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2만 달러면 가구당 연 9000만원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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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9000만원은 어림잡아도 전체 근로소득자 중에서 상위 5%는 될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솔직히 자백(?)하자면 ‘철밥통’으로 악명 높은 국립대학 교수 20년차를 바라보는 내 연봉을 웃도는 금액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경제학자이면서도 한국 경제의 실상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통계수치에 관해 잘 모른다. 전공이 고도의 추상적인 세계를 다루는 이론경제학이라 그렇다고 변명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임도 잘 안다. 그런데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대체로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예컨대 일본의 경제학자들에 비해 구체적인 숫자에 약한 편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몇 가지 짚이는 데가 있기는 하다. 경제학이 경제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만 연구하는 ‘경제학학’이 돼버린 슬픈 현실 탓도 있다. 현실에 관한 연구보다는 외국 학술지에 실을 논문 하나라도 쓰는 것이 훨씬 더 절박하고도 유용한 일이 되도록 만든 성과주의적 환경도 무시하기 힘들다.

부부 맞벌이해도 월 400만원 안 되는데
어쨌거나 경제학자들이 이러하니 경제학 바깥에 있는 일반인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유독 강한 숫자가 있으니 바로 일인당 국민소득, 정확하게 말하면 GNP 혹은 GDP가 그것이다. 실물경제에 밝은 외국의 경제학자에게 막상 너희 나라는 일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냐고 물어보면 뜻밖에도 눈을 껌뻑이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본 적도 많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일인당 국민소득은 과장하자면 일기예보만큼이나 일상적인 기삿거리가 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교실 벽에 붙여 놓은 ‘1인당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를 주문처럼 외우며 자라났다. 사실 그 목표인즉 1980년이 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내게 1980년은 한편으로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것같이 먼 미래로 느껴졌다. 공교롭게도 그 목표를 진두지휘하던 최고 권력자는 막상 그 연도를 불과 두어 달 앞둔 시점에서 부하의 총에 맞아 사라졌다.

이란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5월 2일 테헤란 사드아바드 좀후리궁에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환담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란을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5월 2일 테헤란 사드아바드 좀후리궁에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환담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실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일인당 GDP는 대충 2만5000달러 정도 되는데, 여기에는 고정자본의 감가상각은 물론 생활인의 관점에서 선뜻 소득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귀속임대료 같은 것도 포함돼 있다. 자신의 명의로 된 집에 살면서 스스로에게 임대료를 낼 일은 없지만 기회비용으로서는 그만큼의 소득으로 계산되므로, 요컨대 2만5000달러가 온전히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금액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양보해서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늘려 잡아도 일인당 소득은 2만 달러는 넘을 것이고, 4인 가족 기준이라면 가구당 소득은 8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1달러가 1100원이라 쳐도 대충 연간 9000만원 정도의 소득은 돼야 겨우 평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연봉 9000만원은 어림잡아도 전체 근로소득자 중에서 상위 5%는 될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솔직히 자백(?)하자면 ‘철밥통’으로 악명 높은 국립대학 교수 20년차를 바라보는 내 연봉을 웃도는 금액이다. 여기에다 노동자의 절반가량이 20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고 있다는 또 다른 통계 조사 결과를 갖다 붙여 보면, 우리 삶의 현실적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요컨대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월 소득이 400만원이 안 되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쯤은 된다는 뜻이니, 일인당 국민소득의 겨우 절반 수준도 못 버는 가구가 대략 전체의 절반인 셈이다.

소득이나 재산 분배에 관한 자세한 데이터가 없이 이 정도의 주먹구구만으로도 “강성노조가 파업만 안 했어도 3만 달러는 벌써 넘었다” 따위의 정치적 선동이 얼마나 심각한 언어폭력이자 현실 은폐인지는 금방 드러난다. 매우 조잡한 비유지만, 전교생의 절반 넘게 기초학력 부진 상태인 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가 몇 명 늘어나느냐에 목숨 거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라고나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 단위로 나타낸 여러 가지 물신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이쯤 되면 성장률이나 일인당 국민소득을 빌미로 하는 온갖 푸닥거리들에 대해 냉철한 시선을 가져야 할 때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난 셈이다.

1977년, 대한민국 수출 100억불 달성을 축하하는 신문광고.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7년, 대한민국 수출 100억불 달성을 축하하는 신문광고. / 경향신문 자료사진

물론 그 어떤 대중정치인도 드러내놓고 성장을 거부하자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는 ‘좌파’라 불렸던 정권에서도 성장률 공약을 내걸었다. 이미 낙수효과는 사라졌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하다가도 막상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면이 되면, ‘진보적’이라거나 ‘소득 주도’라는 수식어를 붙여서라도 성장을 말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장에 대한 갈망이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라도 된 듯한 현실은 스스로를 확대재생산하는 다양한 환상적 기제를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환상은 경제성장을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참가한 국가대표팀의 스포츠 경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기업(주로 재벌이다)은 성장이라는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태극전사’이며, ‘조국에 계신 동포’의 역할은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과 홈 관중의 위협적 응원’에 맞서 분투하는 그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데에 있다. 이 또한 남한과 북한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하면서 자존감을 되찾거나 상대방을 경멸하는 수단으로 삼던 시절부터 아주 익숙한 풍경에 다름 아니다. 사실 비교우위론이라 불리는 경제학 교과서의 자유무역이론 그 자체가 어느 정도는 이러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 세간의 상식이지만, 국가 간의 자유무역만은 그에 참가하는 모든 나라들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같은 나라 안에도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린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잠시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만드는 셈이다.

성장의 환상을 둘러싼 정치적 동맹
최근 대통령 이란 방문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논란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MOU라는 것이 실제로는 별 구속력도 없는 실적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굳이 동정적으로 이해하자면, 권력을 쥐고 일을 추진하는 이들의 입장에서야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뭔가 하는 것이 낫고, 한 일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해 홍보하려는 욕망을 떨칠 길이 없을 것이다. 그 실적이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거니와 시민사회가 할 일은 나중에 밝혀지는 진실을 추적하고,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사실 여부 그 자체 못지않게 사실을 인식하는 틀에 있는지도 모른다. 개발연대에 구로공단이나 수출자유지역의 어린 여공들은 나라의 경제성장을 위해 역경을 헤쳐나가는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016년의 한국 사회에서 산업전사라는 이름에 가슴 벅찰 노동자는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 거울 이미지로서 노심초사하는 국가대표선수(혹은 대표팀 감독?)로서의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지지율 조사 결과로만 보면 분명히 약발이 듣는 통치수단이다.

폴란드 출신의 케임브리지 경제학자 미할 칼레츠키는 1943년에 쓴 <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이라는 논문에서 노동자를 길들이기 위해 일부러 완전고용을 피하면서 어느 정도의 실업을 유지하려는 대기업과 정치권력, 경제학자의 동맹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칼레츠키의 주장을 패러디하자면,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성장의 환상을 둘러싼 정치적 동맹이 맺어졌던 셈이다.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이 주고받는 자화자찬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 동맹이 실상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모멘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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