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역사적인 ‘내일은 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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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015B, 넥스트,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윤상 등 음악팬들이 열광해 마지않던 스타들이 결집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다섯 그룹과 여섯 명의 솔로 뮤지션이 출연한 공연은 8000여명의 관객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환경보호 의식 확산을 위해 기획된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의 시작이었다.

얼마 뒤 11월에는 같은 제목의 음반이 출시됐다. 공연을 통해 먼저 선보인 출연자들의 창작곡이 실린 앨범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제외한 모든 가수가 각자, 혹은 짝을 이뤄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노래를 만들었다.

/경향자료사진

/경향자료사진

수록곡 중에서는 넥스트의 <1999>가 가장 신선했다. 노래는 이상기후로 완전히 제 모습을 잃은 가상의 지구를 묘사한다. 오후 2시인데도 하늘은 밤처럼 어두우며, 산성비로 인해 식물은 모두 사라진 상태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약탈을 일삼는다.

시종 울리는 비명과 사나운 톤의 전기기타 연주, 인류 소멸을 암시하는 후반부의 늘어지는 편집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신해철은 노래에서 지구가 최후를 맞는 순간에 음성 기록을 남기는 생존자로 분한다. 그의 내레이션은 모든 것을 체념했지만 긴박감을 떨쳐 내지 못하는 화자의 심정을 잘 표현해 노래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015B의 <철이를 위한 영가>는 차분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노래는 반주 없이 객원 보컬 김태우의 목소리로만 구성됐다. 황폐해진 지구를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이가 느끼는 허망함을 극대화하는 영리한 연출이었다.

015B는 같은 해 발표한 <적(敵) 녹색인생>에서 악기를 쓰지 않고 몸을 두드리거나 입으로 내는 소리로 반주를 완성한 바 있다. 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권유를 음악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철이를 위한 영가>가 취한 무반주 독창 양식은 그 콘셉트의 연장이기도 했다.

신해철이 작사, 작곡, 프로듀스한 테마곡 <더 늦기 전에>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근사하다. 다수의 청취자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귀에 잘 익는 멜로디를 띠면서도 외형은 아레나 록, 프로그레시브 록 스타일로 제작해 웅장미까지 뽐낸다. 참여 가수 개개인의 음색과 창법이 돋보이게끔 한 면밀한 배치로 노래의 여운은 한층 진해졌다.

가사도 무척 멋스럽다. <더 늦기 전에>는 “그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담게 해 주오”라는 후렴을 통해 인류가 환경을 보호해야 할 당위성을 낭만적으로 호소했다.

애석하게도 이들의 노래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콘서트가 1995년까지 세 차례 더 개최되는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산업화는 숙명처럼 거듭됐으며, 이에 따른 환경오염도 막심한 상태다. 위기감만 수십 년째 쳇바퀴를 굴리고 있을 뿐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내일은 늦으리> 음반은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여러 사람과 공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음악적으로도 훌륭했다. 주류의 스타들이 사회문제를 노래에 담아내는 것이 평범했던 날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늘날 가요계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검출할 수 없는 풍경이다. 역사적인 순간이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

<한동윤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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