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시사프로 장악한 유사 전문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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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없고 근거도 부실한 술자리 뒷담화 수준의 자의적인 인상 비평이 전문가 진단이라는 탈을 쓰고 거의 온종일 방송으로 전파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며칠 전 만났던 어느 신문사 기자는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는 시대가 왔으니 이제 먹고살 일이 걱정이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어느 방송사 PD는 페이스북 라이브 서비스처럼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생방송을 하는 시대가 됐으니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나 PD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선망 받는 직업이었고 전문가 대접을 받던 직업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졸지에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한쪽에서는 호모사피엔스보다 더 뛰어난 지능과 생산력을 갖춘 기계가 밀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첨단 디지털 기기를 갖춘 영리한 대중들의 능력이 커지고 있으니 전문가들이 설 땅은 이렇게 자꾸 줄어들고 있다.

대중과 단절되는 진짜 전문가들
따지고 보면 전문가 집단의 위축은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기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대학생들은 강단 위의 교수보다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나 구글 검색 결과를 더 신뢰한다. 영화 팬들도 평론가의 평가보다 포털에 올라온 관람객 평점을 더 중시한다. 전문 사진작가의 전유물이던 고가의 DSLR 카메라조차 이제는 관광객들의 어깨에 흔히 걸려 있는 일상용품이 되었다. 여기에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까지 높아지면서 바야흐로 전 국민의 사진작가 시대가 열렸다. 굳이 인공지능의 출현이나 글로벌 IT기업의 새로운 서비스가 아니어도 전문가의 퇴조는 이미 예상되던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인 추세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전문가의 퇴조를 촉진시키는 또 하나의 엉뚱한 요인이 추가된다. 바로 유사 전문가 집단의 급부상이다. 유사 전문가 집단이란 실제로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해 스스로를 전문가처럼 포장해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말한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대중강연 시장, 그리고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종편 시사프로그램이 이들 유사 전문가 집단의 주요 활동무대이다.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유사 전문가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논리도 없고 근거도 부실한 술자리 뒷담화 수준의 자의적인 인상 비평이 전문가 진단이라는 탈을 쓰고 거의 온종일 방송으로 전파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기업의 사무실에서 직원이 종편 4개 채널을 틀어놓고 보고 있다. ※ 사진은 기사 본문 중 특정 언급과 관련이 없습니다. /강윤중 기자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유사 전문가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논리도 없고 근거도 부실한 술자리 뒷담화 수준의 자의적인 인상 비평이 전문가 진단이라는 탈을 쓰고 거의 온종일 방송으로 전파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기업의 사무실에서 직원이 종편 4개 채널을 틀어놓고 보고 있다. ※ 사진은 기사 본문 중 특정 언급과 관련이 없습니다. /강윤중 기자

최근 한 케이블 방송에서 미술사 강연을 하던 유명 강사가 엉뚱한 그림을 장승업의 <군마도>라고 잘못 설명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은 사건이 있었다. 애초에 사교육 시장에서 수능 사회탐구 강의로 유명세를 얻은 학원 강사가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느닷없이 인문학자로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인문학 강연이 인기라 해도 수십 년간 사회과학을 연구해 온 사회과학자들조차 감히 자신을 인문학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전공분야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인문학을 공부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는 있다. 하지만 비전공자가 스스로를 인문학자라 참칭하고, 대중매체는 여기에 권위를 실어주며, 청중들은 그의 잘못된 설명에도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감동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으로 전파되는 것은 한 편의 부조리극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유사 전문가가 대중매체를 통한 사회적 발언권을 독점하면 진짜 전문가의 역할은 기껏해야 그에게 딴죽을 거는 조연급으로나 비쳐질 뿐이다. 실제로 이 방송 내용에 대한 미술사 전공자의 공개 비판이 나온 이후 쏟아진 인터넷 댓글 내용이 그랬다. 진짜 인문학자들이란 학문의 높은 장벽에 갇혀 대중과 단절되어 있거나, 고루하고 재미없는 강의로 청중들과의 소통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쯤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의 식견 있는 지적조차 그저 대중적 인기에 대한 질투 따위로나 간주될 뿐이다.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들어 전문성을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강의 능력까지 탁월할 수는 없는 일인데, 진짜 전문가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의문의 1패를 당한 셈이다.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유사 전문가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논리도 없고 근거도 부실한 술자리 뒷담화 수준의 자의적인 인상 비평이 전문가 진단이라는 탈을 쓰고 거의 온종일 방송으로 전파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의 전문영역이라는 것이 정치·경제·범죄·문화 등 뉴스가 되는 거의 모든 영역에 망라되어 있으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그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인지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어제는 선거 결과를 예측하며 예언자 노릇을 하던 자가 오늘은 북한 김정은의 속마음을 들여다 본 듯 독심술사 행세를 하더니, 내일은 또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을 마치 옆에서 쭉 지켜봐 왔던 것처럼 아는 체하며 설명한다. 경찰서 수사과장 출신이 친박과 비박의 갈등상황을 해설하고, 가정법률을 상담하던 변호사가 북핵문제를 논평하는 황당한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같이 펼쳐지는 곳이 종편 시사프로그램이다.

고함과 막말, 능글맞은 비아냥이 특기
방송에서 이들의 주특기는 오직 목청 높은 고함과 막말, 그리고 능글맞은 비아냥이다. 통계자료나 관련 법률 조항 등 객관적 자료에 근거한 깊이 있는 분석과 치밀한 논증, 그리고 진지한 설득처럼 진짜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미덕 따위는 이 아수라판 방송 스튜디오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 결국 진짜 전문가는 방송 출연을 기피하면서 대중들과 단절되고 유사 전문가들의 저급한 발언만이 전문가 진단이라는 미명 하에 대중에게 전파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지금 대중매체를 통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유사 전문가들은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과 식견을 갖춘 진짜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스타일로 승부하는 강연 전문가, 방송 출연 전문가일 뿐이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이들 유사 전문가의 준동이 심해지면서 진짜 전문가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물론 과거와 같이 대중들이 전문가의 권위에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현명한 대중들의 집단지성이 커지면서 누구나 스스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진보된 시대가 아니라 유사 전문가들의 혹세무민에 대중들이 휘둘리는 시대라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보다도 못한 퇴보이기 때문이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IT디자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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