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식당 ‘2인 상차림’ 같은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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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형 자본만이 강제되는 풍조, 연계형 자본이 배제되는 풍조는 저 멀리 제주 바닷가의 한적한 식당에서부터 총선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달아 가는 여의도 정치 무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 범위에 걸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지난 연말 한 달 동안 제주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요즘 도시인들의 로망 중 하나라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직접 경험해 본 것이다. 굽이굽이 올레길을 걷고, 비탈진 오름을 오르고,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를 거닐며 자연의 품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힐링의 시간이었고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 홀로 여행자의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밥 먹는 일이다. 제주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대표적인 음식들 중 상당수가 식당에서 2인 기준 상차림으로 팔고 있었다. 매콤 달콤한 제주산 갈치조림, 기름지고 쫄깃한 토종 흑돼지 구이, 싱싱한 활어회 정식 같은 음식들은 나 홀로 여행자의 식탁에 놓이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2인분을 거뜬히 먹어치울 수 있는 대식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리고 2인분 가격을 가뿐히 지불할 수 있는 대범함을 갖지 않고서야 나 홀로 여행자는 감히 이런 음식들을 탐할 수 없었다.

연계형 자본이 배제되고 결속형 자본만이 강제되는 풍조는 제주의 시골식당에서부터 여의도 정치 무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 범위에 걸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사진은 2015년 12월 30일, 서울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4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신당 창당 추진 중인 안철수 의원. / 강윤중 기자

연계형 자본이 배제되고 결속형 자본만이 강제되는 풍조는 제주의 시골식당에서부터 여의도 정치 무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 범위에 걸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사진은 2015년 12월 30일, 서울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4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신당 창당 추진 중인 안철수 의원. / 강윤중 기자

사회변화상 외면하는 ‘2인 기준 상차림’
식당에서 2인 상차림을 기본 단위로 하는 메뉴는 제주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널려 있다. 언제부터 이런 시스템이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외국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외식문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런 2인 기준 상차림이 개인에게는 식사의 접근권과 선택권을 제약하는 폭력이며, 동시에 변화된 사회 구조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나 홀로 여행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1인가구의 비율은 급증하고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의 저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전체 가구 수 중 1인가구의 비율은 2012년에 이미 4분의 1에 해당하는 25.3%에 이르렀으며, 앞으로 10년 후쯤에는 3분의 1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편에서는 미혼 혹은 비혼의 독립한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에 따른 독거노인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이니 이런 전망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기러기 아빠나 직장 등의 상황으로 인한 별거 가구, 또 날로 증가하는 이혼 가구까지 감안하면 혼자 사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2인 기준 상차림은 이렇게 늘어가는 1인가구 구성원들에게 좀처럼 식탁을 내어주지 않는다. 명백한 사회 변화상을 외면하고 여전히 2인 기준 상차림만을 고집하는 식당이란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우리 사회의 축소된 자화상 같아 씁쓸하다.

2인 기준 상차림은 2인 단위로 식당을 찾은 고객에게도 폭력적이긴 매한가지이다. 각자의 취향과 개성이 엄연히 있는데 왜 그들은 같은 음식을 둘이서 나눠 먹어야 한단 말인가? 왜 두 사람은 매콤달콤한 갈치조림과 구수한 갈치구이를 각각 1인분씩 시켜 함께 맛볼 수 없단 말인가? 개인의 다양성보다 집단의 동질성을 더 중시하던 오랜 습성은 이렇게 작은 식탁 위에서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R. Putnam)은 낯선 사람들 간의 유대나 신뢰, 호혜성을 이끌어내는 규범을 ‘사회적 자본’이란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사회적 자본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이 나와 동질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는 ‘결속형(bonding) 자본’과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다양한 사람들을 망라해서 형성되는 ‘연계형(bridging) 자본’으로 다시 구분된다. 내부지향적인 결속형 자본이 집단의 응집력을 부여하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외부지향적인 연계형 자본은 서로 다른 개인들 사이의 협력적 관계를 촉진하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사회란 당연히 이들 두 가지 사회적 자본이 균형 있게 작동하는 사회이다.

결속형 자본으로 더욱 압축 뺄셈의 정치
나 홀로 여행자나 1인가구 구성원을 배제시키는 2인 기준 상차림은 연계형 자본이 작동될 틈을 거부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함께 온 두 명의 고객에게 한 가지 메뉴만을 강제하는 2인 기준 상차림은 결속형 자본만을 여전히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당장 식당 밖으로 나가면 우리 사회의 보다 더 중요한 영역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총선 정국으로 돌입한 지금의 정치판 돌아가는 모습만 해도 그렇다. 집권당인 새누리당 사람들은 ‘친박’도 모자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진실한 사람인 ‘진박’임을 입증하기 위한 줄서기에 골몰하고 있다. 소속 정당이라는 결속형 자본은 다시 친박이란 결속형 자본으로 세분화되고 친박은 다시 진박으로 압축된다. 결속형 자본으로의 압축이 거듭될수록 배제되는 사람들은 늘어가는 뺄셈의 정치 원리가 작동한다.

야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야권 분열이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문재인 대표를 흔드는 비주류 세력들의 탈당을 내심 후련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여기서도 결속형 자본은 더욱 압축되고 그만큼 연계형 자본이 작동할 여지는 줄어든다. 안철수 진영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몇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실체는 알 길 없는 안철수의 ‘새정치’는 아무래도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세력이 아니라 탈당파 중심의 새로운 정당으로 귀결되고 말 모양이다.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세력이 연계형 자본을 통해서 구현 가능한 것이라면 탈당파 중심의 새로운 정당은 또 하나의 결속형 자본이 작동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결국 제대로 새로운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등 소수 정당들은 유권자들 입장에서 볼 때 거의 존재감이 미약하다. 마치 나 홀로 여행자나 1인 가구 구성원들에게 2인 기준 상차림이 주어지지 않듯이, 이들 소수 정당들이 내년 총선에서 약진할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 정치에서 접착제는 갈수록 강력해지지만 이질적인 정치 세력들 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 줄 윤활유가 작동할 틈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결속형 자본만이 강제되는 풍조, 연계형 자본이 배제되는 풍조는 저 멀리 제주 바닷가의 한적한 식당에서부터 총선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달아 가는 여의도 정치 무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전 범위에 걸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사회는 더욱 개인 단위로 쪼개져 가고 그럴수록 연계형 자본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데, 우리 정치는 여전히 2인 기준 상차림만을 고집하는 오래된 식당처럼 운영되고 있다. 그러니 답답한 것은 고객 즉 국민들이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IT디자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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