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음악가 윤민석 “나는 딴따라 아닌 전사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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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과정에서 가장 낯 익은 노래를 꼽으라면 <헌법 제1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2항이 경쾌한 리듬에 맞춰 반복되는 이 노래는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흥얼거리는 촛불의 상징음악처럼 됐다.

헌법재판소가 설립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헌법이 이렇게 널리 홍보된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헌재가 이 노래에 홍보비나 음원 사용료를 줬다는 소식은 없다. 이 노래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처음 선보였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서도 즐겨 불렸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윤민석씨(53)다. 보통 우리들은 그를 민중음악가로 부른다. 특히 그는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이게 나라냐 ㅅㅂ>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냐/근혜 순실 명박도둑 간신의 소굴/…박근혜는 당장 하야하여라/…박근혜를 하옥시켜라”라는 이 노래는 탄핵국면에서 많이도 불렸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중음악가 윤민석 “나는 딴따라 아닌 전사이고 싶었다”

촛불혁명의 상징음악 <헌법 제1조>

-노래대로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고 구속됐다. 예상하고 노랫말을 썼나.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싸움에서 쓰임을 갖는 노래를 만들 때는 싸움에서 깃발처럼, 주문처럼, 기도처럼 그런 바람을 갖고 만든다. 그래서 주문대로 된 것이다. 세월호 노래 만들 때 나는 아이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한다.”

-지난번 촛불을 주도한 퇴진행동은 후원금이 남아 백서도 만든다는데, 많이 사용한 노래에 대해 음원 사용료를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주변에서 그런 얘기 많이 받는다. 아무리 무료라지만 그 노래 없었다면 집회가 됐겠냐고.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됐다’고 하지만… 준다면 나야 좋지. …세월호 때도 ‘아이들만 보고 가자’고 그랬고, 촛불 때도 ‘박근혜만 탄핵시키자’고 말했다. 하지만 서러움과 슬픔은 남아있다. (허~허~)”(그는 허탈하고 맥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렇더라. 처음 촛불을 든 노동자·농민·민중가수들은 잊혀지고 나중에 행사 사회를 보던 시민단체 간부와 유명가수, 그리고 정치인들이 촛불의 공을 차지하더라.

“심지어 이번 촛불혁명의 주역들이 민주노총의 과격한 투쟁세력으로, 옛날 통합진보당 세력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예리한’ 답변이다. 사실 11월 21일 수원지방법원은 2014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음모 RO회합 참석은 무죄’임을 재확인하면서도 ‘민중가요 합창은 유죄’라고 선고했다. 촛불정부 사법부도 민중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처벌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심지어 노래를 만든 당사자마저 “항일투쟁 독립군을 생각하며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민석씨 인터뷰는 10월 말부터 접촉했다. 그런데 그는 매우 바빴다. 그는 암 투병 중인 아내를 간호하고, 후배 사무실에 얹혀 있는 조립식 녹음부스(모든 노래는 여기서 녹음됐다)를 옮길 장소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빈약한 녹음장비조차 둘 곳이 없던 그는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을 때까지 기꺼이 침묵…”이라며 민중가요 활동을 접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5일 ‘후련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30년 했던 민중음악과 결별하는 입장에서 그는 쌓였던 ‘울분’을 마구 토해냈다. 세상에 대한 섭섭함도, 자신에 대한 참담함도 진하게 묻어났다.

그는 촛불혁명 국면에서의 평가는 차치하고 민중음악가들이 힘든 것은 일반의 인식이 낮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우리는 문화(노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천박하다, ‘여봐라~ 풍악을 울려라’ 수준으로 우리 노래는 대일밴드처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최소한 법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조>가 헌법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점에 음원 사용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어떤 헌법교수가 <헌법 제1조>는 책장에 있던 헌법을 모든 국민에게 돌려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 뭐하나. 헌법재판소 일을 하던 한 선배가 ‘이 행사에 제일 잘 맞는 노래가 너의 <헌법 제1조>다’라고 했다. 그런데 헌재는 ‘윤민석이 만들어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내 전과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하~하~) 25년 전 꼬박 죗값을 다 치르고 나왔는데도 말이다.”

-정부가 독립영화는 물론 출판·음악도 지원한다. 민중음악도 음악의 한 장르로 지원할 수 있다. 민중가요도 음원 사용료를 보장하는 법 하나 못 만드나.

“울컥할 정도로 고마운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자의 생각일 뿐이다. 민중음악도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힘든 노동조합 행사장에서 민중음악 부르다 노조가 형편이 좋아지면 유명가수를 부른다. 민중 속에서도 우리는 대일밴드 수준이다.”

-같이 한 386세대들이 정치권에 얼마나 많이 진출했나. 그들이 민중음악 보호·지원책 하나 못 만드나.

“정치권으로 나간 친구들과 우리는 사는 궤도가 다르다. 대학 때 치열하게 같이 민중음악을 얘기한 친구가 국회의원이 됐다. 남아있는 우리가 민중음악을 위해 백 걸음을 걸어야 할 때 그 국회의원 친구는 한 걸음만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아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순간 달라진다. 자기는 고급 정보를 가진 존재이고, 계속 운동하는 우리는 나이브한 몽상가로 본다. 나중에는 연락조차 안 된다. 대부분 그렇다.”

-그래도 영원한 동지를 결의한 사이 아니었나.

“동지였지…, 그래도 변절하지 않은 것을 고마워할 뿐이다. 오히려 동지 등에 칼을 꽂은 인물이 한둘이던가. 김○○, 이○○, 하○○… 사람은 늘 변한다.(하~하~)”

그가 초심을 잃지 않은, 아니 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명료했다. 그는 “내 노래를 부르며 나가자 싸우자 했고, 그러다 감옥 가고 고문당하고 죽은 친구가 있었다”면서 “그들에게 덜 미안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이 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정치판에 갈 때 ‘나같이 초심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민중음악가 윤민석씨가 30년 동안 해왔던 민중음악을 접으며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민중음악가 윤민석씨가 30년 동안 해왔던 민중음악을 접으며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고시 낙방, 대학 3학년 때 인생 달라져

기자가 ‘너무 자신에게 가혹했던 것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가혹했던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친구가 강제징집돼 의문사를 하거나 노동운동을 하다 불구가 됐는데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죽은 이한열에게, 박종철에게 한없이 미안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처절한 자기 결백을 넘어 자기 학대 수준이다. 그래서 그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정신과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인생의 롤 모델은 정신적 측면에서 문익환 목사,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김남주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 악의 근원은 친일청산 못한 것과 분단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면서 “뻔뻔한 그들은 한 번도 철저하게 응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허세인지 모르지만 나는 딴따라보다 그들을 응징하는 전사로 불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1964년 경북 영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우병우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1·2등을 다퉜다. 우병우와 나란히 경찰대학교에 합격까지 했지만 서울대를 가려다 자신은 떨어지고, 우병우는 갔다. (이는 비보도를 전제로 얘기했지만 이미 공개돼 여기에서도 쓴다) 1984년 한양대 무역학과 장학생으로 들어간 그는 2년 안에 고시(공인회계사)에 합격해 서울대 실패를 만회하려 했다. 그는 속으로 데모하는 애들을 뻘짓한다고 욕했다.

SNS ‘윤민석 300인 후원 프로젝트’

그는 이때를 ‘싸가지 없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특유의 ‘날라리’ 기질로 고시에 낙방했고, 3학년 때 낡은 광주민중항쟁 사진첩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 그리고 87년에 KBS 점거로 첫 구속된 이후, 89년 겨울에 임종석(현 대통령 비서실장) 석방투쟁으로 다시 구속됐다. 92년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13일 동안 고문당한 끝에 세칭 ‘남조선노동당 사건’에 엮여 3년 실형을 살았다.

그의 죄목은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등 북한 찬양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에 주사파도 흔하던 그때 한 선배가 가사를 주면서 곡을 달아 달라고 부탁해 10분 만에 곡만 써준 것”이라며 “검사도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 ‘뻥 튀겨’ 기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문으로 내가 토한 피를 내가 먹었을 정도였다”면서 “서울구치소로 넘어갈 때 박종철처럼 죽지 않았다고 ‘만세’를 부르며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민중음악 수익모델로 음원은 무료로 공개하는 대신, 매달 1만원을 내는 후원회원 1000명을 만드는 ‘송앤라이프’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너흰 아니야>라는 노래와 <헌법 제1조> 노래 덕분에 후원회원이 990여명이 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수천만 원 빚만 지고 사업을 정리하고 말았다.

<전대협 진군가> <반미출정가> <오 통일이여> <서울에서 평양까지> 등을 만들었던 그는 97년 대중가요도 만들었다. 가수 이정렬이 불렀던 <그대 고운 내사랑>은 7주간 방송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2년 동계올림픽에서 반칙으로 금메달을 가로챈 미국 안톤 오노를 풍자한 <퍼킹 USA 1·2·3>이 ‘대박’을 쳤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만든 것이 바로 <헌법 제1조>와 <너흰 아니야>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으로 촛불시위가 벌어졌을 때 <촛불을 들어라!>를,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잊지 않을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무참히 죽어간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음대를 나오거나 자격증이 없지만 이 짓만 30년 한 음악의 숙련공”이라며 “나는 기술자가 아닌 노동자”라고 말했다. 그는 민중가요가 투박한 이유는 좋은 녹음시설이 없기 때문이고, 음악성이 없다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래패에서 후배 양윤경을 만나 1998년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그녀가 암인지 알았지만 결혼했다. 암을 잘 관리하던 아내는 2009년 급속도로 악화돼 2012년 4기 말기 판정을 받았다. 새로운 항암치료를 위해서는 1억원이 있어야 했지만 그는 돈이 없었다. 그는 “그때 생애 처음으로 ‘그냥 경찰대를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고 기억했다.

그때 트위터에 ‘1억원만 도와달라’고 호소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십시일반 1억5000만원이 모였다. 최근 그가 민중가요를 접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SNS 상에서 ‘윤민석 300인 후원 프로젝트’가 벌어지고 있다. 1만원씩 300명을 모아 매달 300만원을 전달하자는 모임이다.

그는 11월 21일 페이스북에 “정말 눈물 나고 가슴 먹먹해지는 한없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이건 아니다”라면서 “부디 이제 후원을 멈추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관심도 못 받으며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내가 돈이 없지 가오(일본어이지만 자존심이라는 말로 국어사전에 올라 있다)가 없나”라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인물이었다.

기자는 그의 후원계좌를 여기에 공개할 것인가를 한참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생각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와 함께했던 힘있는 친구·동지들에게 ‘민중가요에 대한 한 걸음’을 재차 요구하기로 했다. 물론 그것은 ‘합법적 권리’를 제도화해 달라는 당연한 요구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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