복의 말투와 몸짓에 귀 기울였다. 청중은 알고자 하는 의지와 사회구조적인 역사상 이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성격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전쟁 승리를 명분으로 여성의 성을 동원하는 정치권력은 가해책임을 지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서야 피해자는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었다. 1944년 만 16세 때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소개소에 갔다가 중국 장자커우(張家口)의 위안소로 끌려갔던 김순악은 해방 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돈을 벌어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색싯집’과 ‘요릿집’을 전전했고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도 얻었다. 우등생인 큰아들이 삶의 낙이었지만 결혼한 후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는 아들을 보며 가슴에 울증이 생겼다. 술과 담배, 다툼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김순악의 삶을 바꾼 건 이남이의 등장이었다.
‘훈 할머니’로 알려진 이남이는 1998년 김순악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언론사들은 앞다퉈 이남이를 인터뷰했고 동네 사람들은 이남이를 환영했다. 김순악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고 표현했다. 위안부였던 이를 사람들이 그렇게 반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김순악은 이남이의 일을 알아본 끝에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전쟁범죄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김순악은 피해신고를 결심했다. 이후 김순악은 자신의 이야기를 대구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에게 풀어놨다. 이미 위안부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와 공감이 있던 활동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김순악의 삶을 이해했다. 의심과 질문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으로 김순악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이후 김순악은 위안부 피해자 생활 대상자로 결정됐다. 그는 더 이상 우울증에 짓눌리지 않았다. 김순악은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고 보고 보고 또 봤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김순악을 피해자로 ‘인정’해준 것이며 삶의 고통이 김순악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2일 김순악은 전재산을 기부하고 작고했다. 절반은 대구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나머지 절반은 소년소녀가장들 장학금으로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이 믿어줄까” 불안에서 벗어나
김학순에 이어 두 번째로 위안부 피해자임을 드러낸 문옥주의 삶은 또 어떤가. 그는 중국 헤이룽장성 둥안과 버마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 1991년 12월의 일이다. 당시 문옥주의 친구들은 그를 비난하면서 떠나갔다. 문옥주는 많은 사람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문옥주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와의 만남을 믿음직스럽고 고맙게 기억하는 이유다. 문옥주는 이 만남을 두고 자신이 하나를 이야기하면 그이는 열이나 스물을 이해했다며 놀라워했다. 또 질문보다는 듣기에 애쓰는 모습은 문옥주의 가슴을 울렸다. 문옥주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96년 10월 26일 작고했다.
영화 <허스토리>의 소재이기도 한 시모노세키 재판에 원고로 참여했던 박두리는 피해신고를 하는 당시까지도 “증거가 똑똑지 못하다”는 걱정을 했다. 듣는 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과연 믿어줄까 계속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두리는 1994년 9월 야마구치 지방법원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열린 재판에 나가 자신의 피해 내용을 진술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1심 판결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입법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일본 국회가 박두리에게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법원에서도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제서야 박두리는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믿어줄까 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1997)나 수요시위, 언론을 통해 만난 박두리의 모습에서는 이전만큼의 불안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06년 2월 19일 작고했다.
이렇게 의심과 질문 대신 믿음과 공감 앞에서야 피해자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들의 표정과 몸짓, 말은 과거 위안부여야 했던 여성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영혼에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드러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기만적인 이름을 가진 성노예 제도의 민낯을 마주하게 했다.
김학순이 세계 최초로 자신의 피해사실을 공개증언하고 일본의 전쟁 책임 및 식민지 책임을 물은 지 3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들이 겪은 일은 피해가 아니었다며 훈계하고 입막음하려는 역사부정론자들이 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이들의 이야기는 더 확장되어야 한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