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성장의 서사’를 바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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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이제는 ‘성장의 서사’를 바꿀 때이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성장할 수 있다”라는 선언보다는 “희망처럼 성장하지는 못할 수도 있으나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다짐을 하는 정부를 기대한다.

인간은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내러티브(서사, 즉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다. 개인적 삶은 물론 사회현상의 인과관계, 그리고 그것이 시계열적으로 모여 만드는 역사에 대해서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을 내러티브로 만들어 기억한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내러티브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의 서사와 ‘광장의 정치’라는 민주화투쟁의 서사이다. 학창시절에 펼친 쓰미야 미키오(隅谷三喜男)의 <한국의 경제>는 바로 첫 단락에서 한강의 기적은 한국 정부의 ‘자화자찬’이라 묘사했다. 당시 내가 생각하는 ‘악의 무리’는 군사정권이었으므로, 나는 그 네 글자만으로도 성장의 서사를 간단하게 기각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 ‘악의 무리’에 맞서는 ‘우리 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것인데, 한 세대가 훌쩍 지난 지금 편리하게 재구성된 기억으로야 당시의 전선이 단순명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다지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한강의 기적’과 ‘광장의 정치’

예의 책은 1976년에 출간되었고 내가 펼쳐본 것은 1980년대 중반쯤이었으니 그 두 시점 사이에도 현실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으며, 그 뒤로 다시 30여년이 지나는 사이에 현실은 훨씬 더 복잡미묘하게 변화했을 것이다. 성장서사가 과대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들 중에도 이후의 현실 전개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이들이 나타났고, 바뀐 생각에 따라 행동도 변했으며, 그렇게 바뀐 생각과 행동을 모아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다. 서사는 대항서사를 비판함으로써만 존재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서사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서사를 보강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항서사를 단순화하고 왜곡함으로써 ‘만만한 적’으로 만들어나갔다. 우리가 서사로 담아내고자 하는 현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하며, 저쪽과 이쪽에 비록 같은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전선이 담고 있는 모순의 현재적 의미는 달라짐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직전의 정권이 보스의 캐릭터부터가 매우 독특하였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비상식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스타일을 체화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 지 몇 주도 되지 않았지만 대통령과 그 주변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좋은 의미에서의 자극과 충격을 주고 있다. 이른바 기풍의 변화는 소통의 부재에 지쳐 있던 시민들에게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경제학적 용어로 비유하자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소비자(즉, 지금의 대통령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사람)에게도 골고루 혜택이 주어지는 동시에 소비자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각자의 소비량이 감소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후생을 증대시키는 공공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공공재가 사회의 모든 수준으로 확산되어 민주주의의 더 한층의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아마도 1987년의 이른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30여년의 갈지자 걸음을 딛고 얻어낸 소중한 성취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지난 몇 달에 걸친 치열한 ‘광장의 정치’가 얻어낸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축하고 즐길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정치적 소통의 스타일이나 문화적 기풍은 보스의 의지만으로도 짧은 시간 안에 크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름아닌 오바마 같은 대통령이 8년이나 집권한 직후인 미국에서 전개되는 정치현실을 생각해보면, 시민 모두의 지속적인 노력이 없을 때 언제든 뒤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른바 ‘1987년 체제’가 성립한 이후에 직접 경험하면서 힘들게 깨우친 교훈이기도 하다.

현실의 모순을 가리는 정치적 수사

오히려 이참에 ‘성장의 서사’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것이 필요하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통합이라거나 그저 중도라는 내용 없는 정치적 수사는 많은 경우 현실의 모순을 가리는 역할만 되풀이해 왔다. 사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이 그저 ‘자화자찬’이라는 말로 기각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30년 전의 성장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세대의 절망을 달래주고 일자리 창출이나 창업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바 사업 기풍의 변화가 관료조직의 아래로까지 확산되지 않는다면 기대한 것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경제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등은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경제학자로서 부끄러운 고백이나, 이렇게 하면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매뉴얼을 경제학은 준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애초 지금 수준의 한국 경제가 과거의 고도성장은 차치하더라도 3∼4% 이상의 지속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소득과 재산의 격차가 커지면, 비록 그들이 법적으로는 평등하더라도 실질적 기회균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불평등도 심화된다. 성장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manna)처럼 누구에게나 고르게 뿌려지는 선물은 아니라는 것, 경제성장이 경제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어렵게 익힌 진실이다. 어차피 정치권력의 시야는 단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힘들게 지켜낸 민주주의를 더 한층 진전시킨다는 소명의식으로 극복해내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성장할 수 있다”라는 선언보다는 “희망처럼 성장하지는 못할 수도 있으나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다짐을 하는 정부를 기대한다. 와이셔츠 차림에 커피 마시고 겸손하게 얘기하는 권력의 모습에 열광하는 까닭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몇 % 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세상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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