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만큼 절박한 것이 또 있을까. 죽음만큼 가장 두렵고, 극적이며, 또 성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순국’ 즉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 그러나 바로 11월 17일이 순국선열의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넘어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순국선열의 날은 역사도 오래됐다. 1939년 상해임시정부가 11월 21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했다가 을사늑약 체결일인 11월 17일로 바꿨다.
8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순국선열의 날을 맞는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은 침통하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놀랄 만하다. 처음에는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구체적 수치를 보면 광복 72년인 지금까지 우리 보훈정책이 어떠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적폐도 이렇게 오랜 적폐가 없다.
“국가보훈 기본법 제18조에는 ‘국가보훈대상자에게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는 예우 및 지원을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현실은 목숨을 버린 순국선열보다 살아서 귀국한 애국지사를 더 예우하고 지원하는 모순이 계속돼 왔다. 보훈처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알지만 입을 꾹 다물고 모른 척하고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순국선열유족회장 김시명 “70년 보훈적폐, 이제는 개선해야 한다”](https://img.khan.co.kr/newsmaker/1253/20171128_32.jpg)
순국선열보다 애국지사 위주의 정책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윤봉길 의사, 류관순 열사 등이 모두 애국지사이자 순국선열 아니었나. 그러나 그게 아니다. 법(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제4조)에 분명히 순국선열과 애국지사가 구분돼 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이후 항일투쟁을 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전에 숨진 사람은 순국선열이고, 살아있던 사람은 애국지사다.
따라서 유인석·허위 등의 구한말 의병투쟁과 이상룡·김동삼 선생의 신흥무관학교를 통한 독립의용군, 의열단 등을 통한 무장 항일투쟁 과정에서 숨진 사람이 순국선열이다. 대신 상해나 미주에서 문화·외교투쟁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한 사람은 애국지사다. 당연히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이 훨씬 더 의미 있고 숭고한 가치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해방 후 보훈정책은 죽은 순국선열보다 산 애국지사 위주로 이뤄졌다.
이것은 돈, 즉 지원의 문제가 아닌 정신적 문제다. 모든 국민이 평상시 기본으로 행하는 제례가 바로 국민의례다. 처음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그리고 다음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순이다. 이 국민의례는 국경일은 물론이고 입학·졸업식과 기업체 시·종무식, 월례 직원조회에서도 반드시 시행하도록 규정돼 있다.
국민은 행사 때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지만, 정작 정부의 최고·공식 추념기관인 국립현충원에는 순국선열묘역이 없다. 순국선열 위패는 서대문 역사기념관 한쪽 188㎡(56평) ‘순국선열 현충사’에 모셔져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3525분의 순국선열을 인정했지만, 장소가 좁아 2835명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운영도 국가가 아닌 순국선열유족회에 달랑 연간 1000만원을 지원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동양에서는 정신적 신주(위패)를 모신 곳을 시신이 묻힌 묘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선왕조의 능보다 중요한 것이 위패를 모신 종묘다. 그래서 국가무형문화제 제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은 바로 종묘제례다.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이 행사가 뒤에 국가무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된 것도 그 중요성과 예술성 때문일 것이다.
-제례에서 가장 중요한 위패가 국립현충원이 아닌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뭔가.
“세계 어느 나라도 산 사람보다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든다. 그런데 국립현충원에 있어야 할 이 시설은 1995년에야 겨우 만들었다. 게다가 이 시설을 국민에게 개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문을 열고 닫으려면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 사람을 채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4년 내가 사비로 사람을 채용해 이 위패실을 개방했다.”
-믿을 수 없다. 순국선열 위패를 모시는 시설을 만들었으면 예산을 배정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말하면 뭐하나. 순국선열의 날이라고 하지만 제사 지낼 돈이 없더라. 정부(보훈처)가 연간 600만원 정도 예산을 지원했다. 2013년 내가 부회장으로 와보니 기본적 시설 유지도 안돼 빚만 7000만원 지고 있었다. 겨우 서울시와 행정안전부를 통해 2000만원을 지원받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번 피우진 보훈처장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예산을 좀 더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가 잘못돼 있다.”
-광복의 공헌도와 희생도를 따지면 목숨을 버린 ‘순국’ 이상이 있겠나.
“그렇다. 여러 법적 조항을 바탕으로 환산한 결과 순국선열은 애국지사보다 5배 이상 희생도와 공헌도를 가졌다. 그러나 2008년 예를 들면 독립유공자를 지원하는 순애기금(순국·애국자 지원기금으로 박정희 정권시절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조성한 기금)에서 순국선열 지원은 1억6300만원에 불과한 반면, 애국지사는 47억6000만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뭔가.
“보훈처 지원이 살아있던 애국지사 위주의 광복회를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회 총회에서 애국지사(유족) 비율이 93.5%이고 순국선열은 6.5%에 불과하다. 그러니 애국지사 위주의 보훈정책만 했다. 류관순·윤봉길·안중근 등 유명 순국선열 19명은 별도 기념사업회로 지원할 뿐 나머지 3500명이 넘는 순국선열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후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전몰군경유족회나, 4·19혁명 희생자유족회도 모두 공법단체로 국가가 운영비를 지원한다. 그러나 정작 건국의 최고 공헌자인 순국선열유족회는 공법단체로 등록되지 못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단 순국선열에 대한 금전적 지원만 소외된 것이 아니다. 김 회장이 파악한 순국선열에 대한 정책적 홀대는 무려 42가지나 된다.
“국립현충원에 순국선열 묘역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 손자녀에 대한 의료비, 가계 지원비, 중·고등학교 등록금, 대학 수업료 면제, 대학 특별전형, 아파트 특별공급 혜택도 애국지사는 되는데 순국선열은 전혀 없다. 심지어 애국지사 후손은 지하철과 고속도로 통행료도 면제되는데 우리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이 서대문 순국선열 현충사 확장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부 지원 못받는 순국선열유족회
순국선열유족회 김 회장은 1946년 경북 안동 출신이다. 그의 증조부인 김필락 선생(1873~1919)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21일 안동 천지시장에서 만세를 주동하고, 시위군중을 이끌고 천지주재소에서 일제경찰과 대치하다 총에 맞아 순국했다. 같이 행동대원으로 따라나선 조부는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젊은 33세에 숨졌다. 증조부는 독립운동사를 통해 피살 사실이 인정돼 서훈을 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조부는 재판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김 회장은 “보훈처 공헌심사위원이 학자들로 구성되다 보니 재판 등 당시 일본사람이 기록한 사실만 믿는다”면서 “당시 현장 참가자 증언이나 과학수사 등을 통해 정황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서면기록에만 의존하는 이 문제는 보훈심사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문제다. 독립유공자의 항일투쟁 전체를 평가해야 하는데 세세한 부분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듯이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순국한 김 회장의 집안이 좋을 리 없었다. 그의 부친 역시 빈곤에 허덕였고, 김 회장 역시 중학교조차 진학하기 어려웠다. 그는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지만 진학을 포기했다가 뒤늦게 극빈자 전형으로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덕택에 안동농림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고, 또 1등으로 졸업한 덕분에 대학(건국대)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순국선열·애국지사 후손의 보상차이
2대에 걸친 순국 집안인 그는 정부의 보훈혜택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산 것이다. 대학 학군단(ROTC)으로 졸업하고, 이후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 다음 순국선열유족회에 가입했다. 2013년 순국선열유족회에서 ‘이사로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은 이유도 ‘돈 없는 이 단체에 후원 좀 하라’는 것이었다. 김 회장처럼 그나마 혼자 노력으로 교육도 받고 자수성가했기에 망정이지, 순국열사 후손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유족회원 대부분이 회비 납부도 어려울 정도다. 많이 배우지 못한 순국선열 후손들은 이렇게 잘못된 보훈정책을 바로잡을 최소한의 권리 주장도 못했다. 그게 누적되고 결국 후손 3대가 망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보훈예산 500억원을 증액했다. 현재 보훈 대상을 증손자녀에서 고손자녀로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현재 법에는 보상금을 증손자녀까지 1명만 주게 돼 있다. 그런데 애국지사는 직계가 없으면 권한이 형제로 이전되지만, 순국선열은 이전이 안 된다. 또 순국선열은 ‘최연장자 우선’이라는 단서조항까지 있다.
그러다 보니 순국선열 후손과 애국지사 후손의 보상 차이는 엄청나다. 김 회장은 “순국선열의 평균 순국 연도는 1919년인 데다, 연장자 우선 조항 때문에 순국선열 후손은 보상금을 5~10년 받고 끝난다”면서 “이에 비해 애국지사 평균 사망은 1952년인 데다, 권리가 이전돼 후손들은 평균 55년 이상 보상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잘못된 보훈정책 때문에 순국선열 후손 3대가 망한 것”이라며 “보상과 정책 지원을 받은 애국지사 후손 3대는 나름 정상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제도적 모순을 고치지 않고, 단순히 독립운동가 후손 보상 대상을 고자녀까지 늘린들 정작 순국선열 후손은 거의 아무런 혜택이 없다. 이런 문제는 10월 20일 보훈처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다. 자유한국당 홍일표 의원이 국정감사장에 김 회장을 증인으로 불러 이런 문제를 지적했다.
순국선열 위패를 모신 서대문 순국선열 현충사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도 부쩍 늘어났다. 2014년 처음 개관했을 때 한 해 참배객이 1600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2500~3000명이나 된다. 요즘에는 주변 안산을 돌면서 태극기도 만들어 보는 ‘순국선열 따라 걷기’ 등 다양한 행사가 초등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2015년 현충사를 확장해 순국선열 위패 4000여위와 애국지사 위패 4000여위를 같이 모시기로 하고 예산까지 확보했다. 그러나 장소를 제공할 서울시와 사업을 결정할 보훈처, 광복회 등이 얽혀 지지부진하다. 모두 적폐청산을 말하지만, 70년 쌓인 이런 보훈적폐처럼 부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참담한 자신의 경험담을 전해줬다.
“몇 년 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 세미나에서 김모 교수가 ‘1948년 건국절’ 주장을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럼 1946년생인 내가 태어난 나라는 어느 나라냐?’ ‘그때가 미군정 시절이니 미합중국 국적이냐’ ‘나는 한 번도 국적을 바꾼 적이 없다’고 따졌다. 발표자는 주저주저하며 말을 못하더라.”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