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은 분명히 매력적인 분야다. 가상의 체험공간에서는 제약을 극복하여 현실을 체험하고, 시간의 장벽을 넘어서 과거와 미래를 경험하며, 공간의 한계를 딛고 광활한 우주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평소 젊은이들이 몰리는 서울 강남역 인근. 번화한 길을 벗어나 한가한 뒷길 쪽에 유난히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는 곳이 있다. 가상현실(VR) 체험공간은 강남에서도 가장 붐비는 현장이다. 카페와 겸한 공간에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자동차레이싱, 롤러코스트 등의 시설과 게임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장비를 착용한 후 우주공간에서 외계인과 싸우거나 색다른 장소를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이용자는 쉽게 갈 수 없는 바닷속이나 역사 유적지 등에서 손을 내밀어 현실 속의 비현실을 체험한다.
대부분의 이용객은 10대 학생들과 젊은층이다. 간간이 30대 이상 인근 직장인들도 눈에 띄었지만 적극적인 참여는 없었다. 학생들이 즐겁게 체험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동료들의 성화에 수줍게 체험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노원구에서 강남역까지 체험을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는 고2 여학생은 “즐겁다. 친구들과 인터넷 검색으로 알고 찾아왔는데, 유료라도 적절한 가격이라면 자주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남역 인근의 가상현실 체험공간은 현재 홍보 차원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각종 게임과 체험 프로그램이 구비된 가상현실 체험공간.
장년층보다는 젊은 연령대 이용자 많아
연령대가 낮은 학생들일수록 가상현실 체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체험을 위해 써야 하는 디스플레이 헤드셋도 별 불편이 없다고 말한다. 근처에 왔다가 일부러 찾아왔다는 한 20대 이용자는 “헤드셋이 조금 거북하다. 화면을 볼 때 울렁거림도 있으나 게임을 즐기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며 약간의 불편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새로운 기술에 접근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점은 확실해보였다. 한 시간 남짓 지켜보는 동안 장·노년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가상현실 체험 붐은 저가형 디스플레이 어댑터가 보급되면서 시작됐다. IT분야의 첨단기업인 페이스북이 가상현실 체험기기 제조사인 오큘러스를 인수했고, 구글에서 종이로 만든 카드보드라는 초저가 체험장비를 보급하면서부터 불붙었다. 여기에 성인용 가상현실 영상물들이 소개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업계 관계자는 높은 가격대가 가상현실 체험을 가로막는 벽이었으나 무너지기 시작했고, 대중을 유혹하는 콘텐츠들이 나옴으로써 폭발적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검색엔진에서 가상현실을 입력하면 연관검색어로 성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점을 보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강남역 체험센터에서 주목받는 체험장비는 롤러코스터였다. 의자에 앉아 오큘러스 장비를 착용하면 열차가 이용객을 수십m 높이로 끌어올려 질주하기 시작한다. 느리고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수 있도록 좌석 앞 송풍기에서는 바람을 날리고 스피커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의자는 전후좌우로 흔들리고 이용자는 환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진짜와 똑같아요.” 소감을 묻자 첫마디로 실제 롤러코스터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가상현실 롤러코스터를 타던 어린 학생은 급가속을 실감하자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깜박 잊어버릴 만큼 실감나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장치가 롤러코스터다. 짧은 시간 동안 가상현실 체험을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다. 만족도도 가장 높고 다시 타겠다는 사람도 많다. 위험한 상황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관계자는 자극이 강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가상현실을 제대로 즐기려면 오큘러스 등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어댑터와 중력·동작 감지 등 각종 센서류, 그리고 실시간으로 대용량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 등이 있어야 가능하다. 게다가 콘텐츠와 소프트웨어는 필수품이다. 가정용 게임기기에도 가상현실 장비가 적용되고 있지만 최소한 수백만원대의 장비를 갖춰야 현실의 벽을 돌파하는 가상현실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때문에 개인이 장비를 갖추기 힘든 한 별도의 가상현실 체험방은 당분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동대문디자인센터의 가상현실 체험공간은 휴대폰을 이용한 디스플레이 어댑터를 채용하고 있다. 고가의 장비를 스마트폰으로 대체할 수 있어 문턱을 낮추었다. 체험이 끝나면 카드보드를 통한 이용법도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가상현실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승마게임과 우주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스페이스 의자 등이 눈길을 끈다. 억대의 말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는 승마 스포츠를 가상현실 속에서 간단히 체험할 수 있으니 누구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릴 수 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돈이 실력이 될 수 없는 가상의 현실이다.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 장비를 착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사진 위) 속도감과 움직임을 실감할 수 있는 자동차 경주 게임.(사진 아래)
고객 끌어들일 적정한 이용료 책정 고심
지난 10월 개장한 부산 남포동의 가상현실 체험존은 대규모 공간을 자랑한다. 가상현실 체험과 피시방, 실내 드론 비행장 등 각종 시설을 결합한 복합공간이다. 업체 측은 실내테마파크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 장비만으로는 넓은 공간을 채우기가 어렵고 콘텐츠가 부족한 것도 복합공간을 만든 한 가지 이유라고 짐작된다.
이곳은 현재 자유이용권으로 각종 시설을 이용하도록 했다. 강남역 체험센터 이용객 대부분은 저렴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이용료를 이용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비싸다면 굳이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타당한 가격 책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설투자와 운영에 대규모 예산이 필요하지만 이용자들을 확실히 끌어당길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한 업체에서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문을 연 전용 유료 체험공간은 찾기 힘들다.
가상현실 체험공간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또 다른 곳으로는 기업의 홍보분야가 있다. KT는 경기 창조경제혁신센터 안에 가상현실 체험존을 열었다.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에 가상현실을 결합한 콘텐츠 개발에 힘을 싣고 있고, IPTV에서도 맛보기용 가상현실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중이다. SK텔레콤도 가상현실 드라마 제작을 비롯해서 EBS와 협력해 가상현실을 활용한 교육용 콘텐츠 개발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밖에도 국내 재벌급 기업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한 체험과 홍보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가상현실 상설 체험공간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콘텐츠의 미비와 막대한 시설투자가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시적인 행사나 특수전시 등의 용도로 가상현실 체험공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9월 미래창조과학부는 서울 상암동에서 가상현실 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보다 앞서 광화문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 홍보행사로 가상현실을 통해 봅슬레이 경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바 있다. 계절과 환경의 영향을 가상현실의 세계에서는 간단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이 쨍쨍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얼음썰매의 속도감과 함께 승부의 쾌감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가상현실의 진면모를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상설 공간으로 운영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가상현실 체험 콘텐츠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롤러코스터.
에듀테인먼트 등 콘텐츠 개발이 관건
현재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사들이 주목하는 곳은 부동산시장이다.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가상현실로 실내외 곳곳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모 건설회사가 판교지역 아파트 분양현장에서 선보인 가상현실 모델하우스는 현재 지방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아파트 단지의 전체 조망에서부터 출입과 내부 시설 체크까지 생생하게 체험해 보고 주택을 선택할 수 있어 젊은 고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관련업 종사자들뿐 아니라 이용객들이 지적하는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어지럼증이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입체화면을 보며 움직이기 때문에 화면의 울렁거림과 어지럼증은 누구나 느낀다. 다만 어린이들의 경우 게임의 몰입도가 높아 쉽게 지나치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다.
“가상현실 게임은 어지럽다. 현재 기술의 한계 때문인데, 앞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용자들이 가상현실은 어지럽다는 편견을 갖게 되고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고글을 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만큼 재미있거나 필요한 콘텐츠 개발이 급선무다.” 가상현실 콘텐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오브로 정영선 대표는 승부는 역시 ‘콘텐츠’에 있다고 강조한다. 가상현실 게임시장을 노다지로 보고 주력하는 분위기지만 교육과 게임이 연결된 에듀테인먼트 분야에서 가상현실 체험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가상현실을 통해 역사 유적지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거나 미래의 직업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등 지금도 가상현실을 교육에 도입하여 성공한 사례들이 드물지 않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도 가상현실을 이용한 학습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집중력도 더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몰입도는 있지만 지속적인 이용에는 부적합한 것이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지적도 있다. 게임개발사들이 투자를 집중하고 있지만 이용자들의 반응은 느리다는 것이다. “게임보다는 이용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교육 부분이 가상현실 콘텐츠에 더 적합하다”는 업계 관계자의 설명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융·복합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갖춘 미래형 산업으로 가상현실 관련 산업을 지정했다. 올해를 가상현실의 원년으로 삼고 향후 수천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사업마다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을 지원하며 주체도 미래창조과학부, 문화체육관광부, 지자체 등 다양하고 사업도 겹치는 분야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부터 갑자기 창조경제의 성장동력 산업으로 가상현실 분야를 강조하며 지원을 서두른 데는 소위 ‘최순실 예산’이라는 의혹의 눈길도 있다. 업계 관계자의 “지원 대상이 미리 정해진 느낌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과거 영화 아바타가 성공한 후 3D 영상물이 신산업의 원동력이라며 막대한 예산을 퍼부었다가 흐지부지한 전력도 있다.
가상현실은 분명히 매력적인 분야다. 가상의 체험공간에서는 제약을 극복하여 현실을 체험하고, 시간의 장벽을 넘어서 과거와 미래를 경험하며, 공간의 한계를 딛고 광활한 우주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인식과 경험을 확장하고 즐거움을 준다. 가상현실 체험공간은 상상과 현실이 절묘하게 만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절묘한 우리 시대의 공간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