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꼭 이기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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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꼭 이기고 싶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감히’ 주권자인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버티고 있는 허수아비 대통령과 그의 부역자들을 물러나게 하려고 주말마다 광장이라는 전쟁터로 출동한다.

많은 ‘일못’들이 단지 일만 못하는 건 아니다. 다른 것도 세트로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 중 싸움을 지지리도 못한다. ‘싸움’ 하면 선명하게 기억나는 풍경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선생님이 정한 음악에 맞춰 조별로 율동을 창작하여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다. 틈만 나면 함께 모여 율동을 만들었는데 Y는 항상 불참했다. 다들 불만이 가득했지만, 키도 크고 영향력 있는 친구였던지라 아무도 드러내놓고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우리는 모였는데 Y는 한쪽에서 놀고 있었다. 잔뜩 열 받은 ‘하룻강아지’ 내가 Y 귀에 들리도록 말했다. “야~ 쟤 빼고 우리끼리만 발표해버리자.” 그 말을 ‘호랑이’ Y가 듣고 발끈했다. 그렇게 싸움판이 벌어졌다. 내 옆에는 함께 열 받은 조원들이, Y 옆에는 친구들이 새로 산 고무줄처럼 짱짱하게 서로를 노려보고 대치했다. 힘에서는 밀렸지만, 명분상 전혀 꿀릴 것 없는 내가 포문을 열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Y와 그의 일당이 뿜어내는 기에 눌려서인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이없게 눈물 바람을 하는 나에게 Y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지랄 말고, 꺼져.” 그 말에 나는 정말 꺼져버렸다. 촛불처럼, 텅 빈 땅처럼. 그날 이후 Y에게는 명분까지 더한 자유가 주어졌다. 내 기억에 보관된 가장 인상적인 패배이자, 첫 패배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싸움에서 같은 패턴으로 졌다. 싸우기 전에 울어버렸고, 울었기 때문에 싸움조차 성립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항상 질문했다. 나는 왜 매번 지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 싸울 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점점 많아진다. “결혼은 왜 아직…”,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따위의 말로 틈만 나면 남의 인생에 ‘일해라 절해라’ 훈수를 두는 세상의 표준들과 싸워야 하고, 중력과 같은 관성과도 싸워야 겨우 나를 지켜낼 수 있다. 그리고 세월호 가족, 비정규·해고 노동자 등 물러서면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할 때도 많이 생겼다. 그럴 때면 항상 이기는 법을 궁리하게 된다. 싸움도 하기 전에 매번 눈물 바람 하다가 꺼져버리는 주제에 나는 늘 이기고 싶다. 현재까지 내가 발견한 이기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물러서지 않는다. 끝까지 응시한다.” 한 번 물러서면 계속 물러서게 되고, 결국 지켜야 할 자리나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다는 싸움의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시하는 힘은 큰 무기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응시하면 힘이 생겨요.” 요즘 참석하고 있는 모임에서 들었던 이 말을 곰곰이 되새기게 된다. 물러서지 않고 응시하면 상황을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 해석하는 힘이란 결국 피아를 제대로 구분하여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동력이 된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다리에 힘을 굳게 주고, 조용히 응시하면 상대편에 균열이 생긴다. 그 틈으로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요즘 꼭 이기고 싶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싸워왔던 상대 중 가장 힘 있는 존재와의 전쟁일 것이다.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시스템을 철저하게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감히’ 주권자인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버티고 있는 허수아비 대통령과 그의 부역자들을 물러나게 하려고 주말마다 광장이라는 전쟁터로 출동한다. 광장에 설 때마다 질문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이길 수 있을까? 질문은 곧 기도로 이어진다. 이기게 해주세요, 이번에는 꼭 이기게 해주세요.

지난주 국회에서 진행된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재갈을 물렸기 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 시스템은 이제 그만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서 그만 재갈을 뱉어도 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말은 옳다. 지금은 부당하게 물어야 했던 재갈을 뱉어버리고, 물러서지 말고, 응시해야 할 때다. 그래야 제대로 이길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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