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김기덕이 던지는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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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베를린 영화제를 보러 가기 위해 짐을 싸다가 김기덕 감독의 근황이 궁금했다. 검색을 하니 오랜만에 실시간 뉴스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배우 류승범이 올 하반기에 개봉을 목표로 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그물>에 출연하기로 결정났다는 얘기다. 한국 영화계에서 김기덕처럼 부지런한 사람도 드물다. 1996년 <악어>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연출 24편, 각본 25편, 제작 13편을 했다. 5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미술·편집까지 직접 맡는 경우가 많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김기덕의 나라에서 왔군요!”라는, 김기덕 감독과 국적이 같다는 이유로 환대를 받은 적도 있으니 유럽에서의 그의 유명세는 짐작할 만하다.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2011년에는 <아리랑>으로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으며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수상한 유일한 한국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는 한국영화 최초로 3대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기쁨이 온 국민을 들뜨게 했다.

그런 그가 3년 뒤인 2015년 20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스톱>이 국내 첫 상영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제작비에 비해 개봉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내 영화는 개봉하면 안 되는 것 같다. 불법 다운로드라도 봐주시기만 하면 된다.”

<스톱>은 일본 자본이 투입됐고 일본 배우가 등장한다. 2016년 개봉 예정이라는 <무신>은 중국 제작사 자스녠화잉스(嘉視年華 影視·JSNH필름)에서 350억원을 투입해서 찍는다고 한다. 언론은 앞다투어 ‘김기덕 감독의 망명 아닌 망명’, ‘김기덕 감독의 독특함, 과연 대륙에서 통할까’ 등의 기사를 쏟아내었다. 국내 관객들도 그의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히 나뉘지만, 그가 정말 ‘망명’이라도 할까봐 무척 걱정이 되긴 하는 모양이다.

2012년 9월 베니스 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서 영화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과 조민수, 이정진이 인사하고 있다.

2012년 9월 베니스 국제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서 영화 <피에타>의 김기덕 감독과 조민수, 이정진이 인사하고 있다.

‘불편’한 영화는 ‘불필요’한가
예술가의 상상력은 보편적 가치에 순종하지 않고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며 역행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은 시대와의 불화가 가장 많은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그가 만든 24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충격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며 찬반양론이 대립했다.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불온하고 불화스럽고 불편했던 것이다.

김기덕은 모두가 피해 가는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초지일관 세상과 싸우며 비타협적이었다. 김기덕의 영화는 상당히 거북하다. 형용사 ‘거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답답하고 편치 않다’이다.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거북하다고 외면할수록, 진실을 직시하라며 더 불편한 작품을 만들었다.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차단한 불편함의 정체는 대부분 표현의 잔혹성일 것이다.

<섬>(2000)에서 회를 반쯤 뜬 물고기를 다시 놓아주는 장면이나 낚싯바늘을 삼키는 장면, <피에타>(2012)에서 신체포기각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강제로 손발을 절단하는 장면 같은 것들이 부지기수다. 또한 여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며 묘사하는 가학적인 이미지들이 잔혹성을 배가시킨다. 아이를 버리는 엄마나 성적 집착과 욕정에 사로잡히는 소녀나 아들의 자위를 도와주는 어머니의 모습 같은 장면들이 허다하다.

또 다른 불편은 우리가 상식이라 부르는 보편적 질서를 위반하는 데 따른 정서적 거부반응에서 비롯된다. <악어>(1996)와 <파란대문>(1998)에서 여자들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에게 복수 대신에 용서와 자비를 베푼다. 심지어 <나쁜 남자>(2002)에서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여자는 그 남자를 용서한다. 그러한 파격적인 설정이 관객들의 정서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보다도 더 중요한 불편의 정체는 그 잔혹하고 혐오스런 이미지들이 역설적이게도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며 부정하려고 애썼던 ‘불편한 진실’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기덕은 국내의 악평과 흥행 실패와 달리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인 베를린, 베니스, 칸에 가장 많이 초청되고, 장편 영화로 수상을 한 유일한 한국 감독이다. 외국에서의 극찬과 수상실적들이 혼란을 주며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피에타>가 그 절정을 이룬 대표적인 예이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의 황금사자상 수상이 증명하듯 외국에서는 현존 최고의 작가주의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비교적 소수 마니아 감독으로서만 평가절하되는 것이 현실이다. <빈집>(2004)의 경우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고 해외 35개국에서 개봉되었지만, 국내 실적은 전국 합계 스크린 수 60개, 누적관객 수 7만1559명에 그쳤다.

유럽 관객들에게 김기덕은 언제나 새로움을 던져주는 ‘나쁜 남자’다. 영화문법이나 구원의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바이로이트대학교 교수 우테 펜들러(51)는 “김기덕의 영화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 못지않게 남성에 대한 폭력 또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사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폭력에 의해 지배되지요. 일상적인 행동도 폭력의 일부분이며, 그 때문에 호불호가 존재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인류의 본질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유럽의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화가 유럽 스타일에 부합하는 것은 맞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김기덕의 영화는 고유한 ‘김기덕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독특한 시각에서 그리는, 매우 독창적인 스타일의 영화 연출법을 아주 높게 평가합니다”라고 말했다. (<주간경향> 1114호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 인터뷰 중) 김기덕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대부분 펜들러의 의견과 일치한다.

특히 <피에타>는 김기덕 영화에서 탐색한 세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기덕의 작품세계는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그 세상을 정면으로 돌파해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인간의 비애로 압축된다. 지옥처럼 잔혹하고 정글처럼 난폭한 이 세상을 견뎌내야만 하는 삶의 근본적 모순과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김기덕이 말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김기덕은 몇 해 전 아르헨티나 영화평론가 마르타 쿠를랏과의 인터뷰에서 “검은색과 흰색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2년 서울 중구의 한 극장 앞에서 시민들이 상영 중인 영화 <피에타>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2012년 서울 중구의 한 극장 앞에서 시민들이 상영 중인 영화 <피에타>의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김기덕은 선과 악, 순진과 타락이 공존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결국 그것은 둘 사이의 경계와 모순, 간극을 넘어 수평적 경지로 나아간다는 것을 증명해 내려고 애쓴다. 그는 “오랜 세월 무형의 형태들의 일부를 소위 악이라 설정하고 그들을 피해 극복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것은 알고 보면 지속적인 악이 아님을 깨달았고 나의 모습 속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저서 <김기덕이 김기덕을 쓰다>에서 말하기도 했다.

영화 <나쁜 남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한기와 선화는 재회 후 트럭을 개조해 침대를 만들고 또다시 매춘의 길로 떠난다. 끝까지 철저히 인간적인 양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나쁜 영화’로 끝나며, 한기 역시 끝까지 ‘나쁜 남자’로 남는다.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창녀가 그 남자를 용서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 대한 뜨거운 논란은 계속되었다. 김기덕에 대한 논쟁 중 <나쁜 남자>에 대한 논쟁을 다룬 논문과 평론이 가장 많다. 백상빈, 정과리의 <국문학자와 정신과 의사가 ‘나쁜 남자’를 논하다> (<씨네 21>, 338호), 주유신의 논문 <김기덕의 영화세계, ‘사마리아인의 선행’으로 위장한 성적 테러리즘>, 김소연의 논문 <김기덕 혹은 (불)가능한 사랑의 연대기 - 욕망과 사랑에 대한 라캉의 관점을 통한 접근> 등 셀 수 없이 많다.

도시 안에서 아무리 올바르게 살려고 경계해도 나도 모르게 나쁜 인간으로 살아가는 남자 - 그는 한 여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바꾼다. 김기덕은 그러한 삶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폭력성과 종교적 구원이 두 가지 중요한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피에타>는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더 종교적 질문에 닿아 있다. 김기덕은 종교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여성이 구원의 주체로 등장하는 영화 <사마리아>와 마찬가지로 <피에타>에서도 종교가 아닌 ‘여성’을 구원의 주체로 인식한다. 모성을 획득한 강도는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변한다. 강도를 참회하게 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모성’인 것이다.

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복수하기 위해서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를 찾아 나선 목적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강도는 그들을 만나면서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기 시작하고 자비를 바라며 구원을 갈구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피에타>가 거래하는 것은 ‘엄마’라는 자리를 놓고 자본과 벌이는 기괴하고 슬픈 부등가 교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시간을 역순행하며,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가 피해자들로 하여금 분노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분노를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다. 강도가 ‘악마’를 벗고 속죄의 순례를 떠나는 것은 ‘모성’만이 구원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동안 김기덕의 영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밑바닥까지 주시하면서 우리가 공범임을 자각할 것을 요구해 왔다면, <피에타>는 거기서 자비와 구원의 문제로까지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점에서 김기덕 영화의 주제가 확장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자기구원은 용서 받은 자만이 얻을 수 있다. 가해자는 속죄를 통해 가해자에게 용서 받아야만 신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강도는 목숨을 바쳐서 속죄하고자 한다. 강도가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자신의 목숨을 재물로 바치는 속죄 방식은 피해자에게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으며,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 못한 속죄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도가 만들어 낸 유혈의 질주를 보여주며 ‘자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가 <피에타>이다.

정리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결국 무자비한 유혈의 질주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하에서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으며 자비를 베풀 수도 없기에, 인간은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인 모성, 즉 자궁회귀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한다. 그러나 강도의 자궁회귀는 실패한다. 속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지만 그것 또한 실패한다. 결국 자궁회귀의 욕망과 속죄를 통해 구원 받고자 하는 욕망 모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무자비함을 목도하게 하는 영화가 바로 <피에타>이다.

불편한 영화도 필요하다
사실 김기덕이 말하고자 하는 ‘불편한 진실’은 이미 우리 삶의 모든 부위에 포진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불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약자들은 끝내 무자비함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무엇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김기덕은 이토록 지독한 결말을 택했다. 우리는 확인하기 두렵더라도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만 한다고 김기덕은 끝내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색과 흰색은 같은 것이다”라는 마치 선문답 같은 김기덕의 선언은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화살과 같은 화두와 다름없다. 검은 색을 알고자 한다면 흰색을 알아야 하고 흰 색을 알고자 한다면 검은색을 알아야 한다. 결국 그것은 둘 사이의 경계와 모순, 간극을 넘어 수평적 경지로 나아간다.

김기덕이 던지는 ‘불편한 진실’의 실체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의 잔인한 실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약자들은 무자비함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구원 받을 길도 없다. 비록 확인하기가 끔찍한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우리는 외면하지 말고 마주해야만 한다. 이것이 김기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고, 불편해도 마주해야 할 진실이라고, 김기덕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세계가 인정한 예술영화 감독이 정말 해외로 ‘망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제작비에 비해 개봉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내 영화는 개봉하면 안 되는 것 같다. 불법다운로드라도 봐주시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뼈있는 농담에서 한국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야 한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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