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엘리트의 도덕과 본분이 입신을 통해 출세하고 양명하는 일이었다면 여성들에게는 가정에 몸을 두는 처신만이 할당되어 세상으로 나아가거나 이름을 날리는 일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다.
법 앞에서 나의 선량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을까? 도덕과 윤리가 아닌 법 앞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계속 법 앞에서 나의 선량함을 입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선량함의 이름으로 법적으로 심문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선량한 풍속을 침해하는 행위’와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행위의 동기가 되는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풍속 통제 법제는 일제 시기 만들어져 현재까지 기본 골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관련 법제 없이 자의석 해석으로 활용
일제 시기 만들어진 풍속 통제 법제는 식민통치, 군사독재를 거쳐 현재까지도 강고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강고한 영향’은 풍속 통제 법제나 작동방식이 강고하고, 철저하고, 체계적인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풍속 통제는 ‘선량한 풍속을 통제한다’는 법적 이념이 될 수 없는 자의적이고 무규정적인 이념이 법적 이념이 되고, 이에 따라 무차별적·자의적·무규정적인 규정들이 법안으로 무한히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폭력적인 작동을 지속할 수 있다. 풍속 통제를 역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연대기나 당대의 맥락을 살피는 것을 넘어서 자연화의 과정을 탈자연화하는 특유의 새로운 방법론과 독해가 필요하다.
일제 시기 조선에서 풍속 통제는 1910년대에는 조선의 구습 등 특정한 영역에 한정되었고, 1920년대 후반 일상생활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풍속 통제는 관련 법제가 없다는 점이다. 즉 풍속통제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선량한 풍속을 침해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통제한다는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신문에 대해서는 신문지법, 일상적 ‘풍기문란 행위’는 경찰범 처벌령에 따라 통제되었고, 미성년자 끽연 금지법, 미성년자 음주 금지법, 아동학대방지법, 형법, 치안경찰법, 출판법, 활동사진 검열 규칙, 흥행장 통제 규칙 등 관련 사안에 따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관련 법제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또한 그 판단 역시 통제 주체의 자의와 임의에 맡겨져 있다. 즉 풍속 통제의 작동 원리에 체계가 있거나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풍속 통제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기술하는 방식은 풍속 통제가 오히려 체계가 없고 원칙이 없기 때문에 폭력적이라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는 풍속 통제가 100년 넘게 지속하였기에 풍속 통제가 미풍양속인 것처럼 전도되어 버렸다. 즉 전형적인 파시즘 통제인 풍속 통제가 미풍양속, 전통적 가치, 한국적인 것, 도덕, 윤리, 처신, 처세, 입신, 교화, 교육, 보호 등의 이름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풍속 통제는 마구잡이라고 할 정도로 자의적이지만, 주된 통제 대상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통제 방식을 추출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938년 5월 5일자 <매일신보>는 ‘전문대학생 좌담회: 풍기문제를 중심으로’라는 기사를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학생 풍기문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는데, 이들이 정리한 바로는 ‘학생 풍기문란’이란 ‘학생의 본분에서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일이라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시점에서도 ‘학생은 공부하는 게 본분이다’ ‘본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학생의 본분을 지킨다’는 것이 선량한 도리로 자리매김되기 위해 그 반대항, 즉 학생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여타의 행위는 풍기문란 행위가 되고, 이는 학생답지 못한 행위일 뿐 아니라 처벌받고 통제되어야 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학생의 본분을 벗어나면 풍기문란
풍속 통제는 이처럼 인간을 속성에 따라 분류하고, 집단마다 속성에 따라 ‘본분’을 지정하고 본분을 다하는 일은 선량함으로, 본분에 어긋나면 풍기문란으로 처벌하고 심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저마다 제자리에 충실하라’는 직분론의 이념이 결합하여 풍기문란 통제는 입신과 처세의 논리로 자리 잡는다. 이른바 엘리트 청년학생의 본분이 공부라면 사상이나 정치에 열성을 보이거나 문화·예술에 심취하는 것과 같은 공부 이외의 모든 행위는 풍기문란으로 통제될 수 있었다. 학교라는 교화제도의 규율에 잘 따르는 몸을 만드는 일은 당시 입신(立身)이라 불렸고, 입신(몸을 바로 세움)을 통해서 출세와 양명이 가능했다. 풍속 통제는 남성 엘리트 청년에게는 공부(입시)를 통해 입신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출세) 몸을 바로 세우는(규율화) 방식으로 작동했다. 입신출세의 몸은 1938년 전시체제 이후에는 군사주의적으로 단련된 ‘황군의 몸’이 되었다. 입신의 규율이 학생의 본분이 되고 이를 벗어나는 일이 퇴폐·문란으로 규정되어 처벌되던 방식은 전시체제 하에서 비국민, 불령선인, 가짜 일본인을 색출하고 분류하는 황민화의 법적 토대로 이어졌다. ‘선량한’ 시민과 풍기문란 집단이라는 구별은 ‘좋은 일본인’과 비국민의 구별로 아주 쉽게 이행되었다. 국민과 비국민의 구별이 아니라, ‘좋은 일본인’과 비국민을 구별하는 방식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적용된 황민화 원리이기도 했다.
한편 비엘리트 남성에게는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본분으로 할당되었고,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떠돌아다니거나 노동하지 않는 남성은 풍기문란으로 처벌되거나 색출되었으며, 언제든 ‘부랑자’로 심문당할 수 있었다. 여성은 가정을 중심으로 본분이 할당되었고, 교육을 많이 받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는 여성은 언제나 풍기문란 위험도가 가장 높은 집단으로 지목되었다. 여성은 가정에 할당되었기에 가정 바깥의 공간에 있는 여성은 대부분 잠재적이거나 현실적으로 ‘풍속업소’의 여성으로 여겨졌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풍기문란 담론에서는 가정 바깥에 몸을 둔 여성을 모두 잠재적인 ‘문란녀’나 ‘허영녀’로 딱지 붙여졌다. ‘순진한’ 여성이 ‘화류계’로 몰락하는 서사가 풍기문란 담론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풍속 통제는 남성 엘리트에게는 입신출세라는 도덕과 본분을 할당하고, 여성에게는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할당하는 식의 젠더 분할에 따라 이뤄졌다. 가정이라는 할당된 공간을 넘어선 여성들의 몸 둘 바는 모두 ‘몸을 내돌리거나 처신을 잘못한 일’로 치부되어 처벌이 정당화되었다. 가정 바깥에 몸을 둔 여성들이 ‘자업자득으로 몰락하는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처벌을 ‘처신’의 이름으로 도덕화하고 정당화했다. 남성 엘리트의 도덕과 본분이 입신을 통해 출세하고 양명하는 일이었다면, 여성들에게는 가정에 몸을 두는 처신만이 할당되어 세상으로 나아가거나 이름을 날리는 일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에게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 몰락, ‘화류계’와 같은 딱지가 붙게 되며, 이름을 날리는 일은 처벌의 명부에 잠재적으로 등록하는 일이기도 했다.
전시 동원체제 하에서 풍기문란 통제는 비국민 통제로 매듭 없이 이어졌다. 풍기문란 통제는 이미 ‘선량함’을 법 앞에서 심문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고, 전시 동원체제에 이르러서는 단지 ‘좋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법적 구조의 근간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러한 풍속 통제 법제는 독일과 일본에서는 전형적인 파시즘 법제로 판정되어 폐지되고, 성적인 것에 대한 제한된 규정으로 축소되었다. 바꿔 말하면 풍속 통제 법제는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의 파시즘 동맹체제에서 만들어진 법제였고 패전 당시 이 법이 파시즘 법제였다는 것 역시 이미 인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풍속 통제 법제에 의한 ‘국민’ 통제는 법을 통한 초법적 지배라는 파시즘 통제의 전형인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풍속 통제 법제가 폐지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글에서 나는 풍속 통제는 ‘바람을 법으로 잡으려는 시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보이지 않지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나 전파되는 것, 근대적 가족 바깥으로 나가려는 시도(바람), ‘부적절한 욕망’(춤바람, 치맛바람), 다른 것이 되려는 이행의 욕망(바람), 한 사회의 오래된 멘털리티(풍속), 제어할 수 없이 불어오는 것(새로운 흐름) 등 풍속 통제가 제어하고 잡으려 했던 바람은 무한하다. 오늘의 학문적 용어로는 정동(情動·affect)이 바람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2017년 한국 사회의 풍속 통제는?
한편 풍속 통제는 몸 둘 바에 대한 통제의 전형으로 개별 존재의 몸 둘 바를 강제적으로 할당하고 배치하여 삶의 반경을 근원적으로 제약하는 생체정치의 극한이다. 입신과 처신의 젠더 분할은 세상과 가정으로 나뉜 남녀의 ‘운명’을 관장하는 도덕이 되었다. 거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가 지정한 일정한 시간에만 이동할 수 있다(야간통행금지). 더 나아가 일정한 시간 국가가 지정한 장소(학교, 공장, 일터 등)에서 노동·학습 등의 생산적 활동을 하고, 성차·연령·계급에 따라 할당된 장소에서 재생산에 임해야만 한다. 집과 세상은 젠더적으로 분할되고 학교와 일터는 계급적으로도 할당되었다. ‘건전한 장소’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부적절한 장소는 ‘풍속 업소’로 분류되어 비공식적으로 용인되고 분리되었다. 시기에 따라 풍속 업소의 분류는 변화되었지만, 풍속 업소를 ‘건전한 장소’에서 분리하고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는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근대 초기 일본에서 만들어졌던 시점에서부터 풍속 통제는 ‘부적절한 것들’을 ‘건전한 장소’에서 분리해서 모아두고 뚜껑을 닫아서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원리에 따라서 풍속 업소는 분리되어 비가시화되고, 정신병원·수용소·갱생원·교화소 등은 같은 원리로 뚜껑을 닫아 봉인 처리되었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풍속 통제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인권 침해라는 인식은 높아졌으나, 오히려 기존의 교화기구들이나 주체들은 풍속 통제를 ‘도덕’, ‘윤리’, ‘교육’과 교화의 이념으로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풍속 통제의 전형인 학생 생활지도가 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이어져도 학교당국이 자체적으로 생활지도를 시행하려는 시도들은 전형적이다. 학생 인권 조례, 차별금지법 제정 등에 대한 공격과 반대 역시 매번 ‘선량한 풍속’과 ‘사회 통념’, ‘건전한 가치’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풍속 통제가 오래 지속되어 자연화된 결과 이제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