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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발병과 사망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니 그럼 가습기 살균제를 사서 쓴 내가 죽인 거네’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내 손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사서 가습기 물통에 넣어 사고가 났다’는 식의 죄의식을 호소한다. 피해자임에도 가해자 의식을 갖고 ‘나 때문에 그랬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이다. 2011년 8월 31일 정부의 역학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는 발병과 사망의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라는 의문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발병과 사망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니 그럼 가습기 살균제를 사서 쓴 내가 죽인 거네’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여전히 사람 죽이는 엉터리 제품을 만들어 판 제조판매사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런 제품을 사서 쓴 소비자의 탓으로 여기고 있다.

3개월 이상 외상후스트레스장애 90%

이러한 죄의식은 심한 경우 자살충동으로까지 나타나는데, 특히 사망자 유족들의 경우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호소한다. 정부가 역학조사를 통해 문제를 밝혔음에도 제조판매사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정부 관련 부처들 또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고수해 피해대책이 제시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피해가족들은 ‘이런 상황도 내 탓이다’라는 식의 2차적인 정신적 피해를 입고 있다. 정부의 건강피해조사는 물리적인 신체피해에 집중되어 있지만 정신건강적인 피해에 대해서도 매우 정밀하게 조사되어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2012년 초 정부가 피해조사는커녕 피해신고조차 받지 않을 때 환경보건시민센터가 한국환경보건학회에 의뢰해 진행된 민간조사에서 정신건강을 조사한 바 있다. 2012년 초의 건강영향조사를 바탕으로 2013년 정부의 1차 조사에서 정신건강조사를 진행했는데, 대학병원 소속의 산업의학전문의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자문을 받아 조사했다. 조사 대상은 2011년 9월부터 2012년 4월 13일까지 신고돼 정신건강조사에 응한 70가족 76명이다. 이들에 대한 계량적이고 질적인 정신건강영향조사를 위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설문, 사건 충격척도 검사 설문, 불안 설문, 자살 여부 설문, 그리고 삶의 질 저하 여부 등 5가지 항목의 설문조사를 했다.

2012년 1월 폐이식을 받았지만 후유증으로 사망한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용 피해 산모 윤지영씨의 장례식장을 방문한 피해자들. 이들도 가습기 살균제로 아내를 잃었다. / 환경보건시민센터

2012년 1월 폐이식을 받았지만 후유증으로 사망한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용 피해 산모 윤지영씨의 장례식장을 방문한 피해자들. 이들도 가습기 살균제로 아내를 잃었다. / 환경보건시민센터

PTSD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전쟁, 성폭력, 학대 등과 같은 개인이 참아내기 어려운 사건들이 피해자에게 외상으로까지 작용하여 병적인 반응이 나타나며, 병적인 반응으로 특이한 증상이 나타난다. PTSD 환자들은 과도한 각성 때문에 정상적인 수면을 할 수 없으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고, 성적 충동 조절 및 애정관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주의 집중이 안 되어 학습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대인관계 등 사회생활도 어려워 직업 수행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PTSD 설문에는 188명이 참여했는데, ‘증상 지속기간이 3개월 이하인 사람’이 9명(4.5%), ‘증상 지속기간이 3개월을 넘는 사람’이 179명(90%)으로 대부분이 오랫동안 PTSD를 겪고 있었다. 응답자의 129명(69.4%)이 사건 경험 후 6개월 내에 증상이 발생했으며, 사건 발생 후 6개월 후에 증상이 발생하는 지연형 응답자는 57명(30.7%)이었다. PTSD는 분석방법에 따라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국내와 해외 연구방법을 각각 적용해보니 증상이 나타난 응답자가 103명(54.8%)~128명(68.1%)으로 모두 절반이 넘었다.

삶의 영역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묻는 설문에서는 ‘놀이와 여가활동’(71.6%),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71.0%),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전반적인 기능 수준’(70.5%), ‘집안일’(64.5%), ‘직업’(64.5%), ‘가족관계’(54.1%) 순으로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모두 9가지 삶에서 문제가 되는 영역이 항목으로 제시되었는데, 6가지 삶의 영역에 문제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6명(8.7%), 7가지 삶의 영역에 문제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5명(13.7%), 8가지와 9가지 삶의 영역에 문제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각각 23명(12.6%)과 37명(20.2%)이었다. 6가지 이상 삶의 영역에 이상이 있다고 답하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데, 모두 101명(55.2%)이었다.

PTSD, 만성화되어 자살시도 높은 질환

PTSD가 피해질환의 위중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까? 사망자군에서는 54명(70.1%), 호흡기질환자군은 49명(44.1%)으로 사망자군에서 점수도 높고 증상균율도 유의하게 높았다. 판정 결과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났는데, 관련성이 거의 없음인 4단계 판정자의 경우 유의하게 낮았다. 피해 정도가 심각할수록 스트레스도 높았다.

불안 검사는 212명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불안군은 109명(51.4%), 정상군은 103명(48.6%)이었다. 불안상태 29명(13.7%), 심한 불안상태 22명(10.4%), 극심한 불안상태 58명(27.4%)이었다.

자살충동 및 자살시도 여부에 대한 조사 결과는 이랬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115명(54.3%)이었다. ‘자살하려는 시도나 계획이 있었다’고 답한 사람도 42명(20.9%)나 됐다. 자살충동률은 가족 내 사망자군(69.9%·58명), 호흡기질환자군 57명(44.2%·57명)으로 사망자군에서 유의하게 높았다. 자살시도율도 사망자군(31.7%·26명), 호흡기질환자군 16명(13.5%·16명)으로 사망자군에서 유의하게 높았다.

국내외의 관련 연구에서 피해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 수행된 가족 혹은 친구들 중 살인을 당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PTSD 유병률 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히 가까운 가족구성원들 중에서는 사건 이후 PTSD 발생률이 23.3%였으며, 4.8%에서 PTSD 진단기준에 부합했다. 국내에서는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로 192명이 사망한 사고와 관련해 사망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PTSD 정도 조사가 있었는데, 조사대상자 20명 중 17명(85%)이 경고 위험수준이었다. 피해자들과 유족 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부부인 경우가 가장 높았고, 부모, 그 외 친척의 순서였다. 스트레스 장애가 특히 심한 영역은 ‘남 앞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두렵다’는 항목으로, 인간관계 및 사회생활을 회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경북지역의 상담전문가들이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봉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지역사회의 PTSD 유병률은 1~14%이며, 외상적 사건을 겪은 고위험 집단의 유병률은 3~58%이다. 일반적으로 전체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평생을 살면서 PTSD를 일으킬 정도의 심한 외상적 사건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들 중 약 10~20%에게서 PTSD가 실제로 나타나며, 성폭력과 같은 특정한 사건의 경우에는 약 절반가량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PTSD가 나타나는 사람 중 7.8%는 평생 나타나고, 성별로는 여자(10%)가 남자(5%)보다 조금 높고, 증상 이환기간도 여자가 더 길다. PTSD 발생 관련 요인에는 개인적인 조건도 중요하고 사건 이후의 지지체계, 즉 외부 환경도 매우 중요한 관련 인자다.

2007년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삼성중공업 크레인에 의한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의 경우 피해주민을 대상으로 한 PTSD 조사에서 56.6%가 증상자로 나타난 바 있다. 서울지역의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들을 대상으로 한 PTSD 조사 결과 고위험군은 13.7%로 나타났다.

PTSD는 만성화되어 정상적인 인간관계 및 사회생활에 지장을 야기하며, 신체적·정신적 질환이 많고 자살 시도도 높은 심각한 질환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정신적 치료 지원뿐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노력이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와 비교할 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활동에 나서는 정도가 매우 낮은 편인데, 피해자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고, 오래전에 피해가 발생한 경우도 많으며, 피해자 간의 동질성이 거의 없다는 특징과 더불어 앞서의 조사 결과와 같이 PTSD, 불안 및 자살충동 등 심각한 정신적 상태라는 점도 원인으로 보인다. 결국 피해자와 가족, 유족들은 피해 자체는 물론이고 이로 인한 정신적 어려움을 이중으로 겪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Q&A / (5)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 피해자가 바라던 법인가?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이틀 앞둔 2016년 12월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대안)’(이하 피해구제법)을 통과시켰다. 당초 야당이 약속했던 2016년이 가기 전에 제정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환노위→법사위→본회의로 이어지는 법 제정 3단계의 첫 단계를 겨우 넘은 것이다. 오는 2월 임시국회에서 최종 제정되면 6개월 후인 8월부터 법이 시행된다. 2011년 이 사건이 알려진 지 7년 만에, 1994년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출시된 때부터는 23년 만의 일이다.

국회 환노위를 통과한 피해구제법은 그동안 피해자들이 바라왔던 법인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제조사에 대한 징벌조항을 삭제했다. 둘째, 구제기금에 정부 책임을 반영하지 않았다. 셋째, 소멸시효를 두어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이 세 가지는 3~4단계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는 일과 함께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의 다섯 가지 핵심조항이었다. 결국 환노위를 통과한 피해구제법은 반쪽짜리 법에 불과하다.

징벌조항의 삭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이정미, 우원식, 김삼화 의원 등이 낸 법안에 모두 반영되어 있는 징벌조항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제조판매사들에 대해 판매액 등의 3~10배 이상을 징벌배상토록 했다.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고, 그동안 제조판매사가 정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증거를 조작·은폐하려 했다는 점과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거의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징벌적 조항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일부 야당의원이 과잉처벌금지라는 위헌소지가 있다며 반대했고, 12월 27일 환노위의 법안 소위원회가 피해자들을 따로 만나 의견을 청취했음에도 결국 징벌조항이 삭제되고 말았다. 피해자들은 징벌조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의견을 제기했지만 국회가 피해자들과 만난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부 책임은 구제기금 조성에 정부가 일정한 기금을 출연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지난 국정조사를 통해 정부 책임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고, 비록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는 않았지만 특별법의 구제기금에 정부 책임을 반영한 유일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환노위는 기재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당초 정부 기금을 포함한 구제기금 내용을 제조사들만의 기금으로 조성되는 특별구제계정으로 바꿨다. 19대 국회 때도 기재부의 반대로 가습기 살균제 구제법을 만들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기재부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환노위의 피해구제법에는 부칙 제3조에 소멸시효를 두고 있다. ‘손해배상 책임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이라는 내용과 ‘건강피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20년간’의 내용으로 이 기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된다. 즉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1994년 제품이 나왔을 초기에 사용하다 다치거나 사망한 경우나 앞으로 사망 등으로 신고가 늦게 된 경우 등 이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우원식 의원 법안과 같이 소멸시효를 두지 않아야 했다.

피해자들은 “환노위를 통과한 피해구제법이 3~4단계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하지만 명확하게 적시한 것이 아니어서 구제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나올까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또 기금 마련의 경우도 부칙에 상한액을 2000억원으로 제한해 현재까지 신고된 피해자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나중에 기금 부족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아이를 잃을 뻔한 한 피해자는 “피해구제법에 징벌조항이 포함되어야 지금과 같이 옥시 등 제조사의 일방적인 배상계획에 피해자들이 끌려다니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징벌조항으로 당당하게 법적으로 배상받고자 한다. 징벌조항을 삭제한 것은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거다”라고 항의했다.

19대 국회에서 무산된 피해구제법 제정은 검찰 수사로 드러난 비리, 피해자 및 시민단체의 옥시 불매운동에 대한 4~6월 폭발적인 언론보도, 그리고 4월 총선 결과에 힘입은 국정조사 덕에 하반기에 7개의 관련 법안이 제출되는 등 사건 발생 6년여 만에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제대로 규명하고 해결할 최적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국정조사는 진상규명·피해대책·재발방지라는 3대 과제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를 낸 채 마무리되고 말았고, 환노위는 피해구제법을 정부 책임과 징벌조항을 삭제한 반쪽짜리로 만들고 말았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주간경향>·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 기획 가습기 살균제 참사 기록 ‘엄마, 숨이 안 쉬어져’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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