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서재로부터 해방시키는 ‘북스캔 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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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느 곳보다 책이 있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쉼터”라고 한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말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전하고 미지의 세상을 상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 왔다. 책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대략 1000년 이상이 흘렀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책과 함께 퍼트린 보편적 지성을 통해 인류는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벗어났고 권력의 억압에 맞설 수 있었다.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기록하여 남기려는 욕망의 흔적은 동굴벽화에 들소 떼를 새기던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후 때로는 점토판에, 갈대 잎과 양피지와 대나무와 거북의 등껍질에 생각과 지식을 새겼다. 책은 종이로 만들어지기 전에도 모습을 달리하며 발전해 온 것이다.

의학·법학 전공자에 북스캔은 필수

오늘의 책은 제지술과 인쇄술 발명에 맞먹는 충격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전통적인 모습을 벗어날 때가 됐다. 태블릿류와 전자책의 발달로 책은 종이의 속박을 벗고 데이터의 형태로 유통되는 시간이 왔다. 이미 종이책으로 출판된 오래된 책들 또한 전자문서로 만들어진다. 물리적인 형태를 벗어난 데이터를 자유롭게 배포하려는 노력도 시작됐다. 1991년 미국에서 한 개인의 노력으로 출발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는 인류의 지적 유산을 전자화하여 거대한 가상도서관을 만드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직지 프로젝트로 고전의 전자문서화가 지속된다.

“아이패드가 나온 직후 일본 장서가들 사이에서 스캐너로 서재에 꽂혀 있던 책을 전자화하는 일이 유행했다. 문학에 골몰하던 때라 책이 많아 이사할 때마다 골치를 썩였는데 그 방법을 보고 공감했다. 2010년께 양면스캐너를 사서 4000권 정도 되는 책을 모두 스캔했다. 책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북스캔넘버원의 황영식 대표는 모든 장서가 태블릿 한 대에 모두 들어가는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주변인들에게도 권했다. 일종의 재능기부로 장비와 경험을 공유했던 일이 북스캔 사업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고가의 스캐너를 갖추고 책을 스캔하는 스캔숍이 주목 받고 있다.

고가의 스캐너를 갖추고 책을 스캔하는 스캔숍이 주목 받고 있다.

스캔한 책은 스마트폰과 컴퓨터 등 여러 기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손상의 염려 없이 밑줄을 긋고 그 내용을 따로 추출하여 요약노트를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스캔된 내용을 자유롭게 재가공할 수 있는 것도 전자화된 책의 장점이다. 종이책으로 할 수 없었던 수십 배의 활용도가 생긴다는 것이다. 때문에 두껍고 무거운 전공서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북스캔 업체의 단골손님들이다. 의학, 컴퓨터공학, 법학 등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북스캔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가 됐다.

“지금은 페이지당 10원 이하의 비용으로 스캔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스캔 서비스가 처음 시작될 때는 300페이지 책 한 권을 스캔하려면 15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지금은 3000원 이하이다. 당시에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자가 스캔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가 스캔에 자주 사용되는 양면스캐너는 70만원선. 스캐너 한 대를 사서 10권의 책을 스캔하면 본전을 뽑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캔 품질과 느린 속도가 문제가 됐다. 초창기에는 업체를 통해 책값보다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스캔할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

장서가들의 경우 전용 창고를 임대하여 매달 상당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에게 북스캔은 일종의 신세계가 됐다. 책을 보관하는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북스캔 업체들은 대개 1000만원 이상 고가의 고속스캐너를 사용한다. 책 한 권을 스캔하는 데 불과 1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각종 보정 소프트웨어를 통해 최적의 상태로 스캔하는 장점도 있다. 문자인식 소프트웨어로 내용을 추출할 수 있는 부수 효과도 있다.

애서가가 북스캔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의 파손 때문이다. 스캔을 하기 위해 책은 표지와 분리하여 절단한다. 스캔을 마치면 의뢰인의 요청대로 파손하거나 다시 제본을 하여 돌려준다. 책에 대해 애착을 가진 이들은 이 과정을 꺼렸다. 장비와 노하우를 갖춘 업체와 달리 개인이 북스캔을 하는 경우 책의 파손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절단기를 통해 책을 잘라 스캔한다.

절단기를 통해 책을 잘라 스캔한다.

문체부, 어느날 갑자기 “북스캔은 불법”

2010년 무렵부터 시작된 북스캔 사업체들은 한때 각종 IT기술과 결합하여 번창해갔다. 서비스 경쟁을 벌일 만큼 시장이 활성화됐다. 대용량 서버에 사용자들이 의뢰한 책들의 데이터를 보관하여 필요시에 접속하여 내려 받을 수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한 업체도 있었다. 의뢰자를 식별할 수 있는 전자지문을 섞어 불법복제를 방지하는 서비스를 자체적으로 개발한 업체도 나와 독창적인 서비스 경쟁의 시기가 시작됐다. 책이 전자화되는 것은 시대적인 추세이기 때문에 여러 업체들이 생겼고, 자체적으로 스캔 보정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하는 곳도 있었다. 고가의 스캐너를 수십 대 갖춘 대형 업체도 생겼다.

북스캔 사업체를 운영하는 모 대표는 그런 추세가 꺾인 것은 불과 2년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북스캔이 불법이라는 문체부의 공문이 내려왔다. 정기적으로 사법경찰관이 조사를 나오고, 법규를 준수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한다. 이후에 문을 닫거나 규모를 축소하는 업체들이 생기고 있다.” 북스캔 업체들은 저작권료를 정당하게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업계에서는 저작권법 준수를 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정부는 북스캔이 불법이라는 유권해석만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몇 차례의 세미나와 공청회가 열렸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스캔 파일의 복제나 유출이 염려된다면 그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무조건적으로 금지만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부는 관련단체들의 압력으로 저작권 단속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북스캔 업체를 통해 유포되는 책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저작권 침해 사례는 오히려 온라인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들이 라이트노벨이나 장르소설을 복제하여 공유하는 일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스캔을 의뢰하는 책 중에서 저작권 침해를 우려하는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절판된 책과 학술서의 스캔 요구가 더 많다고 한다.

거듭된 단속과 압박으로 북스캔 사업의 형태도 변화하고 있다. “요즘은 스캐너를 대여하는 형태로 사업을 유지한다. 개인이 책을 가져오면 제본기와 스캐너를 빌려주고 사용방법을 알려준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형태도 일종의 편법이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요구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에서 장비 대여업으로 업태가 변경됐다. 의뢰인에게 저작권자의 확인서를 요구하는 북스캔 업체도 생겼다. 이 같은 대응에 대해 업체 관계자는 “한마디로 말이 안 된다”고 고백한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영업 방향이나 저작권 관리 모두에 혼돈이 오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결국 피해는 북스캔이 필요한 사용자와 업체에 전가된다는 분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사용자의 수요가 늘어나면 결국 정부에서 합법화하거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 북스캔 업계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스캐너를 통해 전자화된 책은 태블릿 등 휴대용 기기를 통해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

스캐너를 통해 전자화된 책은 태블릿 등 휴대용 기기를 통해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

북스캔 업체 최대 고객은 기업체

정부와 산하 단체도 북스캔 업체의 단골고객이라는 점도 역설적이다. 현재 정부 보존 문서의 대부분은 스캔을 통해 전산화되고 있다. 정부 문서의 약 70% 정도가 전산화 됐다는 것이 업계의 추정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신문·잡지까지 모두 스캔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이 가능해진 것도 IT강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국립도서관은 장서 스캔을 계속하고 있다. 매년 공기업체들의 문서 스캔 입찰 규모도 늘어난다. 하지만 개인의 북스캔은 여러 가지 제약을 안고 있다는 점은 모순적인 현실이다.

북스캔 업체를 찾는 최대 고객은 역시 기업체이다. 기업의 모든 문서를 스캔 업체에 맡겨 전산화하는 일은 문서 보존과 관리 활용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기업들은 보존연한을 넘긴 문서들도 스캔하여 보관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대규모 창고가 필요했던 것이 서버 몇 대만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제적 장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종이문서가 사라진 페이퍼리스 오피스를 지향하는 기업이 늘면서 과거 문서의 전자화는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북스캔 업체들은 새로운 시장을 겨냥해서 점차 고가장비와 소프트웨어에 투자하고 있다. “보안 문서의 경우에는 스캐너를 갖고 기업체에 나가서 작업을 한다. 일종의 장비와 인력 파견 서비스인 셈이다.” 스캔업체 관계자는 당분간 스캔업체를 찾는 기업시장이 늘 것으로 전망했다. 대당 억대가 넘는 비파괴 스캐너 도입을 검토하는 업체도 있었다.

현재 북스캔 업체의 개인 이용객은 대량의 책을 정리하려는 장서가를 꼽을 수 있다. “해외 파송 선교사들이나 유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수천 권의 책을 대용량 메모리 하나에 집어넣어서 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소장했던 책을 떠나보내는 애서가의 경우 책을 폐기하는 마지막 모습까지 사진으로 담아 보내달라는 요청도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수도원 도서관이 배경인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작가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 어느 곳보다 책이 있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쉼터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서재가 없는 인간은 영혼을 잃은 자이다”라고 주장했다. 읽고 난 책도 서재에 남겨 정신의 자취를 살펴보는 쾌락도 강조했다. 그의 주장대로 안식과 영감을 주는 서재의 형태는 변화하고 있다. 공간을 벗어나 데이터의 형태로 전자기기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제까지 책이 했던 일보다 더 많은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그곳에 있다. 인류는 전자화된 책을 통해 앞으로도 인간의 정신을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스캔숍은 미래를 위한 현재 기술의 공간이다. 북스캔을 통해 확장되는 전자 서재는 우리 시대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신호등이기 때문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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