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재계가 상법개정안을 두려워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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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투표제 도입 땐 외국투기자본 경영권 위협” 주장…

시민단체 “재계 우려는 비현실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죄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정경유착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의원 등 122명이 발의한 이 개정안은 주주 집중투표제의 단계적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법안이 통과돼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액주주들도 뜻을 결집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내이사를 선출할 수 있어 재벌 총수의 경영 전횡을 견제할 수 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도입될 경우 외국 투기자본 등에 의해 경영권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며 법안 도입에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정치권 의견도 엇갈려 야당은 2월 임시국회 내 법안 처리를 주장하는 반면, 여당은 논의 자체를 거부 중이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상법 개정을 통해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근본적으로 재계의 일탈을 방지할 대책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한경연 대회의실에서 열린 상법개정안 관련 긴급좌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한경연 제공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한경연 대회의실에서 열린 상법개정안 관련 긴급좌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 한경연 제공

상법 개정안은 ‘박근혜표 대선공약’

법사위에는 현재 20여개의 상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지만 가장 논란이 되는 건 김종인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이다. 개정안에서는 우선 다중대표소송제도를 도입토록 했다. 모회사의 발행주식 총수의 1% 이상을 가진 주주의 경우 자회사 이사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 회사에 소송을 제기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일정 자산 규모 이상의 상장회사에서는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적으로 도입토록 명시했다. 집중투표제란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새로 선임할 때 특정 이사 후보에게 표를 집중해 투표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다. 집중투표제를 채택하지 않은 기업의 경우 새 이사를 뽑을 때 각 후보별로 찬반 여부를 묻도록 하고 있다. 이 경우 최대주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소액주주들은 원하는 이사를 뽑기가 쉽지 않다.

국내에서는 1998년 상법이 개정되면서 집중투표제가 도입됐지만, “주총 정관에서 이를 배제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 탓에 활성화되지 못했다. 경영권 간섭을 우려한 재벌 총수들이 집중투표제를 꺼린 결과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12월 공개한 ‘2016년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에 따르면 21개 대기업집단 소속 회사 중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기업은 4.9%에 불과했다.

개정안에서는 우리사주조합 및 소액주주들이 사외이사 선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감사위원회가 있는 상장회사의 경우 감사위원회 소속 이사를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 선임하도록 의무화했다. 감사위원회 이사를 뽑을 때는 대주주의 의결권이 3% 이내로 제한된다. 주주총회에 참석하지 않고도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도 단계적으로 도입하도록 했다.

개정안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공약한 상법 개정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 박 대통령은 당시 이른바 ‘경제민주화’의 일환으로 재벌개혁에 나선다는 명분 아래 상법 개정을 약속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장관을 맡고 있던 법무부는 2013년 7월 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같은 해 8월 10대 그룹 총수들을 만난 뒤 경제민주화 기조가 사실상 폐지되면서 상법 개정안 도입은 중단됐다.

대기업들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경영권이 위협받고 외국 투기자본에 휘둘릴 수 있다고 주장 중이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 상법 개정안 중 집중투표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장치가 없는 현실 속에서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외국자본이 담합해서 치고 들어올 것”이라며 “외국자본이 이사 2명을 선임한 뒤 외국인 지분 30%만 이 이사들에게 몰아주면 삼성의 경영권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표지이야기]재계가 상법개정안을 두려워하는 까닭

도입 놓고 찬반양론 ‘팽팽’

삼성이 집중투표제에 민감한 이유는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과 수년째 회사 경영과정에서 대립 중인 탓이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외국인 투자자들을 규합해 합병 반대에 나선 바 있다. 당시 엘리엇은 33%가 넘는 반대 지분을 확보해 합병을 무산시킬 뻔했지만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 삼성 손을 들어주면서 가까스로 합병에 성공했다.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문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 대통령 간 ‘뇌물거래 의혹’의 단초가 됐다.

엘리엇은 지난해 11월에는 삼성전자에 회사 인적분할, 현금배당, 사외이사 확대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엘리엇이라면 ‘지긋지긋’한 삼성으로서는 외국계 자본의 이사회 내 활동폭을 넓혀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 도입을 꺼릴 수밖에 없다.

재계는 감사위원 선출과정에서 최대주주의 의결권이 특수관계인을 포함해 3%로 제한된 점에도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외국 자본의 경우 지분을 3% 미만으로 여러 개 쪼갤 경우 감사위원 선임과정에서 최대주주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다중대표소송의 경우 자회사에 대한 평균 지분율이 75%를 넘고 있는 대기업들의 지배구조에 큰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회사의 경영 책임을 모회사를 통한 소송으로 물을 수 있게 해 자회사의 전략적인 투자나 경영혁신을 위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도 우려하고 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의 기타 조항들도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은 “우리사주조합에 사외이사 선임권을 주도록 한 조항도 특정집단(우리사주조합)에 속하는 주주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으로, 회사법의 기본원칙인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전자투표제도 이를 도입한 국내 기업에서 실제 전자투표로 행사된 주식 비율이 2015년에 1.62%, 2016년에 1.44%로 적은 만큼 회사 자율적으로 도입을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재계가 상법 개정안을 저지하기 위해 경영권 위협을 부풀려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집중투표제의 경우 매년 선임되는 신임 이사 수를 고려할 때 재계의 우려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기업 이사의 임기가 3년이고 대부분 선임 시기가 달라 임기 종료 시기도 다르다. 2015년 4월 기준 재벌기업들의 이사 수가 평균 6.3명이라 한 해 2~3명, 많아야 3~4명의 이사를 새로 선임한다는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선임할 이사 수가 2명일 경우 외부 주주가 집중투표제로 이사 1명을 선임하려면 33.3%의 지분이 필요하다”며 “이사가 9명인 삼성전자의 경우 한 해 많게는 3~4명의 이사를 선임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도 이사 1명을 선출하려면 최소 20%가 넘는 지분이 필요해 지분을 규합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고 밝혔다.

외부 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이사회에 진출해도 이를 곧바로 경영권 위협으로 연결시키는 것 또한 과도한 해석이라는 시각이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 주주가 몇년간 공동행동을 통해 이사 선출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1~2명 정도의 이사를 배출해서는 이사회 장악이나 경영권 위협도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감사위원 선출 문제의 경우 오히려 현재 개정안을 보완해 모든 주주의 의결권을 특수관계인과 합해 3%로 제한함으로써 특정 주주가 감사위원을 선임하지 못하도록 한 국민의당 채이배 의원의 상법 개정안 부분을 차용하는 게 실효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통한 이사회 진출은 외국인 주주 지분율이 높은 회사에서가 아니라 지배주주의 전횡이 심해 경영진 감시의 필요성이 높은 회사에서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상법 개정은 기업의 자율 개선을 유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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