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청소년기와 중년기엔 ‘체질’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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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건물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견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가는 모래를 사용하기 위해 체질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체질을 통해 튼튼한 체질(體質)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영화 <화장>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영화 <화장>의 한 장면 / 네이버 영화

‘청소년’ 하면 뒤이어 ‘비행’(非行)이라는 단어가 떠올려진다. ‘비행’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다. 그러니 청소년 때에는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를 유독 많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모든 청소년이 비행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마 모범적 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이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보다 그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청소년과 비행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일까? 사실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들이 그 숫자는 적지만 청소년기를 대표하는 것은 그 시기에 처한 자녀들이 대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전 시기에 비교해 사뭇 거칠어지고 반항적이고 심지어는 부모에게도 폭력적인 언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청소년 자녀들이 “제발 사고만 치지 말고 청소년기를 무사히 넘기자”고 기도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중년’ 하면 뒤이어 ‘위기’(危機)라는 단어가 떠올려진다.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하는 약간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성과 함께 팔장을 끼고 밀회(密會)를 즐기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들통이 나 곤욕을 치르고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요즘에는 중년여성이 혼외의 남성과 만나거나 심지어는 나이 어린 남자들과 연인이 되는 드라마까지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소년 비행’과 ‘중년 위기’라는 말

하지만 이런 ‘위기’를 겪는 경우는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대다수의 중년에 비하면 그 수는 많지 않다. 그래서 중년에 과연 위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그 분야를 공부하는 전문가들도 왈가왈부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비행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그 시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개연성이 무척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중년을 위기의 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이 시기에 있는 사람들을 전체 모집단으로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위기를 겪는 중년이 조용히 지내는 중년보다 더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중년에는 청년기와 노년기에 비해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개인으로 볼 때는 위기를 더 심하게 겪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는 조용히 지내는 사람도 있다. 중년을 보내는 양상에는 다양한 개인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크게 흔들리는 시기는 위에서 언급한 청소년기와 중년기이다. 이 시기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전과 그 이후의 시기에 비해 심리적으로 현저하게 불안정해진다. 그리고 이 두 시기의 공통점은 우리의 관심이 나의 ‘밖’이 아니라 ‘안’에 쏠린다는 점이다. 두 시기 다 공통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집중된다. 두 시기에 차이가 있다면 청소년기는 ‘나의 미래’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고, 중년기에는 ‘나의 현재’에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아동기와 청년기에는 관심이 외부로 쏠려 있고, 외부의 영향을 받고 설정된 삶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삶에 불순물이 끼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겨를이 없다. 빨리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외부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에만 몰두한다. 그 건물이 내부적으로는 불순물이 섞여 있는 부실공사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실공사 여부를 두려워할 필요 없이 공기에 맞추어 건물을 짓는 것에 매달린다.

튼튼하고 안전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중간중간에 혹시 부실공사가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설계대로 지어지고 있는지, 적절한 자재가 사용되고 있는지 계속 점검하고 관리해야 한다. 점검의 시기를 놓치고 건물이 상당 부분 이미 지어졌다면 이처럼 난감한 일이 없다. 다시 되돌릴 수가 없을뿐더러 설사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허물고 다시 짓는다면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경비와 수고가 따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에서도 중간중간에 ‘체’라는 도구로 ‘체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고운 모래로 계속 살아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비록 흔들리기는 하지만 불순물을 걸러내는 시기가 필요하다. 그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와 중년기이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크고 작은 공사를 할 때에는 꼭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자갈모래를 걸러내는 ‘체’라는 도구가 있었다. 모양이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삼각형 기둥을 만든 사이에 네모 모양의 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한 인부가 체 위에 자갈을 올리면 다른 인부가 그 체를 흔드는 ‘체질’을 했다. 그러면 자갈과 불순물들은 체 위에 그대로 남고 가는 모래는 밑으로 빠져나갔다. 조금 후에 이 가는 모래와 시멘트와 물을 섞어 버무려 집을 짓거나 담장을 쌓는 데 사용하곤 했다.

우리 삶에서 걸러내야 할 불순물

구태여 힘들여 체질을 하는 이유는 굵은 자갈이나 불순물이 시멘트와 섞이면 그 강도가 약해져 붕괴의 위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체질을 하는 것이 귀찮다거나 힘이 든다고 온갖 불순물이 들어 있는 거친 자갈모래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언젠가는 그 부실공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재난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겉모습이 화려한 고층빌딩의 개관식 파티 중에 사소한 부주의나 부실공사로 인한 화재나 붕괴가 일어나 큰 재앙으로 치닫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건물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견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가는 모래를 사용하기 위해 체질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체질을 통해 튼튼한 체질(體質)을 만들어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걸러내야 할 자갈과 불순물은 무엇일까? 그 대상이야 다양하겠지만 건물을 튼튼히 짓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이 걸러내야 할 불순물일 것이다. 우리 삶에서 행복하고 튼튼하게 생활하는 데 방해되는 온갖 것들은 결국 걸러내야 할 불순물이다.

중년을 맞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많이 나오는 하소연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남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녀도 잘 키웠고, 큰 집도 장만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도 다녔다. 하지만 중년이 돼서 돌아보니 허무하고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정작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인지조차 잘 모르겠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래서 중년에는 ‘체질’을 통해 ‘체질’을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진짜 본질이 아닌 욕망을 걸러내야 한다. 이제 중년에 진짜 ‘나’를 찾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와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년에는 심리적 갈등이 심한 것이다. 이 갈등은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체질이다. 체의 망을 촘촘히 하고 열심히 흔들면 정말 고운 모래가 밑으로 가라앉는다.

가는 모래로 공사를 해야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만약 중년에 ‘체질’을 안하면 결국 노년에 해야 한다.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중년에 체질을 철저히 하지 않았다는 회환의 절규이다. 이제는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허무한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자.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해온 욕망의 자갈을 걸러내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체질’을 열심히 하자. 2018년도 며칠 안 남았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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