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한류 이끈 백제역사유적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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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인 충남 공주·부여, 전북 익산 등 3개 지역 8개 유적지

기원전 18년 건국해 660년 멸망할 때까지 700년간 존속한 고대왕국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초기 삼국 중 하나였다. 백제의 문화와 종교, 건축·예술미 등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은 국제연합 전문기구인 유네스코가 인류문명과 자연유산 중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산을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 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옛 수도였던 충남 공주·부여, 전북 익산 등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유적으로 구성됐다. 최근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 등의 도움을 받아 이들 지역을 돌아봤다.

충남 부여군에 위치한 정림사지.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충남 부여군에 위치한 정림사지.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처음 찾은 곳은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다. 미륵산(429.6m) 자락을 배경으로 펼쳐진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터였음을 짐작케 했다. 미륵사는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뒤 왕이 된 백제의 서동(무왕·재위 600∼641)이 자신의 고향에 세운 사찰이다.

동아시아 최대 사찰터 미륵사지

미륵사지에는 대형 목탑 양쪽에 동측 석탑과 서측 석탑(국보 제11호)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훼손돼 20세기 초 목탑과 동탑은 사라졌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일부가 무너졌다. 서탑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무너져 내린 한쪽 면이 콘크리트로 덧씌워지기도 했다. 동탑은 1992년 재건됐고, 서탑은 2001년부터 콘크리트를 정으로 하나하나 깨고 걷어내는 작업을 거쳐 올해 4월 6층 규모로 복원됐다. 미륵사지에는 1997년 5월 문을 연 국립익산박물관도 위치했다. 5100여점의 출토 유물 일부가 전시돼 있고, 서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호)도 볼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이 위치해 있다. 왕궁리유적은 무왕기에 조성된 왕궁터다. 1989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남쪽에는 정치와 관련된 건물이 위치했고, 북쪽에는 정원·후원 등이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왕궁리유적에는 현재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고대 화장실 등 건물이 있던 자리만 볼 수 있다. 최윤숙 왕궁리유적전시관 학예사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곳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수부’ 도장이 찍힌 기와 등 유물 1만2000여점이 출토됐다”며 “하지만 현재는 지상에 있던 건물을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왕궁 건물 등에 대한 복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찾은 곳은 충남 부여군의 정림사지(사적 제301호)다. 이곳은 백제 사비시기(538∼660) 수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사찰터다. 이 사찰터에서는 중문과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화랑지 등이 확인됐다. 사지 중앙부에는 백제의 화려한 문화와 예술, 뛰어난 석조건축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이 자리잡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백제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유적 중 하나다. 목탑의 구조와 비슷하지만 돌의 특성을 살려 전체적인 형태가 우아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 / 백제세계유산센터 제공

부여군 관북리유적(사적 제428호)과 부소산성(사적 제5호)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의 왕궁 유적을 볼 수 있다. 관북리유적지에는 1m 아래에서 발굴된 1450여년 전 백제의 도로가 재현돼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인 연지도 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관북리는 백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재위 554∼598) 시기 정권이 안정되면서 추가적으로 조성된 왕궁의 확장 권역으로 보인다”며 “동서남북의 방향을 측정해 격자형 도로를 만들었던 점 등에 미뤄 1500년 전 백제 사람들이 천문지리에 익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왕궁의 후원인 부소산성은 위급할 때 방어시설로 이용한 성으로 대형 건물지 등 왕궁 주요 시설과 정교한 판축토성(진흙을 개어 켜켜이 쌓은 토성)이 확인됐다.

부여군 나성(사적 제58호)은 사비의 동·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이다. 북·서·남쪽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벽의 역할을 했다. 나성은 현재도 부여읍을 감싸며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성은 도시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 역할도 했다.

온전하게 발굴된 무령왕릉

나성 밖에 위치한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은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과 함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모두 7기로 이뤄져 있다. 이 능은 발전된 백제의 석실분 형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중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굴돼 현재까지 주인공과 축조시기(525)가 확인된 유일한 백제 왕릉이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공주시에 위치한 공산성(사적 제12호)이다. 이곳은 웅진시기(475∼538) 산성으로 금강을 최대한 활용해 축조했다. 웅진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공주의 옛 이름이다. 이 성은 백제시대 도읍지인 공주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됐다. 공산성은 산성 안에 왕궁과 주요 시설 등이 확인된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총 길이가 2.6㎞에 달하는 성벽은 대부분 석성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토성을 쌓았지만 나중에 여러 차례 고쳐 쌓으며 석성으로 변화됐다. 내·외성으로 구분되는 토성의 외성은 백제시대 쌓았던 것으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5∼7세기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등을 수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뒤 일본 등으로 전하며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진일보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는 한·중·일 고대 왕국의 교류와 발전, 백제의 독특하고 탁월한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백제가 중국의 선진기술을 과감히 포용하고 자신들의 감성과 기술을 더해 화려하게 꽃피운 문화를 증명하는 것 중 하나가 백제역사유적지구”라며 “백제는 자신들이 꽃피운 문화를 바다 건너 일본에 전파해 일본의 아스카시대를 열게 하는 근본 바탕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동주 백제세계유산센터장은 이어 “백제역사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단일 유산의 예술적 조형성 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한류를 이끌었던 백제에 대한 평가 때문”이라며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동아시아 문화를 주름잡으며 외국에 영향을 끼친 게 백제”라고 덧붙였다.

<충남 공주 부여·전북 익산·권순재 전국사회부 기자 sjkw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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