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문화’ 유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칼럼]‘갑질문화’ 유감

최근 한 병원 간호사들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병원재단 체육대회에서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추라는 요구를 받는가 하면, 결혼한 간호사들 사이에 임신의 순번까지 정하는 관행이 있다고 한다. 뒤이어 비슷한 사례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일들이 어디 간호사들에게만 벌어질까?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이런 불쾌한 일들을 흔히 직장 내 ‘갑질문화’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 갑질문화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우선은 이것이 지시하는 내용 자체가 불쾌한 것들이고, 또 뒤에 붙은 접미사 ‘질’이 주는 부정적 어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불편해 하는 더 큰 이유는 ‘문화’라는 단어에 있다. 갑질에 ‘문화’가 붙어 널리 사용되게 된 것은 대통령이 몇 달 전 부처에 갑질문화 근절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하면서부터다. 당시 육군 사령관 부부가 공관병에게 부당한 지시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선 대통령이 비속어에 가까운 갑질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 ‘문화’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이 문제의 해결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라는 표현을 쓰면 몇 가지의 뉘앙스가 가미된다. 우선은 이런 일들이 매우 널리 퍼져 있음을 암시한다.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니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문화’라고 하면 이런 일이 관행과 같아서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뜻이 내포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성을 암시한다. 이런 뉘앙스가 확대되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행위가 용납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발전될 수 있다. 그러면 해답은 찾지 못한 채 문제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때로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 자신이 되레 까탈스런 사람 혹은 조직 부적응자로 지목될 수도 있다.

소위 갑질문화는 문화 또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잘잘못을 가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슬며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앞에 언급한 간호사의 일들이 벌어졌을 때 해당 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첫 번째 대응은 병원 자체 시정 노력을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관행이고 문화이니 알아서 개선해보라는 식이다. 기업 내에서 혹은 기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갑질이 용납될 수도 있는 문화가 되어서는 안된다. 갑질이란 ‘직무상 위계관계를 이용하여 부당한 지시나 요구를 하는 일체의 행위’이다. 분명 부당한데도, 문제가 명확히 규정되어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계약상 혹은 직무상의 권한과 책임이 어디까지인지가 불명하기 때문이다. 하급자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가 불명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확실히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 부정적 어감에도 불구하고 갑질문화라는 단어에서 문제의 본질을 그나마 가장 잘 나타내주는 단어는 ‘갑’이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계약의 한쪽 당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 간 거래는 물론이고 직장 내의 업무도 냉정히 말하면 자유로운 경제주체 간의 계약에 기초한 행위이다. 이 계약의 내용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불명확할 때 그 틈으로 모호하지만 불편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피해는 실질적 약자에게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갑질이다. 소위 갑질을 없애기 위해 우리 사회가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계약의 내용을 명확히 하고 직무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기준과 사례를 쌓아가는 것이다.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보다 일상의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행복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박복영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칼럼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