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를 건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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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손에 이끌려 일어나며 “이젠 나도 내가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구나. 더군다나 쓸데없는 오기는 버려야지.” 중얼거렸습니다.

[칼럼]횡단보도를 건너며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 지리적 조건으로 보람 있는 일이 몇 가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출퇴근할 때 지하철역까지 15분 정도를 걷게 된 것입니다. 버스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기다리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큰 차이도 나지 않아 적당히 걷는 것보다 좋은 것도 없을 뿐더러 버스비도 절약되니 아침저녁으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는’ 마음으로 내심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장이라는 역할이 출근이 분초를 다투는 일도 아니고 무슨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다 꼬박 제 시간에 출근하면 오히려 다른 직원이 불편해 하는 눈치도 있어서 여유 있고 느긋하게 하려 하는데, 평생 몸에 밴 시간관념은 어쩔 수 없어 나도 모르게 괜히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하철역까지 걷다보면 건널목을 세 번 건너야 하는데 이 건널목 건너기가 가끔 말썽을 일으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걷다 보면 애매한 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뛰면 건널 것 같고 천천히 걸으면 붉은 신호등 앞에서 불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멈추어 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붉은색 신호등에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왠지 싫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지요.

그날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신호등 파란불이 깜박이고 있는데 뛰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멈칫거리다가 깜박 내 꼬락서니를 잊고 뒤뚱거리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건널목을 거의 다 건너가서 마음의 끈을 살짝 놓는 순간, 앗-차 인도로 올라가는 조그만 콘크리트 턱에 걸려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전 같으면 그냥 차고 나가거나 흔들 하다가도 금방 균형을 잡았을 텐데, 다리 힘도 약해지고 균형감각도 허물어져 마음 같지가 않았던 게지요.

실수와 창피함을 감추느라 “세금 걷어 구청 놈들은 뭐하는 거야. 이런 시설 하나 제대로 못하고!”라며 애먼 화를 내며 투덜거렸습니다. “에이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네” 하며 한심한 타령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몇이 얼른 달려와 조심스레 내 팔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 손이 얼마나 부드럽고 믿음직스러운지 마음까지 따뜻해졌습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지 않으셨어요?”
살뜰한 말투도 그렇지만 ‘할아버지’나 ‘어르신’이라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 하는 게 얼마나 은근히 또 고마운지 눈물이 다 핑 도는데, 학생들 손에 이끌려 일어나며 “이젠 나도 내가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구나. 더군다나 쓸데없는 오기는 버려야지.”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중·고교 학생의 두발 자율화 정책을 공론화과정을 거쳐 내년 하반기부터 실시한다는데 이런 학생들을 인정하고 믿으며 자주성과 자율성을 키워주는 일이라니, 어쩔 수 없이 꼰대인 나부터 한 표 보태야겠습니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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