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가정에 들어오면 판사의 옷을 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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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생활은 긴 여정이다. 짧고 효율적인 여행이 아니다. 길게, 함께, 건강하게 갈 수 있는 연료가 필요하다. 옳은 말은 세상에 나가서 하자.

집에서 혼자 에어컨 틀고 앉아 있기에는 애매한 날씨다. 남편도 귀가가 늦는 이런 날은 카페에 읽고 싶은 책 하나 들고 가서 혼자만의 커피타임을 즐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책을 읽다가 목이 뻐근해져 고개를 들면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바뀌어 있었다. 커플도 있었고, 싱글들도 앉아 있다 떠난 자리가 다채롭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하늘이 늦은 저녁 해로 물들 참이다.

영화 <로망>의 한 장면 / 경향자료

영화 <로망>의 한 장면 / 경향자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막 앉았다.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묵찌빠를 하더니 아내가 억울해 하며 일어난다. “뭐 마실래?”

아내가 커피를 픽업하는 동안 남편은 재밌는 듯 주머니에서 게임용 카드를 꺼내서 몇 장을 테이블 위에 펼친다. 아내가 돌아와 앉자 바로 카드게임을 시작하는 부부. 저녁식사하고 동네 앞의 시원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이는 것이 오늘 저녁의 계획인가 보다. 예전 부부들은 그저 TV 연속극에 빠졌었는데 요즘은 다양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나 또한 예전에 상상치 못한 내 모습이 새삼스럽다.

“제 배우자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최근에 부쩍 갈등위기의 부부들을 만나게 된다. 유독 아들·딸 뻘 되는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그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이렇게 커플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한편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어쩜 하나같이 얼굴도 예쁘고 당당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지…. 게다가 겉으로 보면 둘 사이에 갈등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잘 웃는 모습들이었다. 예전 부모들의 험악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아, 생각보다 친하구나~’라고 여길 때쯤 별 말 아닌 말에 누군가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느 오래 산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아픔들이 있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차에서 한 시간씩 뉴스를 보다 들어간다는 남편, 경력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수에도 오로지 남편과 한 공간에 있기 싫어서 저녁시간대의 학원 강의를 나간다는 아내, 아이들 앞에서만 안 싸운다는 부부, 리모컨을 아내에게 던지는 것도 폭력이냐고 되묻는 학생 남편, 직원들 앞에서 수시로 아내에게 언어폭력을 당하는 레스토랑 사장 등 하나같이 처음의 매끄러운 얼굴과는 매치가 잘 안 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잇따랐다.

그들의 사연을 들으며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저는 제 배우자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이건 상식 중의 상식 아닌가요?” 혹은 “저 사람은 제 말을 전혀 듣질 않아요. 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아예 귀를 닫아 버려요.”

답답함을 호소하며 하는 이야기라 정말 안타깝다. 잘해보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관계,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냉랭해지는 상대방의 태도, 이것이 비단 요새 커플들만의 어려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최근 들어 좀 더 염려스러워지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스마트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어떤 새로운 지식을 쌓아야 할 때, 새로운 프로그램을 운용해야 할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 때, 하물며 갑자기 10명의 손님상을 2시간 안에 차려야 할 때, 우리가 정보가 부족해서 곤란했던 적이 언제였나 싶다. 너무나 좋은 영상, 강의 콘텐츠, 서비스가 아주 쉽게 제공되는 스마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부들이 부부문제 역시 합리적이고 스마트하게 접근하고 있다. 부부끼리도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또는 윤리적 옮음)에 위배되지 않는 말을 하려고 하고, 상식으로 보이는 개념을 주장하고, 또 그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마치 가정 안에 작은 법정이 있는 듯이 말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의 토크쇼 인터뷰가 생각난다. 사회자는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아내지만 동시에 미국 국민입니다. 만약 버락 오바마의 정책에 대한 결정이나 정치적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한마디 하는 편입니까?” 미셸은 깔깔 웃으면서 대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 합중국 대통령보다 어떤 사안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정책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랬어야 됐다, 저랬어야 됐다, 훈수를 둔다. 버락은 그런 전세계의 CEO들, 자산가들, 종교지도자들, 소위 가장 스마트한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나는 되도록 그들 중 하나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집은 ‘당신이 더 잘했어야 했다’라는 조언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부부 대화 속 호통, 비아냥, 잔소리 등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뿐이겠는가. 집안일과 자녀 양육, 경제적 활동, 학업 등 모든 사회적 활동을 하는 우리는 끊임없이 ‘더 잘했어야 했다’는 판단을 외부로부터 받는다. 주변의 훈수는 비단 높은 지위의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 게임에 정신이 없는 고등학생도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우리가 지치고 맥이 빠졌을 때 터덜터덜 내딛는 걸음의 종착역, 우리의 가정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당신, 어머니께 전화 드린다며?”

“화요일 저녁은 당신 차례야.”

“내가 병원 가보라고 진작 얘기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오늘까지 못끝내면 안 된다며? 당신 요새 자꾸 게을러지는 것 같은데 그럼 안 돼.”

“애들 보는 데서 왜 그래?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부부의 대화지만 사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박 부장의 호통, 김 팀장의 비아냥, 교수님의 꾸지람, 시어머니의 언성, 술자리 친구들의 잔소리가 고스란히 있다. 그리고 외로움은 싹튼다.

부부는 가정의 최소단위이자 핵심멤버다. 부부가 서로의 가정을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으로 만들면 그 가정을 거쳐 가는 우리의 자녀들도 그곳을 쉼터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스마트함을 내려놓고 쉼의 느린 언어로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이유다. 쉼의 언어란 긴장으로 무장되어 지친 마음에 산소가 들어갈 수 있는 수용의 말을 의미한다.

“당신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당신이 맞아.”

“그럴 수밖에 없었나보지.”

“좀 못하면 어때.”

부부생활은 긴 여정이다. 짧고 효율적인 여행이 아니다. 길게, 함께, 건강하게 갈 수 있는 연료가 필요하다. 옳은 말은 세상에 나가서 하자. 가정에 들어오면 신발장에서 판사의 옷을 벗자. 가정에서만큼은 ‘진리는 사람을 질리게 한다’는 말을 아는 것이 진짜 스마트함 아닐까.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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