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복스 20주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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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판은 무망해 보였다. 타이틀곡 ‘남자에게 (민주주의)’는 조잡하고 해괴한 구성 탓에 이렇다 할 지지를 얻지 못했다. 힙합 스타일의 후속곡 ‘머리 하는 날’ 역시 반응은 시시했다. 여성 그룹이 하는 힙합에는 대중의 관심이 뜨겁지 않았다. 1997년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딘 걸 그룹 베이비복스는 빠르게 무대에서 내려오고 만다.

퇴장은 포기를 위한 결정이 아니었다. 재정비와 변신을 목적에 둔 후퇴였다. 멤버들은 2집을 발표하면서 데뷔 때의 애매한 강인함을 버리고 청순함을 부각한다. 타이틀곡 ‘야야야’는 사춘기 소녀 감성의 노랫말과 화사한 멜로디를 앞세워 히트했다. 후속곡 ‘체인지’(Change)는 ‘야야야’보다 반주의 강도가 셌지만 서정성 짙은 가사와 흡인력 있는 후렴 덕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베이비복스는 1999년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면서 또 한 번 콘셉트에 변화를 준다. 이번에는 성숙함이었다. 타이틀곡 ‘겟 업’(Get Up)은 댄스곡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남성의 응답을 갈구하는 가사로 뜨거운 사랑의 기운을 또렷하게 풍겼다. 그룹은 요염함을 어필함으로써 더 많은 남성 팬을 확보하게 된다. 1년 전 김현성이 먼저 취입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던 ‘킬러’(Killer)는 베이비복스가 3집에서 리메이크해 새 생명을 얻었다. 연이은 히트로 다섯 멤버는 당시 가요계 걸 그룹의 쌍두마차로 군림한 S.E.S.와 핑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 경향자료 사진

/ 경향자료 사진

3집에서는 박력과 적극성을 갖춘 성숙함을 내세웠던 반면에 2000년에 낸 네 번째 앨범에서는 어느 정도 가냘픔을 간직한 농염함을 추구했다. 미세한 변화는 안정감과 차별화를 두루 만족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와이’(Why)와 ‘배신’의 인기에 힘입어 4집도 수월하게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일부 멤버는 2001년 출시된 5집에서 작곡에 참여하며 음악적인 성장도 꾀했다. 하지만 이 무렵 그룹의 인기는 조금씩 하향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신인 걸 그룹들의 출현으로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 됐지만 중국 활동에 신경 쓰느라 정작 한국 팬들한테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2002년 콜라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우연’과 이듬해 유로댄스풍의 ‘나 어떡해’가 히트했지만 예전만큼 폭발적이지 않았다. 2004년 발표한 ‘엑스터시’(Xcstasy)는 컨템포러리 R&B로 스타일을 확 바꿨으나 샘플링을 두고 이하늘이 과격하게 시비를 걸어 활동에 주력하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시기에 일부 멤버의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베이비복스는 자연스럽게 해체를 선택한다.

일곱 편의 정규 음반을 내는 동안 베이비복스는 가요계에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 이렇게 매번 장르를 달리하면서 히트를 이은 팀은 드물다. 청순, 섹시, 센 이미지의 여성상 등 다양한 콘셉트를 소화하면서 성공한 걸 그룹은 1990년대에 베이비복스가 유일하다. 요즘 걸 그룹은 모두 랩을 전담하는 멤버를 두고 있다. 멤버 중에 래퍼가 있는 걸 그룹은 베이비복스가 최초였으니 후배 걸 그룹들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월 초 몇몇 멤버가 SNS에 그룹의 20주년을 자축하는 글을 남겼다. 연예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팀은 성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해집단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멤버 간에 반목이 발생하기 일쑤고, 해체 후에는 얼굴도 보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20년이 지났지만 멤버들이 서로를 생각하고 그룹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베이비복스는 성공한 팀이다.

<한동윤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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