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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골든타임’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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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은 뿌리 깊은 정경유착 비리의 ‘최신 버전’이기도 하다. 과거 재벌들이 그룹의 덩치를 키우고 특혜를 얻어내기 위해 정권과 유착했다면, 최근에는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줄을 대는 방식으로 정경유착의 ‘트렌드’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정경유착 비리를 근본적으로 끊어내기 위한 재벌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내가 지분을 얼마나 더 갖고 이런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삼성이 국민에게 인정받는 좋은 기업이 되는 게 중요하다.”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4년 5월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그룹 경영을 이어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던진 일성이다. 재산 증식이나 경영권 승계보다는 당면한 회사 경영에 주력하겠다는 말이었다. 국내 최대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외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였던 이 부회장은 일찍이 ‘재계의 황태자’라는 별칭을 달고 살았다. 알려진 본인 재산 규모만 8조원, 주식배당금으로만 지난 한 해 468억원을 ‘앉아서’ 번 이 부회장다운 포부였다.

돌이켜보면 “돈에는 관심 없다”던 이 부회장의 말이 진심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뇌물죄로 구속되면서 본인의 일성을 지킬 수 없게 된 것만은 분명해졌다. 이 부회장의 구속은 뿌리 깊은 정경유착 비리의 ‘최신 버전’이기도 하다. 과거 재벌들이 그룹의 덩치를 키우고 특혜를 얻어내기 위해 정권과 유착했다면, 최근에는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줄을 대는 방식으로 정경유착의 ‘트렌드’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을 계기로 정경유착 비리를 근본적으로 끊어내기 위한 재벌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7시간30분에 걸친 영장심사를 받은 뒤 구치소로 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 박민규 기자 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6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특검에 출석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3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3일 2차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다. / 강윤중 기자

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7시간30분에 걸친 영장심사를 받은 뒤 구치소로 가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 박민규 기자 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6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특검에 출석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3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3일 2차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미전실이 이재용을 만들고, 또 망쳤다

이 부회장 구속을 바라보는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저렇게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왜 뇌물을 줬을까”이다. 맞는 말이다. ‘권불십년(권력은 10년을 못 간다)’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부회장이 쩔쩔맨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가 누릴 수 있는 권력기간은 이보다도 훨씬 짧았다.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최씨 지원을 요청받은 시점이 2014년 9월,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한 때는 2015년 8월이었다. 레임덕을 감안하면 박 대통령과 최씨가 ‘절정’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2~3년이었던 셈이다. 이 2~3년을 위해 이 부회장이 뇌물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 것은 나름대로는 그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 절박했을까. 특검이 적시한 대로 모든 게 경영권 승계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은 겉으로는 원활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면서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알려진 대로 이건희 회장이 이 부회장에게 직접적으로 재산을 증여한 것은 1995년의 60억8000만원이 전부다. 이 부회장은 이 돈을 종잣돈 삼아 삼성의 비상장계열사의 주식을 매입해 매각하는 방식으로 500억원이 넘는 자금을 마련한 뒤 그 유명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통해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등극해 재산을 1조원 규모로 불린다. 이후 에버랜드는 2014년 말 상장돼 제일모직 상호를 이어받았고, 2015년에 삼성물산과 합병돼 이 부회장에게 삼성물산 최대주주 자리를 남겨주고 사라졌다.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눕기 전까지 약 20년 가까이 이 부회장에 대한 경영 승계작업은 거의 멈춰 있다시피 했다. 하지만 의식불명에 빠진 이 부회장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것으로 나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그룹의 지분이나 권력이 이건희 회장에게만 집중됐던 탓에 이 회장이 사망할 경우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 약화는 물론 14조원에 달하는 유산에 대한 수조원대의 상속세 납부 문제도 발생했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이 되면서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처럼 총수의 경영에 개입하려는 움직임도 때때로 포착됐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을 서둘러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누운 지 한 달 만에 에버랜드 상장을 공식화했고, 이후 1년 만에 에버랜드 상장,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라는 숨가쁜 승계작업을 진행했다. 삼성이 ‘뇌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도 이 같은 절박함과 급박함 속에서 나온 ‘악수’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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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급히 진전된 승계작업 과정에서 정작 이 부회장 본인의 판단은 배제됐다는 점이다. 그룹 경영이나 승계작업 전반에 대해 참모격인 미래전략실에 지나치 게 의존한 탓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뇌물을 준 건 결과적으로 이 부회장이지만, 뇌물을 주자고 판단한 건 미전실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회장은 해외유학 등을 통해 경영수업을 받기는 했지만 흔히 말하는 ‘밑바닥’부터 몸으로 부딪혀 경영을 배우고 익힌 경험은 없다. 1991년에 삼성전자에 입사하기는 했지만, 실무에 본격적으로 손에 댄 건 상무보로 승진한 2001년부터였다.

20여년 전 시작된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 역시 이건희 회장의 직할 아래 미전실이 전담해 진행했다. 김 교수는 “미전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총수 일가의 지배권 유지 및 승계”라며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 와병 후 ‘경영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안정된 지분을 만들어줄 테니, 그때까지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미전실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순실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전실은 삼성그룹의 저력을 상징하는 조직인 동시에 ‘총수 사조직’이라는 오명 또한 지고 있는 양면성을 가진 곳이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이재용을 만든 것도, 그리고 망친 것도 미전실인 셈이다. “최순실을 지원한 건 (대통령의 강요 탓이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는 이 부회장의 해명이 어떤 측면에서는 맞는 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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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정경유착 트렌드

전문가들은 이 부회장의 구속을 놓고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폐해”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정경유착 문제는 196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손창완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제발전을 명목으로 정부 주도형 수출산업을 육성하다보니 특정 기업에 이권이나 기회를 제공하는 특혜를 부여했다”며 “이 과정에서 재벌이 탄생했고, 정권과 재벌 간 밀착관계도 형성됐다”고 밝혔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쿠데타 등으로 집권한 정통성 없는 정권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천문학적 통치자금을 필요로 했고, 돈을 주고서라도 정권이나 관료들로부터 특혜를 얻고자 하는 재벌의 이해관계가 이에 맞아떨어지면서 정경유착이 지속됐다는 게 손 교수의 분석이다.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에도 청와대를 정점으로 한 집중된 권력구조와 정치집단의 관료 통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의 문제, 과도한 사전규제와 재벌 총수 중심의 후진적 기업경영 행태가 만연된 경제 제도적 문제로 정경유착의 흑역사는 꾸준히 반복돼 왔다. 지난해 열린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 등장한 재벌 총수 6명의 아버지들이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에 불려나온 전력이 있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재벌의 관심사에 따라 정경유착 트렌드도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봉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벌 형성기인 1960~1970년대에는 희소자원 배분, 성장기인 1980~1990년대엔 정부 규제 회피가 정경유착의 트렌드였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재벌체제가 확고해지면서 경영권 승계 문제가 최대 이슈가 됐다”고 밝혔다.

정경유착 사건으로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재벌이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숱한 편법 의혹과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재계 서열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 현대글로비스를 통해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 승계 자금을 마련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 부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자본금 50억원(100% 지분)을 출자해 2001년 설립한 종합물류기업이다. 현대차그룹이 일감을 몰아주면서 첫 해 1984억원이던 매출규모는 지난해 15조3406억원으로 늘었고, 2005년 상장 당시 2만1300원이던 주가는 최근 15만원대를 기록 중이다. 현대글로비스에 자본금 29억원을 투자한 정 부회장은 현재 23.29%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로, 주식평가액만 1조2000억원이 넘는다.

최태원 SK 회장의 경우 2002년 경영권 승계를 위해 자신이 보유 중이던 비상장계열사인 워커힐호텔 지분 40.7%를 당시 계열사였던 SK C&C에 넘기고 SK주식회사 지분 5.2%를 받는 내부거래를 했다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분 교환 과정에서 그룹 지배에 필요한 SK주식회사의 지분율을 높게 받을 목적으로 워커힐호텔 주식 평가액을 과도하게 책정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이 부회장의 구속사유가 된 삼성물산 합병과정에 있었던 일들과 상당 부분 유사한 점이 있다. 논란 속에서도 이들 사건은 공정거래위를 통한 벌금 부과에 그치거나 집행유예 선고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 시민단체로부터 ‘재벌 봐주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동단체 회원들이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노동단체 회원들이 지난 16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재벌개혁 신호음 울린 이재용 구속

정경유착의 ‘기원’이 워낙 오래됐고, 그 원인도 정치·경제제도에 폭넓게 기인한 만큼 단기간에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재벌기업의 경제활동에 국가경제를 의존하고 있는 실정상 당장 재벌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금지하거나 이를 목적으로 한 지배구조 개편을 막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경유착의 발단이 된 박정희식 개발 패러다임이 종말을 앞두고 있고, 정경유착 근절을 요구하는 여론도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이 재벌개혁에 나설 ‘골든타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우선 기업들이 ‘정경유착의 유혹’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과도한 사전규제나 특혜성 규제는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최순실 게이트와 맞물려 롯데그룹의 뇌물 제공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면세점 사업권 문제다. 여전히 재벌 총수의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는 이사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독립성을 높이는 것도 시급하다. 손창완 교수는 “사내·사외이사 모두 선임과정에서부터 지배주주나 총수의 영향력 아래 있어 독립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게 문제”라며 “미국처럼 상법에 이사의 독립적인 판단을 보장하는 조항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역시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대기업의 감사위원회도 독립된 외부 사외이사로 위원을 선출하는 등 독립성을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방지할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이나 노동조합 혹은 우리사주조합에 사외이사 선임권을 부여하는 정책 도입도 거론된다. 참여연대 김성진 집행위원장은 “재벌개혁을 위해서는 재벌 총수가 갖는 과도한 지배력 확대를 정상화하는 것과 재벌 총수만을 위한 의사결정을 다른 주체가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사회나 감사위원회 독립성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은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에 담겨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2월 임시국회 내 처리를 주장 중이지만 여당과 재계가 반대하고 있어 처리에 진통을 겪고 있다.

경영권 세습 문제가 정경유착 비리의 트렌드가 된 만큼 장기적으로는 재벌의 경영 세습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상적인 현행 상속제도의 규제를 피해 3대 이상을 넘어 경영권을 넘기려다 보니 재벌들이 횡령이나 배임 등 위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지난달 대선 출마 회견에서 “재벌 3세 경영세습을 금지하고 재벌 독식 경제를 개혁하겠다”며 “기업분할, 계열분리 명령제를 도입해 재벌의 불공정거래와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를 막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공익적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기 위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횡령·배임 등 재벌 총수의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 실효성 강화 등도 재벌개혁을 위해 병행돼야 할 정책으로 거론된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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