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책임감 있는 아이로 클 기회를 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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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부모의 부재시 느꼈을 마음들을 부모들이 잘 공감해 주며 아이 마음을 헤아려 준다면 이를 통해 아이들도 책임감과 독립심, 더불어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강서구 공항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1월 28일 겨울방학을 마치고 등교하며 교장선생님과 인사하고 있다./이준헌 기자

서울 강서구 공항초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1월 28일 겨울방학을 마치고 등교하며 교장선생님과 인사하고 있다./이준헌 기자

3월 초등학교 앞은 하교시간이면 학부형들로 북적거린다. 교문 바로 옆의 공간은 이미 엄마들로 가득 찼고 작은 도로 건너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통도덕을 잘 지키는 교육의 장이 됐다. 평소 같으면 오는 차를 적당히 확인하며 슬쩍 건너는 작은 도로지만 그 시간만큼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교통봉사요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지시봉을 분주히 움직인다. 건너편에서 한 할아버지가 교문을 빠져나오는 손자를 발견하자 자동적으로 튀어나온다. 그 걸음을 가차 없이 저지시키는 안전요원의 모습은 여느 교통경찰보다 더 위엄 있었다.

내 기준으로 아이에 대한 공연한 걱정

아이들이 나오자 엄마들은 자기 아이 손을 잡고 한 명씩 돌아간다. 목을 길게 빼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교문 안을 쳐다보는 젊은 엄마가 눈에 띈다. 때마침 그 엄마가 손을 흔들며 교문에 바짝 붙는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와 장난치며 천천히 나오는 모습이 엄마를 애타게 한다. 아이가 나오자 엄마의 손은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낚싯바늘처럼 아이를 바짝 잡아챈다. 한쪽 팔이 엄마의 손에 붙들려 쭉 뻗어 가면서도 친구를 뒤돌아보며 작별하는 아이의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엄마가 바쁜 걸까? 아이가 산만한 걸까?’ 잠시 생각하다 남겨진 친구 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엄마와 함께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섰다. 그 아이의 엄마는 오지 않았나? 안쓰럽다.

파 한 단을 사들고 오는 길에 다시 보게 된 학교 앞 풍경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한바탕 소동이 지난 후의 공기는 적막했고 그 한가로움 덕에 비로소 주변의 파릇한 나무들이 보인다. 어느 틈에 개나리도 망울져 간간이 피는구나. 하나 둘씩 지나가는 아이들도 제법 커 보인다. 무엇보다 따뜻한 봄날의 햇볕이 이미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파 한 뿌리가 꼭 필요했던 한낮의 성가심이 봄날의 여유로운 마실이 됐다.

저만큼 아파트 입구에서 한 아이가 서성인다. 가까이 가니 아까 학교 앞에서 엄마 손에 붙잡힌 아이와 작별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 친구녀석 아닌가. 이 녀석 혼자 심심했나보구나 생각하며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심심해서 여기 친구 집에 놀러왔구나. 너 아까 학교 앞에서 다른 친구랑 헤어지는 것 봤는데….” 나는 아이 마음을 살펴주고 싶은 마음에 다소 과장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닌데요. 저 여기 사는데요. 새로 이사 왔는데요.” 꽤 똘망똘망하게 말한다.

“그래? 그런데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입구에 서 있었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말을 주고받았다.

“아파트 현관카드를 잃어버렸어요. 누가 오면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나는 아까 이 녀석이 친구와 헤어지며 한참을 쳐다보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순간 이 아이의 엄마가 부재 중임을 알고 ‘엄마가 일을 하나? 아님 외출했을까? 웬만하면 아이가 집에 올 때쯤엔 집에 돌아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막연한 안타까움이 생겼다.

“스티로폼 통이네?” 나는 아이 마음을 위로하고픈 마음에 아이 손에 들려 있는 스티로폼 통에 관심을 보였다.

“이거요? 엄마가 재활용 모아놓은 곳에서 깨끗한 스티로폼 통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어요. 여기다 오늘 씨앗 심을 거예요.” 아이 눈이 한결 초롱초롱해진다.

“씨앗을 심는다고? 무슨 씨앗을 심을 건데?”

“아직 몰라요. 엄마가 흙이랑 씨앗들을 사다 놨는데 맘에 드는 걸로 심으래요.”

“재밌겠다. 엄마랑 함께하니 좋겠다.”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여전히 남았는지 계속 아이와 엄마를 엮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저 혼자 할 건데요. 엄만 회사에서 늦게 와서 엄마가 저 혼자 해도 된대요. 다 심고 잘 치우면 돼요.” 제법 의젓하게 말한다.

“혼자? 심을 수 있어?”

“네. 전에 엄마랑 심어봐서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는 말에 힘을 주며 아이는 점점 더 의기양양해진다.

“아이구, 기특해라. 너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아파트에 똘똘한 친구가 이사 왔네.”

“고맙습니다. 우리 엄마도 저보고 멋있대요.” 내 칭찬에 아이는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며 분명히 말한다.

나는 이 똘망한 아이와 헤어지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를 내 기준으로 공연히 걱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아이를 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아이는 명랑하고 유연했다. 맨 처음 학교 앞에서 엄마 손에 이끌려 헤어지는 친구를 물끄러미 보며 아이는 여러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계속 친구랑 놀지 못해 아쉽고, 엄마랑 함께 가는 친구가 부럽고, 순간 엄마가 보고 싶고…. 그런 생각들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했던 ‘멋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재활용 더미에서 깨끗한 스티로폼 통을 주워 오지 않았을까. 엄마가 준비해준 씨앗을 심을 마음으로 이 아이는 즐겁게 집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이 편해졌다.

자녀들의 기회를 본의 아니게 박탈

예전에 내 아이들을 키울 때 생각도 났다. 집에 들어오며 엄마부터 찾던 애들 생각에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엔 꼭 집에 와서 간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엄마가 늘 곁에 있다는 안도감은 줬겠지만 한편으론 아이에게 다소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헤쳐나가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어린아이들은 일정 연령까지 보호자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현대사회에서 맞벌이 부부는 아이와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들을 미안해하며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부모의 부재시 아이들이 느꼈을 마음을 부모가 잘 공감해 주며 아이 마음을 헤아려 준다면 이를 통해 아이들도 책임감과 독립심, 더불어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부 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책임의식 없이 방치해 아이의 인권이 짓밟힌 가슴 아픈 사연이 간간이 들리기도 하지만 때론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자녀를 망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름 아래 자녀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경우가 많다. 깨뜨릴까봐, 엎지를까봐, 위험해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무수히 많은 그럴듯한 이유들로 자녀들이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본의 아니게 박탈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나는 너를 믿지 못해!’ ‘너는 무능해!’라는 예상치 못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믿음은 실패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결단하는 행위이지 않을까.

23층으로 이사 온 그 아이는 그날 자신이 선택한 씨앗을 잘 심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바닥에 흘린 흙은 잘 치웠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마는 나를 믿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굣길에 엄마의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늘 아이의 마음엔 엄마의 믿음이 함께 있을 것이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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