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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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의 사회]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먹고사는 문제까지야 몰라도 최소한 삶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는 지켜주리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서울행 기차를 타러 허겁지겁 환승 끝에 도착한 대전역 광장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자면, 마치 할리우드 재난영화에 나오는 대피행렬과도 같았다. 남쪽 지방에 갑작스레 쏟아졌다는 기록적인 폭우 탓이었다.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검색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헤드라인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분명 대구 이북 구간에서는 정상운행 중이라 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열차는 적어도 한두 시간은 연착할 예정이며, 어떤 열차는 아예 운행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는 전광판의 글자들만 어지러이 흔들리며, 엄청나게 중요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되 뭔지 모를 절망적 분위기를 연출하기에는 충분했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 매표소인 듯 꼬불꼬불 돌아가는 기나긴 행렬에 잠시 서 보았으나 이내 포기하고 만다. 혹시나 싶어 행렬의 맨앞으로 가서 역무원과 승객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 기울이니 천재지변이라 전액 환불은 안 된다는 것, 또 다른 무언가는 도착역에 가서 문의하라는 것, 하여튼 지정된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등속의 말만 허공을 떠다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착에도 계급이 있는지 내가 탈 KTX는 너댓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새마을호에 비해 대기시간이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 광장은 어딘가로 바삐 전화 거는 사람들과 답답한 마음에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빼문 사람들 사이로 터줏대감인 노숙자들마저 우왕좌왕하고 있다.

무용지물이 된 열차표 매표 앱

그렇지만 그 날 저녁, 나는 예정시각보다 불과 이삼십분 정도밖에 늦지 않게 목적지인 서울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바빴는데, 그 내용인즉 정확하게 나의 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한 시간쯤 전 나는 문득 아무 기차에나 올라탄 다음 벌금이라도 내면 될 거라는 생각에 대전역 플랫폼으로 뛰어들어갔고, 놀랍게도 십여 분 뒤에 도착하는 텅텅 비다시피한 서울행 KTX에 탑승했던 것이다. 동대구, 대전 혹은 그 어딘가에서 두 시간째 대기 중이라는 아무개 과장님 얘기를 하면서 역시 한국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둥, 사람이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둥 즐겁게 날아다니는 말들 속에서 나는 마치 재난을 헤쳐 나온 영웅처럼 잠시 뿌듯했고, 각자도생, 이것도 나라인가라는 어느새 친숙해져버린 푸념들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우울했다.

첨단 스마트폰의 열차표 매표 앱은 왜 무용지물이었을까? 왜 역무원은 순서대로 오는 기차를 타면 된다고 안내하지 않았을까? 대합실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과 반쯤은 비어 있는 열차 사이의 불균형은 왜 해소되지 않는 것이었을까? 약속 자리에서 만난 지인은 아마도 역무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므로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도, 책임지고픈 의사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세월호, 메르스, 지진, 시스템 붕괴 등으로 연상작용에 따라 옮아 다니던 화제는 마침내 지급된 물품을 잃어버리면 다른 내무반에서 훔쳐서라도 갖다 놓으면 해결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한 세대 전 군대 얘기로까지 옮아갔다. 어쨌거나 나는 크게 밑진 바 없었으므로 그 날의 소란은 곧 잊혔다.

계급적 지배형식이 강해지는 한국사회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행복한 책읽기>라는 책을 뒤적이다가 예전에는 읽고서도 무심하게 지나친 구절 하나를 재발견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만년에 남긴 일기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은 프랑스 원어에 충실하자면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번역해야 한다는 짧은 메모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국가는 합법적 폭력이라는 막스 베버나 부르주아 계급의 집행위원회라는 칼 마르크스의 규정과는 약간 결을 달리하면서, 국가가 물리력을 갖춘 억압적 장치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검찰이나 국정원, 민정수석(!), 때로는 국세청에 이르기까지 합법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들과는 달리, 교육이나 종교, 매스 미디어처럼 시민사회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작동하는 좀 더 중립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각종의 장치들, 그러나 물론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결국 특정한 이데올로기만 골라 가르치는 장치들이다.

나는 국가권력을 사적인 재테크 수단으로 삼았던 최고 권력자들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때로는 물대포의 모습으로, 때로는 이른바 ‘내부의 불순세력’에 대한 경고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던 억압적 국가장치,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계급적 지배형식으로서의 국가라는 측면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 최근 한국 사회의 현상이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쓰기도 했다. 그런데 김현의 알튀세르 해석이 맞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국가가 애초부터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라는 명제는 부끄럽게도 때늦은 깨달음을 던져 준다.

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먹고사는 문제까지야 몰라도 최소한 삶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는 지켜주리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애초에 모든 진리가 어느 정도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예컨대 그것이 ‘우주의 기운’처럼 신비주의적인 언술이건 ‘휘날리는 태극기’처럼 물신화한 징표이건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려 각자도생의 무용담이 좌절과 허무주의로 바뀌기 전에 떨쳐 일어나 이데올로기 속에 그나마 담겨 있을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정치의 시즌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일일 것이다.

혹여 내가 고작 천재지변 때문에 생긴 한나절의 소동을 겪었다고 호들갑스럽게 국가를 논하는 것일까? 그저 매사에 비관적인 백면서생의 호들갑이라면 차라리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지만, 상식으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권력 말기의 흔한 스캔들 치고도 너무나 품격이 낮은 내용으로 도배되는 신문과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서 차라리 세네카 <인생론>의 구절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조국을 해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국민을 해치는 것도 당치 않다. 그들은 조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손아람의 <소수의견>에서 재인용함을 밝혀둔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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