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족 사관으로 역사교육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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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역사교과서 폐기 주장하는 유용태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지만, 박 대통령이 남긴 정책은 진행 중이다. 박 대통령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는 말을 남겼지만, 관련자들 대부분이 간절히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추진되는 정책도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그 중 하나다.

12월 26일 전국 역사·역사교육학자 1579명은 서울 종로구 흥사단 건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 역사교과서를 전면 폐기하라고 입장을 밝혔다. 교육부는 2017학년도부터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를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지만 역사학자들의 반응은 흔들림이 없다. 국정교과서는 역사교육의 도구로 사용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용태 서울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에게 이유를 물었다. 유 교수는 2000년대 중반부터 <환호 속의 경종: 동아시아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성찰>(2008),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등 지역사와 비교사 관점에서 한국사 교육을 시도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인터뷰]“자기만족 사관으로 역사교육 할 수 없다”

10년 전에 역사학자, 교육자들은 동아시아 공동교과서 등을 논의했는데, 지금은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안식년이었는데 쉴 틈이 없다. 교과서 발행을 검정체제에서 국정체제로 전환한 것은 ‘역사적 반동’이다. 1987년 이래 30년 가까이 진행해 온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이다. 1992년 헌법재판소가 ‘국정제보다는 검인정제가, 검인정제보다는 자유발행제가 헌법정신에 더 잘 부합한다’고 판결했다. 1995년에도 교육부가 이 헌재의 판결 정신에 따라 발행제도를 개선한다고 방침을 정해서 상당기간 준비한 끝에 탄생한 것이 교과서 검인정 제도였다. 2010년도 다른 과목은 다 검인정으로 발행됐지만 국어, 국사, 도덕 세 과목만 국정으로 묶여 있다가 역사과목 검인정 전환이 결정됐다. 2014년 말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이런 교과서 발행의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이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은 역사인식을 국가가 독점해서 ‘단일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가치에 반한다. 국정으로 발행된 교과서의 내용을 뜯어보면 ‘자만사관’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 역사라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과거를 현재와 관련시켜서 현재를 인과관계 속에서 성찰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반성을 담은 역사인식을 우익들은 자학사관이라고 하지만 나는 자성사관(自省史觀)이라고 부른다. 국정교과서는 반대로 긍정적이고 성공한 내용만 다룬다. 우리가 이렇게 멋지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국정으로 발행된 교과서의 문제점으로 ‘친일·독재 미화’라고 쉽게 표현되는데, 자기성찰이 빠진 자기만족의 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반성이 빠진다는 것은 역사교육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교육부가 국·검정 혼용을 제시했다. 교육현장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인가.

“국정교과서는 국정교과서를 발행하기 위해 급조한 2015년도 교육과정에 따라 편성돼 있고, 검인정 교과서는 2009년 교육과정에 만들어졌다. 목차 자체가 맞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도 교사나 학자들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발행 국정교과서가 출판사들의 검인정과 경쟁하는 체제는 있을 수 없다.”

국정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로 비판되는 만큼 거꾸로 반일·독재비판 내용을 담으면 훌륭한 역사교육이라는 오해도 있을 수 있다. 역사교육의 목표라면 무엇일까.

“역사교육의 목표가 암기 위주에서 사고력 함양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개별 사실을 조금 더 잘 알거나 덜 안다고 역사적 사고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스스로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가르친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고력을 훈련할 수 있고, 다양한 인과관계 속에서 역사적 사건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이 있고, 토론이 있는 수업이어야 한다고 교사들과 함께 합의했다. 교과서만으로 질문이 있는 역사수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교사 연수 등 여러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업의 근간이 되는 것은 역시 교과서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질문을 던지는 데는 최악의 도구다.”

정부는 역사교육 자체는 강조해왔다.

“역사교육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국사교육만 강화시켰다. 따라서 ‘역사교육 강화’라는 말 자체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역사교육을 국사교육으로 축소시켜 놓고 국사를 국가가 만든 단일한 교과서로 교육하겠다고 한다. 독점교과서의 내용은 자성사관을 억압하고 자만사관을 조장한다. 역사교육과 국정교과서는 성립될 수 없다.”

평소 한국사 교육뿐 아니라 세계사 교육 역시 강조해 왔다.

“동아시아 지역사적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볼 것을 학자로서 주문하고 연구해 왔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고력이다.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의미의 공동체를 구상하자는 발상은 아니다. 동아시아 국가들 간 역사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각국이 다 제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고 주장하니 충돌하는 것이다. 자국의 성공스토리를 자만스럽게 과대포장하다가 이웃나라 역사까지 왜곡·폄하하니까 역사인식 갈등이 나오고 분쟁이 일어난다. 동아시아라는 지역단위 속에서 자국사를 놓고 여러 역사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나라를 보자는 취지다. 자신을 상대화해야 이웃과의 공존 속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할 수 있고, 자만에 빠지지 않은 제대로 된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

국정교과서에는 주로 근현대사 문제가 거론된다. 세계사 서술 부분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

“세계사를 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유럽 등 여러 지역사의 유기적 결합으로 인식하던 기존 검정교과서의 인식을 부정하고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주요 국가 중심으로 서술했다. 동아시아 부분 서술도 일본 중심적이다. 중국의 대외관계와 아시아 민족 운동사와 근대 제국들의 전쟁범죄·식민지배 등을 축소했다. 서구 민주주의가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화민주주의 등 다양한 경로로 발전해나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1·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해석한다. 평화, 민주, 공생을 파괴하는 씨앗이 될 수밖에 없다. ‘복면집필’로 인해 편향된 집필진이 구성된 게 원인이라고 본다.”

한·중·일 정권 성향이 10년 전에 비해 강경해졌다. 동아시아 공동 지역사 연구나 교과서 반영이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정부와 별도로 시민사회가 극우적 흐름을 비판하고 세계사적 시선으로 공동 연구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더 커진 셈이다. 정부나 시민사회의 우경화와 별도로 이 문제를 고민해온 학자들은 학술대회에서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 비관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 서율교육청 모임에서도 내년 동아시아 평화교과서(가칭) 집필에 착수한다. 단, 각국 경제위기가 확산되는 점이 우려스럽기는 하다.”

<글·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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