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브람스의 작품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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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채식주의자’가 영화로 제작된다면, 과연 그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기존의 음악들 중에서 내 임의로 한 곡을 정해본다면 단언컨대 브람스의 유서 같은 작품, ‘클라리넷 5중주’다.

솔직히 말하여, 세 편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가 10여년 전에 연재될 때는 다 찾아 읽지는 못하였고, 그 중 두 번째 이야기인 ‘몽고반점’이 그 무렵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게 돼 일독을 하였으나 이번에 소설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하자 다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만약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면, 과연 그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생각해 보았다.

지난번 칼럼에 쓴 영화 <곡성>의 음악감독 ‘장영규/달파란’이라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하는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채식주의자>, 19쪽) 같은 문장을 그로테스크한 울음소리로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꽃잎>, <황진이> 등의 영화음악을 맡은 원일도 같은 맥락에서 떠올릴 수 있다.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한강과 브람스의 작품은 닮아 있다

둘이 같이 있어도 외롭기만 한 고독
<만추>,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영화를 어루만졌던 조성우라면 영화는 전혀 다른 온도를 지닐 것이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나무 불꽃’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동생을 간호하는 언니는 비극적 삶의 아이러니가 주는 의미를 되새긴다. 한강은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채식주의자>, 204쪽)고 쓴다. 이를 조성우라면 살짝만 건드려도 미세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떨리는 피아노로 들려줄 것만 같다.

이 모든 얘기가 가상이므로, 내 임의로 한 곡을 정해본다면 단언컨대 브람스의 유서 같은 작품, ‘클라리넷 5중주’다.

소설은 극단의 채식을 시작한 아내 영혜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깊은 밤, 남편은 안방에 홀로 누워 있는 영혜를 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매우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사람의 숨소리 같지는 않았다. 손을 뻗으면 그녀의 따스한 살을 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나는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채식주의자>, 15쪽)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 그 1악장이 꼭 이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네 명의 현악 연주자들이 쓸쓸한 공기를 만들면서 먼저 출발하면 클라리넷의 두터운 소리가 그들을 천천히 따라간다. 두 대의 바이얼린과 비올라, 첼로, 곧 네 개의 현들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는 클라리넷을 저마다의 방식대로 위로한다.

<채식주의자>와 클라리넷 5중주, 책을 읽으면서 감각적으로 떠올린 것이지만 한강과 브람스의 작품세계는 상당히 닮아 있다.

브람스가 1869년에 작곡한 <알토 랩소디>를 들어보자. 그가 평생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클라라, 그녀는 이 곡에 대하여 “참으로 진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거대한 관현악이 가혹한 운명의 힘을 드러내는 듯하다. 합창은 운명의 힘에 흔들리는 광경을 들려준다. 그 사이로 침통한 알토의 노래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 들려온다.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앨범.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앨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아, 누가 이 고통을 치유해줄 것인가 / 향유가 독으로 변해버린 그의 고통을 / 그는 사랑의 샘에서 증오심의 물을 마셔버렸다네.”

이토록 비참한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하여 브람스는 단순한 실연의 상처 이상의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 그러니까 조용필의 노래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리고 심수봉의 노래처럼 둘이 같이 있어도 외롭기만 한 그런 극단의 고독과 슬픔의 풍경을 들려준다. 소설에서 남편은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채식주의자>, 25쪽)고 말한다.

19세기 중후반, 격렬한 민족주의 감정이 곳곳에서 전쟁을 야기하는 상황에서 독학자 브람스는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일고 있는 격렬한 파고들을 헤치고 그 밑에 웅크리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불안을 들여다보았다. 북유럽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십대의 어느 한때를 유흥가 상트 파울리에서 피아노를 치며 집안의 생계를 거들기도 했는데, 그는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선원들로부터 세상에는 수많은 음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밤의 유흥가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비참한 노래와 핏대 높은 절규와 이유 없는 싸움박질을 통해 짙은 허무의 냄새를 일찌감치 맡을 수 있었다. 그가 귀족이나 신흥 중산층 출신이었다면 일부러 상트 파울리에 술 마시러 놀러가기 전에는 결코 접해 보지 못했을 세계였다.

브람스는 독일 민족주의의 문화적 깃발을 흔들며 기존의 음악언어를 과감하게 혁신한 바그너와는 다른 기질의 음악가였다. 브람스는 가장 확실한 전통, 곧 베토벤의 휴머니즘과 그 형식, 즉 소나타와 교향곡이라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형이상학적 불안을 위로하는 길이며 나아가 유럽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프란츠 리스트를 시작으로 하여 바그너, 브룩크너, 볼프 등으로 이어지는 신독일악파가 파란의 실험을 거듭하는 동안 브람스는 오페라 <탄호이저> 악보를 보고 “화성악의 기초도 배우지 못한 수준”이라고 혹평한 슈만의 관점에 의지하여 베토벤의 내용과 형식, 특히 그 후기 양식을 충실히 견지하였다.

밤의 유흥가에서 벌어지는 허무의 냄새
그것은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는 세계이며 한 발을 뒤로 뺀 채 이제까지의 걸음을 되돌아보는 방식이다. 외부의 강한 압력, 피부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예리한 자극, 흔히 상처라고 고통이라고 슬픔이라고 말해지는 마음의 불안을 브람스는 쏘아보거나 밀쳐내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속으로 끌어당겨 오랫동안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멍하니 바라보는 방식으로 곡을 썼다. 브람스를 일컬어 내면의 숱한 갈등과 욕망을 놀라운 의지로 견뎌내는 도덕적·종교적 태도, 즉 견인주의로 풀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채식주의자>의 두 번째 작품 ‘몽고반점’에서 영혜의 언니는 동생이 자기 남편과 함께 깊은 밤을 보냈고 또 그것을 촬영한 캠코더를 보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까지 언니는 찾아가게 되고, “여보, 내가 설명할게, 이해하기 쉽진 않겠지만…”이라고 말하는 남편 앞에 서게 된다. 언니는, 구급대를 불렀다고 말한다.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채식주의자>, 146쪽)

이윽고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는 4악장에 이른다. 그가 모범으로 따랐던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처럼, 이 곡 역시 자기에게 보내는 등기우편이자 세상에 작별을 알리는 고별사다. 슬프디슬픈 음악, 지금 막 슬픈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깊은 연민과 위로를 건네는 음악,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다. 특히 그 4악장은 화사한 봄에 들어도 금세 늦가을의 짙은 그늘을 만들며, 땡볕의 여름에 들어도 황량한 겨울 벌판을 연상시킨다. 영국의 음악학자 어니스트 뉴먼이 “브람스는 진정 한 사람의 철학자이며, 그의 가장 훌륭한 철학은 그의 영혼의 근본을 이루는 구슬픈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썼는데, 이를 단박에 확인시켜주는 곡이 클라리넷 5중주다.

그 4악장은 소설의 마지막처럼 슬픔의 종지부를 찍는다. 짙은 한숨들, 곧 죽음이다. 네 대의 현이 쓸쓸한 풍경을 만들고, 그 사이에서 클라리넷이 마지막 한숨을 내뱉는다. 한 걸음 뒤에서 네 대의 현이 최후로 단 한 번 거친 활로 자신들의 몸을 내리긋고는 다시 희미한 숨을 몰아쉬며 브람스의 슬픈 음악이 끝난다. 소설의 죽음, 주인공 영혜가 죽음을 한강은 이렇게 묘사한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채식주의자>, 221쪽)

브람스는 1891년에 유서를 쓰는 등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정중히 맞이하려 하였다가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 묄펠트를 알게 되어 마지막 유언처럼 5중주곡을 썼다. 그 후, 몇 년을 병고에 시달리다가 1895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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