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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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은 식민주의적 관계가 자연과 피식민지인을 제압하거나 포섭하는 매일매일의 실천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장소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 기억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극적인 이산(離散)의 장면 중에 ‘바람찬 흥남부두’가 있다. 많은 이들에게 ‘흥남’은 ‘철수(撤收)’와 결합되어 한국전쟁의 상흔을 표상하는 심상지리의 한 장소에 고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흥남이라는 도시도, 그 도시의 이름도 식민지·제국 시기 일본의 한 기업에 의해 19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를 중핵으로 한 전기·화학 콘체른, 창업자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1873~1944)의 이름을 따 ‘노구치 콘체른’이라고 불리곤 했던 일본의 신흥재벌 ‘일본질소’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함께 사세를 확장해 갔다. 그 자신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기술 엘리트이기도 했던 노구치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할 최적지로 한반도 동북의 해안지역을 주목했다.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기가 필요했는데,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용해 수력발전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압록강 상류와 가깝고, 일본으로의 물류 이출이 용이한 동해안 지역을 물색하던 중 지금의 흥남지역을 선정했다.

일본질소 흥남공장 전경. 1930년대 일제가 조성한 대표적 식민지 공업지대이다./필자 제공

일본질소 흥남공장 전경. 1930년대 일제가 조성한 대표적 식민지 공업지대이다./필자 제공

일본의 기업에 의해 세워진 산업도시

1926년 조선수전주식회사를 설립한 일본질소는 부전강(1932년 완공), 장진강(1938년 완공), 허천강(1941년 완공)에 차례차례 수력발전소를 세워갔고, 1927년 설립된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는 흥남지역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1929년부터 질소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업 확장에 따라 공장의 규모도 확대되어 흥남지역을 중심으로 비료, 연료, 화약, 철강, 목재, 제약, 철도, 운수 등 사회 인프라를 형성하는 ‘공공재’ 생산 중심의 거대 콤비나트가 형성되었다. 함흥의 남쪽이라서, 또는 애초의 공장 부지가 복흥리와 호남리에 걸쳐 있어서 ‘흥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땅은 1930년 면으로 등록된 지 1년 만에 읍으로 성장했다. 놀랍게도 흥남읍의 초대 읍장은 일본질소의 창업자인 노구치 시타가우 자신이었다.

이렇게 자본과 행정권력이 하나의 신체에 구현되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듯이 식민지·제국 자본의 흥남 ‘개발’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그 규모보다도 하나의 ‘도시’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일본질소는 토착민들을 추방한 땅 위에 단지 발전소와 공장만 건설한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급소(백화점), 경찰서까지 제공하며 말 그대로 ‘식민지 개척’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 땅에 앞서 거주하고 있던 토착민들의 생활양식을 전적으로 부정한 위에서 전력-자원-생산력의 효율적 결합 및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따라 공간을 분할하고 접속시키는 실천은 전형적인 ‘제국적 주체’의 자기구축 행위였다.

그러나 제국적 주체의 식민주의적 실천은 어떤 것의 ‘부정’ 없이는 결코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식민주의는 언제나 그것이 부정하고자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에 저항하는 것과 전선을 형성할 때에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식민지·제국 자본의 흥남 ‘개발’은 전형적인 ‘식민지 개척’으로서 언제나 그 성패를 가르는 투쟁의 연속이었고, 따라서 흥남에는 다양한 층위에서 ‘전선(戰線)’이 가로놓여 있었다.

자연 대 인간, 노동 대 자본 등의 전선

첫째, 자연 대 인간의 전선. 식민지·제국 자본의 눈 앞에 식민지는 철저하게 ‘원료 제공지’로서만 떠오르고, 최대의 이익이라는 목적 아래 모든 것이 종속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본질소는 압록강 상류에 거대한 수력발전소들을 건설했는데, 이 발전소들은 동에서 서로 완만히 흐르는 강을 댐으로 막아 인공호수를 만들고 산맥에 터널을 뚫어 강물이 반대편인 동쪽으로 떨어지도록 함으로써 그 큰 낙차를 이용해 대량의 전기를 생산했다. 파격적인 발상을 현실화해 막대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산맥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터널 공사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피식민자의 생명은 ‘인간’을 위해 이용되고 파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연과 마찬가지였다.

산을 뚫어 강물의 흐름을 바꾸고 땅을 파헤쳐 ‘원료’를 채취했으며, 전력 공급 네트워크와 원료 공급 철도노선에 따라 길과 경계를 재배치했다. 공기로부터 분리된 질소로는 값싼 화학비료를 만드는 동시에 폭약을 만들었다. 질소비료의 발명가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독가스의 발명가이기도 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전쟁과 함께 성장한 일본질소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에 깊이 개입해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산출되는 화학 폐기물은 대기와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흥남 일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이상징후들이 보도된 바 있지만, 식민주의적 자연 변형은 예측 불가능한 복수로 되돌아오곤 했다. 자연을 전적으로 ‘원료’로서 취급하며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언제나 이용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태도는 바로 그 생태계와 자기가 무관하다는 판단이 전제될 때에만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곧 식민자가 피식민지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의 기초를 이룬다. 일본질소는 일본 패전 후 규슈의 본사로 돌아간 후에도 식민주의적 경영과 개발을 반복했고,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악명 높은 공해병, 미나마타병을 파생시켰다.

둘째, 노동 대 자본, 그리고 피식민자 대 식민자의 이중 전선. 수력발전소 건설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식민지·제국의 자본에 피식민지 노동자는 식민주의적 착취의 대상인 자연과 마찬가지로 대상화되었다. 일본질소의 흥남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에 기초해 <질소비료공장>(1932)을 비롯한 다수의 ‘공장가’ 소설을 발표한 이북명이 기록하고 있듯이, 흥남공장은 질병과 사고가 만연한 곳이었다. 질병과 사고는 부상과 죽음뿐만 아니라 해고로도 직결되어 결국 피식민자들은 소모적 노동 후 ‘산업폐기물’처럼 버려졌다.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을 다룬 1932년 6월 7일 동아일보 기사.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함흥·원산·평양·신흥의 공장 및 운수부문 노동자들을 확보하고 기관지 「노동신문」 「붉은 주먹」 등을 발간하다 1932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투쟁 때 장희건 등 500여명의 노동자가 총검거된 사건이다./동아일보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을 다룬 1932년 6월 7일 동아일보 기사.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비롯한 함흥·원산·평양·신흥의 공장 및 운수부문 노동자들을 확보하고 기관지 「노동신문」 「붉은 주먹」 등을 발간하다 1932년 5월 1일 노동절 기념투쟁 때 장희건 등 500여명의 노동자가 총검거된 사건이다./동아일보

직급별 위계가 민족적 위계와 거의 일치했던 흥남 공장의 직계구조 역시 식민주의적 경영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일본의 제국대학 이공계 출신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기술전문가들은 최상층의 임원 및 연구직을 담당했고,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직급에는 미나마타를 비롯해 주로 규슈지역의 일본질소 산하 공장에서 경험을 쌓은 직공들이 공급되었다. 피식민자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단순노무직과 일용잡직에 소용되는 극단적으로 대체가능한 존재였으며, 기술이전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직업규율로부터도 배제된 채 임금과 폭력적 노무관리라는 당근과 채찍에 의해서만 관리되는 대상이었다.

기업도시인 동시에 ‘노동자의 도시’이기도 했던 흥남에서는 당시 프로핀테른의 영향 아래 반복적으로 ‘적색노조’ 건설운동과 스트라이크가 시도되었다. 영화배우이자 흥남공장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조직의 지하조직원이었던 주인규가 변장을 하고 식민지·제국의 경계를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로핀테른의 서신을 받아온 일이 상징하듯이, 흥남은 식민지·제국 바깥으로 이어진 저항의 선과 만나는 최전선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전시 총동원 체제가 확립되기 전까지 흥남 일대에서는 매해 ‘조직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착취이자 식민주의의 본원적 축적 행위

일본질소의 흥남은 우가키(宇垣) 당시 조선총독이 조선의 3대 자랑거리의 하나로 내세울 만큼 식민지·제국의 산업기술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흥남은 한편으로 식민지·제국 일본의 위력을 과시하는 곳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식민지·제국이 지배를 현실화하기 위해 유지해야 할 최전선이기도 했다. 즉 자연 및 피식민지인과의 사이에 형성된 전선에서 전선 저 편의 존재들을 ‘인간화’하고 ‘노동자화’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식민주의적 질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흥남에서 이루어진 식민주의적 착취는 단순히 식민지·제국 자본에 의해 행해진 ‘기업범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저 착취는 착취인 동시에 ‘식민주의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행위, 즉 식민주의의 본원적 축적 행위에 해당된다. 노동과 생산과정에서 식민주의적 관계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곳, 식민지·제국의 언어-법-미디어의 표상체제를 지탱해주는 이 식민주의의 최전선을 ‘식민주의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흥남은 식민주의적 관계가 자연과 피식민지인을 제압하거나 포섭하는 매일매일의 실천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장소이다. 또한 이 재생산이란 언제나 전선 저 편으로부터의 보복과 저항을 차단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흥남의 공장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확장되어간 것은 1930년대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기까지이지만, ‘식민주의의 그라운드 제로’로서의 흥남은 과연 일본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을까. 총자산의 80% 이상을 흥남 일대에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질소가 한국전쟁 특수에 발맞춰 재기에 성공한 후 ‘미나마타병’의 온상이 된 것은 식민주의적 관계가 전후 일본에서도 여전히 재생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현대공화국이라고 칭해지곤 하는 울산을 떠올릴 수도 있고, 걷잡을 수 없는 생태계 파괴가 진행 중인 ‘4대강’을 떠올릴 수도 있다. 쌍용자동차·삼성반도체로부터 각종 국책사업 및 기업 유치를 위해 발벗고 나선 지자체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스마트폰에서 주택까지 ‘재벌’에 의해 생활의 형식들을 부여받고 있는 우리 세계에서 식민주의적 관계 재생산의 원천은 더 이상 특정 장소로 가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식민주의의 그라운드 제로’, 식민주의의 최전선은 도처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전선의 ‘이 편’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명한 듯이 여기지 않는다면, ‘저 편’―우리의 일부분도 참여하고 있는―으로부터의 보복이나 저항에서 다른 질서의 맹아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차승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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