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폐기물 관리의 핵심은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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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위험 사회에서 우리가 가꿔야 할 핵심적 자산은 사회적 신뢰이다. 이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있는 주체들, 그 중에서도 정부가 신뢰 프로세스를 책임지고 제공해야 한다.

핵발전소를 운전하게 되면 크게 세 가지 종류의 폐기물이 발생한다. 첫째는 저준위방사성폐기물이다. 작업자들이 사용한 방호복, 장갑, 공구, 폐필터 등 방사능 세기가 약한 폐기물을 말한다. 별도의 보호장비 없이도 다룰 수 있지만 일부 방사능 세기가 강한 것은 보호장비가 필요하고 대체로 얕은 땅에 저장한다. 둘째는 중준위방사성폐기물이다. 저준위보다 방사능 세기가 강하며, 방사능에 오염된 부품이나 교체품·폐로·화학적 오니 등을 일컫는다. 방사능 수명에 따라서 얕은 곳에 묻거나 깊은 곳에 저장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일반적으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로 한데 묶어서 관리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약 20년간의 표류와 갈등 끝에 엄청난 경제적 보상금을 매개로 하여 결국 경북 경주에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 입지하게 되었다. 셋째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즉 사용후핵연료인데, 이게 큰 문제다. 핵폐기물의 99%를 차지하면서 독성도 중저준위보다 1000배 이상 강하고 독성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도 어마어마하게 길다. 즉 고도의 독성물질인데, 아직까지 뾰족한 처리 방법이 없다. 입지 결정에만 거의 30년이 걸렸고, 암반 자체가 경상도 정도의 크기라고 하는 핀란드의 온칼로(Onkalo) 정도가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대안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원전을 화장실 없는 맨션, 이륙했지만 착륙할 활주로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 비행기 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사회적 지혜를 모으는 공론화 필요
확실한 처분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불확실한 상태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은 핵발전소를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조만간 해결방안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근거해서 자꾸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위험 회피에 도움이 된다. 이 방법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면 그 다음 차선책은 다중 지성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론화이다. 영구처분은 아니더라도 임시저장 혹은 중간저장을 위한 방법과 입지를 결정하는데 사회적 지혜를 모아보자는 것이 그 취지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는 방사성폐기물 처리와 관련하여 공론화 프로세스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전북 부안군민들의 저항과 주민투표 등으로 방폐장 입지 결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부가 공론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국회, 산자부, 한수원, 시민단체 등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방사성폐기물 관리와 관련한 공론화 프로세스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총리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으로 고준위방사성폐기물만 공론화하기로 결정을 하고,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식으로 가게 되었다. 공론화 대신 경제적인 수단을 활용한 결과는 위험의 증가이다. 어렵게 마련한 경주 방폐장은 문제가 없다는 암반에서 지하수가 계속 누출되어 공사비를 증가시켰고, 완공 후에는 지하수를 뽑아내는 배수장치가 1년 만에 말썽을 일으켜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방폐장을 관리·감독하는 기관의 합의나 동의도 없이 진행되었다.

6월 17일 산업부가 연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 공청회는 공론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공청회 파행에 항의하는 지역주민들. / 한빛원전 범 군민대책위 제공

6월 17일 산업부가 연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 공청회는 공론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공청회 파행에 항의하는 지역주민들. / 한빛원전 범 군민대책위 제공

공론화를 하기로 한 지 약 10년 만에 마침내 2013년 10월에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가 발족하였다. 하지만 시민단체가 위원회의 독립성 보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하면서 반쪽짜리 위원회라는 논란이 있었다. 약 20개월에 걸쳐 활동을 한 후, 2015년 6월 29일에 10개의 권고사항이 담긴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권고사항의 핵심적인 내용은 2051년까지 처분시설을 건설·운영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처분시설 부지 혹은 부지조건과 유사한 지역에 지하연구소 부지를 2020년까지 선정하고 건설과정에 착수하여 2030년부터는 실증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권고안을 바탕으로 정부는 약 1년을 준비하여 지난 5월에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안)은 2028년까지 고준위폐기물처분장 부지 선정을 하고 영구처분시설 가동은 2053년 정도에 시작한다는 시간표를 상정하고 있다. 즉 앞으로 12년간 절차를 밟아 집중형 중간 저장 시설, 지하 연구 시설, 최종 처분장을 동시에 사용하는 부지를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계획안에 따르면 부적합 지역 배제, 부지 공모, 부지 기본 조사, 주민 의사 확인에 8년을 잡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전체 지질에 대한 조사연구가 제대로 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이 모든 절차를 수행하겠다는 것인가? 답을 정해 놓고 요식행위처럼 졸속으로 진행하겠다는 말인가? 부지 선정이 되고 나서 심층조사를 한다는 순서도 문제다. 심층조사를 해서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공모에 응하는 지역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산업부는 공모가 안 될 경우 정부 직권으로 지정할 수도 있고, 국제 처분장(예컨대 광산업 퇴조로 전 세계 핵폐기물보관사업 유치를 검토하는 남호주주(South Australia State)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안 되는데 국제적으로 더 쉬울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1997년 대만에서 방사성폐기물을 북한으로 보내려다가 실패한 사실을 정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 정부는 2035년까지 중간저장시설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이미 그 이전에 각 원전의 폐연료봉 저장시설은 포화상태에 놓인다. 월성 원전은 2019년에, 한빛원전·고리원전은 2024년쯤에 저장시설이 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전에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2053년 이전에 사용후핵연료 영구처분 기술이 개발된다는 보장은 또 있을까?

불신 자초하는 정부의 파행적인 공청회
이러한 우려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6월 17일 산업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 공청회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공청회는 공론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공청회 시작 전부터 정부와 한수원,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들이 먼저 입장하여 자리를 차지했고, 정작 지역 주민들이나 심지어 사전신청을 한 사람들조차 공청회 장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국민의례를 끝낸 후 주민들의 강력한 저지로 오전 11시쯤 정부는 공식적으로 휴회를 선언했고, 지역주민들은 단상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계획에 대한 발언을 이어갔다. 낮 12시쯤 산업부는 갑자기 용역업체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단상이 아닌 회의장 중간위치로 들어와 기습적으로 공청회 재개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기본계획에 대한 의견 주십시오”라는 한마디를 한 후, “없으시면 이것으로 공청회를 마치겠습니다”라고 폐회를 선언했다고 한다. 이것이 공론화를 통한 사회적 의견 수렴이고 다중의 지혜를 모으는 방식인가? 왜 정부는 스스로 불신을 자초하는가? 원자력과 관련한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신뢰의 부족이다. 특히 사용후핵연료처럼 아직 기술적 해결책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유일한 정책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공청회를 운영하는 것은 사회적·생태적 위험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불확실한 위험 사회에서 우리가 가꿔야 할 핵심적 자산은 사회적 신뢰이다. 이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있는 주체들, 그 중에서도 정부가 신뢰 프로세스를 책임지고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에 다양한 당사자들이 적극적이면서도 책임감 있게 참여하고 부단히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위험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헤쳐나갈 튼튼한 배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막연한 기술적 낙관주의나 전문가주의는 방사성폐기물 처리와 같은 불확실성의 바다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왜소한 나룻배이다. 정부는 진정한 공론화를 위해 이미 제시된 정책이라도 재고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직진만 하는 자동차는 고장 난 자동차이다. 후진도 하고 방향도 틀어야 한다. 유연하고도 폭넓게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야말로 배를 크고 튼튼하게 만드는 정공법이다.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공론화 방안을 다시 수립하는 것까지도 적극 검토해봐야 한다. 우리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정부, 그래서 자랑스러운 정부를 한 번 가져보고 싶다.

<이상헌 한신대학교 교수·녹색전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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