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팍팍해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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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반지하 원룸의 소박한 가구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3년차 부부인 종철과 선미는 같은 회사에서 각각 배달 운전사와 판매원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직원이다. 맞벌이로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밤에는 예능프로를 보며 함께 웃고, 휴일에는 마트에서 고기를 사다가 레스토랑에 외식 온 기분을 내는 등 소박한 일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얼핏 보면 가난해도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사실 이들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대부분 자신들과 거리가 먼, 부유하고 풍족한 삶에 대한 동경과 몽상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와이에 가게 되면 리조트에서 우아하게 와인을 마셔야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요리를 즐기고 싶다.’ ‘우리집 욕실에 월풀이 있으면 하루의 피로를 편안하게 풀 수 있겠지?’ 등등. TV와 잡지,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이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그리고 아마 영원히 이루지 못할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환상에 빠져들고 상상 속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극단 산수유 제공

극단 산수유 제공

허상을 대리만족 삼아 살아가던 이들의 일상은 ‘임신’이라는 갑작스런 상황을 통해 순식간에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허상을 걷어내고 실제로 마주하게 된 이들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차갑고 딱딱하며 말도 못하게 팍팍하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아이를 위한 생활비를 마련해보겠다며 한 달 지출 내역과 절약 방안을 고민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이 팍팍한 현실의 민낯을 리얼한 숫자만으로 고스란히 드러낸다. 월세 50만원, 전기세/수도세/가스비 9만원, 보험료 17만원, 대출금 43만원, 이동통신비 10만원... 도저히 줄일 수 없는 지출 내역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부부는 초라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이와 다를 바 없는 객석에서도 깊은 한숨이 늘어간다.

극단 산수유의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독일 극작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희곡 <오버외스터라이히>를 연출가 류주연이 한국의 현실에 맞게 번안, 연출한 작품이다. ‘오버외스터라이히’나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모두 극의 배경이 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으로, 아내의 임신이 탐탁지 않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극의 말미, 아내는 신문에서 이 사건을 발견하고는 남편에게 일부러 기사를 읽어준다. 나와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낯선 곳에서도 일상의 모습은 똑같이 흘러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이 제목은 무대 위 부부의 모습과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2007년 초연된 작품이니 올해로 딱 10주년을 맞이한 연극이다. 10년 전 이 작품을 봤을 때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뱃속 아기에게 색소폰을 불어주는 부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삶의 의미와 따뜻한 온기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늘, 더욱 팍팍해진 지금 이곳을 살아가면서 다시 바라보는 무대 위 부부의 모습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더 안타깝고 안쓰럽게 다가왔다. 아무리 “What a wonderful world”를 아름답게 불러보아도, 가진 것 없는 남편의 색소폰 연주만으로는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을 알기에, 마지막 멜로디는 차가운 현실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듯한 서글픈 잔향을 남겼다. 1월 21일까지, 동숭아트센터 꼭두소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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