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스승의 날에 큰절 드리고 싶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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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승들은 부모와 더불어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비록 당장에는 그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가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돌아왔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꼭 생각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고인이 되신 터라 다시 뵐 수는 없지만 “선생님 덕분에 사람 노릇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라며 큰절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분은 필자가 다녔던 중학교 교감이셨던 김종수 목사님이다.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스승의날 행사./연합뉴스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스승의날 행사./연합뉴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서울에는 특수초등학교가 2개 있었다. 하나는 서울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또 하나는 서울교대 부속초등학교였다. 두 학교는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다닐 수 있었다. 필자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에 응시했다가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해 다니다가 1학기를 마치고 적응을 못한 채 말썽을 부리다 제적당했다. 그리고는 집에서 외롭게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해 서울교대 부속초등학교에 합격했다.

내 삶의 방향을 바꿔준 선생님

명문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한 번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열등감을 잊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입학시험을 봤다. 전국적으로 소위 명문 중학교의 서열도 정해져 있었다. 선생님들은 필자가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명문 중학교에 무난히 합격할 것이라고 큰 기대를 걸고 계셨다. 물론 필자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5학년 2학기가 되자 불행이 찾아왔다. 갑자기 난치병에 걸렸다. 피곤하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병이라 거의 1년 동안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 6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증세가 조금 호전되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명문 중학교의 문턱은 높았다. 결국 지원했던 중학교에 불합격했다.

초등학교도 재수를 한 터라 할 수 없이 전기에 불합격한 학생들이 가는 후기 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에는 큰 상처가 났다. 거기에 초등학교 때 불합격했던 상처까지 더해져 심한 열등감과 분노가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모두 관계를 끊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던 명문 중학교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등한시하고 거의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 필자는 지금도 중학교 때 친구들이 없다. 거의 3년을 우울증에 빠져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무기력하게 무위도식하면서 보냈다. 열심히 공부해서 고등학교는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은 잔뜩 삐뚤어진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던 3학년 1학기 말 어느 날 급우들은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있었고 필자 혼자 텅 빈 교실에서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를 지나가시던 교감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닌가? 교실에는 필자 혼자밖에 없었으니 분명히 필자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들어오신 것이었다. 야단치시거나 혹은 “공부 열심히 하라”는 상식적인 조언을 해주실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필자에게 다가오시더니 교감선생님이 “성열아”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고는 “아직도 마음이 그렇게 아프니?” 하시면서 다정스럽게 안아주셨다. 그때 갑자기 필자의 마음속에서부터 통곡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도 놀랐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교감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실컷 울고 난 후 울음이 잦아들자 교감선생님이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그때 필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진심으로 “예” 하고 대답했다.

지금까지 많은 선생님들이 필자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좋은 말씀을 해주시곤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열등감이 꽉 차 있는 상태여서 그 말씀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뜻도 잘 몰랐던 교감선생님의 말씀이 신기하게도 필자의 마음속에 그대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교감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신 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허송세월하면서 지낼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무언가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 학교생활이 180도 변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의 심리학도로서 당연히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필자가 봉직하던 대학원에 ‘통일심리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그 주제에 관심 있는 대학원 학생들과 통일의 전과 후, 그리고 과정 속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심리적 통합을 이루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분단의 현장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대학원생들과 2002년 7월 판문점에 견학을 갔다. 상쾌한 초여름의 날씨를 즐기면서 넋 놓고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교감선생님이 36년 전에 해주셨던 말씀 “성열아, 분단된…”이 마치 옆에 계시는 것처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또렷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교감선생님의 말씀이 필자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교수가 되자 통일심리학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36년 만에 깨달았다. 필자뿐만 아니라 열등감과 좌절감에 시달리며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뀐 경험을 한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듯이, 이처럼 좋은 스승들은 부모와 더불어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비록 당장에는 그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가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결실을 맺는다.

“스승의 날은 교사에게 참으로 힘든 날”

하지만 요즘 선생님들은 오히려 스승의 날에 더 참담하고 괴롭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자신을 고등학교 교사라고 밝힌 네티즌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다고 한다. “스승의 날은 교사에게 참으로 힘든 날”이라며 “1년에 단 하루,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내미는 꽃 한 송이, 편지 한 통을 받아도 죄가 되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단다.

사정이 그렇게까지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여건과 부존자원이 별로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세계가 놀란 만한 경제적 부흥을 이룬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녀의 미래를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부모의 사랑과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교사들의 노고에 힘입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마운 분들에게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할 특별한 기념일이 많은 5월에 진심이 담긴 감사의 마음이 오가기를 바란다.

“김종수 교감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사람 노릇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한성열 |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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