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언니들-자갈치시장 아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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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아지매들 인터뷰하러 서울서 왔는데, 아지매들이 응해주질 않아요.”

의상도 외모도 눈에 띄는 젊은 남자 사장 옆에 가서 하소연을 했다. 입담 좋은 그의 문어 좌판 앞에는 이른 아침 자갈치시장을 찾은 아주머니들이 몰려 있었다.

“그냥 입이 열립니꺼. 평생 자갈치에서 장사한 할매들, 사연이 얼마나 많은데. 막걸리 한 병 사들고 붕어빵도 한 깨씩 드리면서 해보이소. 끝나면 꼭 오이소. 마산 함안집!”

2016년, 병신년 첫 일요일 아침. 자갈치시장은 분주했다. 당당하게 ‘사 가서 맛보이소!’를 외치는 것부터가 ‘맛보고 사가세요’ 친절하게 권하는 서울과 달랐다. 생선 좌판 사이에 곧잘 눈에 띄는 ‘묵집’. 도토리묵 비슷하지만 청록색이었다. ‘꼼장어묵’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꼼장어 내장과 잔뼈가 잔뜩 박혀 있다. ‘꼼장어묵’ 집마다 ‘고래고기’를 팔았다. “진짜 고래예요?” 물으니 아주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꼼장어묵을 썰며 호통을 쳤다.

“속고만 살았나? ‘고래고기’라꼬 써 있다 아이가! 궁금하면 먹어 보든가!”

상인들은 모두 목소리가 크다. ‘왜 나한테 화를 내는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짜고 진득한 정이 묻은 ‘자갈치의 화법’이다. 막걸리 두 통, 붕어빵 5000원어치를 사들고 수협 공판장 앞 좌판을 돌며 자갈치 아지매들에게 나누어드리고, 좌판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주인장과 손님의 흥정이 끝나면 비닐봉지 빼드리기, 손님과 흥정 중엔 ‘우와 맛있겠다!’, ‘진짜 싸다!’ ‘니 쫌 비키라’며 면박을 주던 아지매들은 ‘니 어디서 왔노’, ‘니도 한 잔 할래?’ 말을 걸어 왔다.

새해 첫 인터뷰는 멋진 여자들을 만나고 싶었다. 1순위는 자갈치 아지매들. 자갈치시장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1순위로 그녀들이 뽑힌 이유를 공감할 것이다. 좌판 고무대야에 담긴 생선이 한 가정의 목숨이었던, 생선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자갈치로 오게 된 사연 또한 다양한 자갈치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 그녀들의 이야기.

한맹조(73). 아침 11시, 그는 술에 취해서 얼굴이 붉었다. 두 번째 막걸리 병을 따려던 참이다. 일요일이라 공판장이 문을 닫았기에, 어제 팔다 남은 생선을 들고 나와서 길에 좌판을 펼쳤다.

자갈치시장 권현옥 아지매는 나이 서른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딸을 키우며 자갈치시장에서 35년을 보냈다. / 박상미

자갈치시장 권현옥 아지매는 나이 서른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딸을 키우며 자갈치시장에서 35년을 보냈다. / 박상미

그만 드세요. 물건 다 팔고 드세요.
“한 병밖에 안 묵었다. 인자 숭카 놓고(숨겨두고) 묵을게.”

검은 비닐봉지 안에 막걸리 병을 집어넣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여기서 장사 45년 했다. 술에 취해도 여기 아지매들이 내를 잘 챙기준다 아이가. 내는 22살부터 장사했다. 나는 술 묵는다고 돈 못 벌었다. 그래도 괜찮다. 웃으면서 살믄 되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세요.
“사연 없는 무덤 있나. 내 큰딸이 죽었거든… 49살에… 고생만 하다가 죽었는데, 내가 아무것도 못해 줬거든. 그때부터 매일 술을 먹어야 내가 산다.”

공판장 23번 ‘연지 아지매’로 불리는 그는 딸 이야기를 오래도록 했다. 손님이 와도 흥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장어, 가오리, 상어, 오징어 사이소!” 사람들이 지나가면 내가 대신 외쳐야 했다. 손님이 오면 주변 아지매들이 대신 흥정도 해주고, 돈도 대신 받아 줬다.

처음에 어떻게 장사 시작하셨어요? 45년이면 돈 많이 벌었겠어요.
“4남매 키우면서 다 까먹었지. 인자는 돈 쓸 데 없으니까 술도 먹고 춤도 추고 내가 까분다 아이가.(웃음) 진주 진성면이 내 고향이다. 진주서 결혼해서 신랑하고 농사 지었재. 돈도 많이 모아서 아이들 호강시키고 좋은 학교 보낼라꼬 부산 왔지. 그런데 우리 영감이 사기를 당해서 돈 다 잃었다…. 내가 죽을라고 쥐약을 네 번이나 샀는데, 밤새 들고 앉아 있다가 날이 새는 바람에 못 먹었다 아이가!(웃음) 4남매 키울라카이 내가 자갈치까지 왔다. 죽지 못해 산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살고 싶어서 발버둥친 기라. 거짓말 맹키로 세월이 갔네….”

연지 아지매가 오른쪽 팔뚝으로 붉어진 눈을 비볐다.

“오징어 얼만교?” 중년부부가 와서 묻는다. “여섯 마리 만원!” 연지 아지매가 막걸리를 벌컥 들이키며 말하자 “5마리 5000원 하입시더.” 아저씨가 흥정을 했고, “니가 바다 가서 잡아라! 그렇게 팔면 밑진다!” 연지 할매가 호통을 쳤다. 호통을 치면서도 연지 아지매는 이미 오징어 다섯 마리를 봉지에 담고 있다. 받아 든 돈은 5000원.

“또 사러 올게예. 할매 오늘도 많이 드셨네.” 흥정에 성공한 부부에게 봉지를 건네며 “빨리 갖고 가라. 나는 정말로 바보야(웃음)” 연지 아지매가 붉은 얼굴로 웃는다. “정신 챙기라!” 옆 좌판 김순이 아지매가 화를 냈고, “할마시, 간섭 고마해라.” 연지 아지매가 또 큰소리로 웃는다.

오후 1시. 밥 배달이 왔다. 반찬은 거의 먹지 않고 밥만 빨리 드셨다. 한 상 가격은 6000원.

반찬은 왜 안 드세요.
“내가 빨리 먹고 옆에 아지매들 묵으라고 반찬 돌린다 아이가. 장사하믄서 빨리 묵는 버릇이 들어 반찬은 잘 안 넘어 간다. 니도 한 술 먹어라.”

자갈치시장에서 ‘구루마 할배’라 부르는 노인은 6·25 때 이곳에 들어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 박상미

자갈치시장에서 ‘구루마 할배’라 부르는 노인은 6·25 때 이곳에 들어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 박상미

6000원이면 좀 비싸네요.
“6000원이 뭐가 비싸노. 내 묵으라고 따신 밥 차려서 코앞에 갔다 주는데, 얼매나 고맙노.”

연지 아지매는 또 웃는다. “밥 묵고 해라!” 밥 쟁반을 순이 아지매한테 갖다주라고 하더니 그는 일어나서 춤을 추며 노래 한 자락을 뽑는다.

밥 쟁반을 들고 김순이 아지매(84) 좌판으로 옮겨갔다. 자갈치 아지매 경력 50년. 아지매들의 큰언니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연지 아지매가 손님과의 흥정에서 손해를 보지 않도록 챙기는 것도 순이 아지매의 몫이다. 좌판에 나온 아지매들은 부산시 수협 자갈치공판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과 자갈치시장 신축건물에 가게를 낸 사람,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인 사람으로 나뉜다. 순이 아지매의 해동상회는 시장 신축건물 안에 있다. 일요일에는 전날 팔다가 남은 물건들을 팔기 위해 길거리 좌판으로 나온다.

“여기 할매들이 사연이 많다. 연지는 만날 술을 먹어도 억수로 착한 사람이다. 나는 별 고생 안 한 편이고 저기 조씨 할매하고 권현옥이한테 가 보래이. 자갈치 아지매 사연 다 나온다. 같은 좌판에서 장사해도 가족이 많으면 돈 못 모았고, 가족 없으면 더 모았고… 할배들도 다 일찍 죽었능기라. 죽은 이유도 다 비슷해. 조씨 할매한테 가봐. 손주 어느 대학 댕기는지 꼭 물어 보래이!”

다들 조씨 아지매라고 부르지만 본명은 박유연(76).

“영감 죽은 지 30년 다 됐어도, 우리 영감이 조씨니까 나는 영원히 조씨 할매지.”

좌판 할머니들 중에 가장 목소리가 작은 유연 아지매는 좌판 구석에서 나누어 먹을 대구탕을 끓이고 있었다.

순이 아지매가요, 조씨 아지매 손주 어느 대학 다니는지 꼭 물어보라셨어요.
“큰 손주는 서울대학교! 작은 손주는 중앙대학교! 손녀 하나는 이번에 한국외국어대학교 들어갔다.(웃음)”

‘우와!’ 박수를 짝짝 치며 ‘참 대단하다! 아지매 정말 성공하신 분이다’를 외쳤더니 유연 아지매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입을 가리고 웃으신다.

“그래도 벌어놓은 기 없다. 아들 둘, 대학 시키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장가 보내고, 손주들 학비 보태고… 인자 힘들어서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둘라고. 수협 공판장이 새 건물 지어서 내년에 옮기는데, 거기까지 따라 가겠나…. 잘 벌릴 때는 5만원도 벌고, 안 벌릴 때는 3만원도 벌고…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벌었으니까 할매가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아이가.”

노래하는 나운도, 민요가수 명지은 커플은 자갈치시장 또 하나의 명물이다.(사진 왼쪽) 꼼장어와 문어 숙회를 파는 배상묵 사장은 어머니께 좌판을 물려받은 자갈치 2세다.(사진 오른쪽) / 박상미

노래하는 나운도, 민요가수 명지은 커플은 자갈치시장 또 하나의 명물이다.(사진 왼쪽) 꼼장어와 문어 숙회를 파는 배상묵 사장은 어머니께 좌판을 물려받은 자갈치 2세다.(사진 오른쪽) / 박상미

여기서 몇 년 장사하셨어요.
“40년 넘었다. 영감이 잘 벌면 누가 장사하러 나오겠노…. 내가 미용사 하느라고 결혼이 늦었다. 24살에 김해 주촌에서 할배 만나서 결혼했지. 할배가 부산에서 직장 댕겼는데, 우짜다가 할배가 돈을 다 까먹었어. 32살 때, 내가 돈 벌려고 나왔지.”

영감님은 같이 장사 안 하셨어요.
“할배들은 술이나 먹고, 조수 역할이나 가끔 하고… 다 그래, 여기 다 그래. 영감들은 다 술병으로 일찍 죽고… 우리 시절이 그랬어. 그래도 자갈치가 고맙다. 아들들 다 키우고…. 그만둔다 생각하면 섭섭하지. 그래도 인자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내는 성공한 것도 아니재. 옆에 권현옥이는 배를 샀다 아이가. 현옥이한테 배 산 얘기 들어봐!”

패션이 남달랐다. 꽃분홍 바지, 노란 점퍼. 화사하게 화장도 한 권현옥 아지매(65). 고등어, 새우, 아구, 삼치, 납새미. 자기 배에서 일꾼들이 잡은 생선을 경매에 부치고 남은 생선은 직접 좌판에서 판다고 했다. 배 산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랐다.

“말도 마라. 3억8000만원 모으느라고 고생한 세월, 말로 다 못한다.”

진짜 부자네요. 다른 아지매들은 돈 많이 못 모았다고 하시던데, 비결이 뭐예요.
“굶기. 혼자 사니까 없어서도 못 먹고, 나중에는 있어도 먹기 싫어서 못 먹고. 서른에 신랑 간경화로 죽고, 딸 하나 데리고 산 과부 인생이 오죽했겠나. 인자는 한 달에 500만원 벌 때도 있다. 그래도 여기 나와야 안 외롭고…. 난 앞으로도 여기서 늙을끼다.”

현옥 아지매는 내가 원래 울보라서 그렇다며, 계속 눈물을 훔쳤다.

미인이시고 돈도 많이 모았는데, 왜 재혼 안 하셨어요.
“야야, 결혼을 우째하노. 애 딸린 과부하고는 아무도 안 할라카드라… 팔짜 쎄다고. 딸하고 먹고 살라카이 자갈치까지 흘러왔다. 생선 한 다라이 사서 머리에 이고 나오면, ‘사이소!’ 말 한마디가 안 나오는기라. 끙끙 앓다 보면, 경비들이 못 팔게 뺏아가고… 울고불고 매달리고… 옛날엔 그랬다. 경비들 들으면 지랄한다. 작게 말하자.(웃음)”

현옥 아지매는 장사 수완도 좋았다. 눈물 훔치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금세 웃으며 “이모! 이거 지금 막 죽은 기다! 억수로 싱싱해!”를 외쳤다. 흥정이 성사되면 ‘니는 인터뷰해라’며 옆 좌판 아주머니들이 대신 돈 받고 생선 배 가르는 일을 자동으로 척척 해주었다.

“야들이 다 착하고, 고생 엄청시리 했대이. 동병상련이라. 할배들은 다 술병으로 죽고 없다. 우리는 다 혼자 산다.(웃음)”

그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나무 생선상자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지나갔다. 아지매들이 “언능 저 구루마 할배 따라가서 얘기 들어라! 어서!”라고 외쳤다. 이가 하나도 없었으나,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의 할아버지. 성함은 묻지 않았다.

“상자 한 개에 50원, 100개 모으면 만원입니더. 한 사흘 모으면 한 구루마 모읍니더.”

그럼 사흘에 5000원 버는 거예요.
“멸치 박스도 모아서 파니까예, 사흘에 만원은 법니더. 그래도 살기 진짜 좋아졌어예. 6·25 때 자갈치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지게에 짊어지고 100리씩 걸어 댕기느라 얼매나 힘들었는데…. 지금은 먹고 살 만합니더.(웃음)”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께 드리는 사례비라며 만원을 손에 쥐어드렸다. 오후 3시. 오늘은 퇴근해도 되겠다며 일곱 살 소년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아지매 인터뷰 비법을 알려주며, 끝나면 다시 오라던 마산 함안집, 문어 아저씨를 찾아가는 길. “한 다라이 만원! 만원!”을 외치는 연세 높은 아지매를 만났다.

“내 이름은 묻지 마라. 6·25 이전부터 자갈치서 장사 했으니까 오래 했재? 영감 죽고 29살 때 알라(애기) 업고 나와서 사남매 키우느라 자갈치서 한평생이 다 갔네. 진짜 갔네…. 다라이에 생선 담아서 이고, 쫓기 댕기면서 팔았지. 지금은 구역 정비가 잘돼서 앉아서 팔지. 옛날에는 다라이 이고 댕기면서 팔다가 경비한테 다라이 뺏기고…. 경비가 차에 싣고 가서 바다에 쏟아버린다. 그날은 다 잃고 빈손으로 알라만 업고 울재…. 돈만 잃나… 마음은… 홀딱 벗고 알라만 업고 서 있는 기분인기라…. 그 날은 쌀도 못 사고, 돈 빌릴 데도 없고. 다라이 안 뺏긴 사람한테 가서 ‘생선 몇 마리 빌려 주면 팔아서 돈 드릴게예’ 하고 얻지. 앉아서 그거 팔아서 집에 겨우 가는기라…. 그래도 그때는 장사가 잘 됐다. 항만청에서 감시 나오면 남의 창고에 다라이 들고 기어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다시 나와서 팔고…. 이제는 이 자리가 내 자리다. 나는 세금도 안 낸다. 근데 요새 장사가 안돼. 요즘이 먹고 살기 제일 어렵대이….”

영감님은 뭐하셨어요? 돈은 좀 버셨어요.
“여기 할매들 다 물어봐라. 할배들은 다 놈팽이! 사연 다 비슷해(웃음). 돈? 야야, 안 벌리는데 우짜노. 돈은 쫓아간다고 안 되는기라. 돈이 내를 따라와야지.”

“인터뷰 잘했능교?”

오후 4시. 인기 많은 문어 아저씨 가게는 여전히 손님들로 붐볐다. 어머니께 물려받은 좌판에서 장사를 하는 자갈치 2세 배상묵 사장(45)

가족이 같이 장사하나요?
“저는 꼼장어, 문어 숙회가 전문이고예, 누나하고 같이합니더. 어무이가 돌아가실 때까지 47년 장사 하셨지예. 내 문어 맛보여 줄게. 단맛이 난다니까”

파셔야죠. 이 비싼 걸.
“이건 맛보기용. 아지매들은 문어가 비싸니까 맛보여 주기가 힘들거든. 근데 나는 젊으니까 맛도 막 보여드리고.(웃음) 여기는 다 과거가 있는 사람들입니더. 나도 다른 장사하다가 경기가 어려우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예. 젊은 사람들도 꽤 보일 깁니더. 우리가 처음부터 어무이 대를 이어서 자갈치에서 노점을 해야지, 결심한 게 아니고. 전에는 레스토랑도 하고, 술집도 하고…. 너무 힘들었어예. 지금은 마음이 진짜 편합니다. 우리 자리니까 가게 세 안 나가고, 내가 노력한 만큼 벌 수 있으니까예. 워낙 오래전부터 항만 부지를 무단점거해서 장사를 해왔기 때문에 여기는 자릿세가 없어예. 경남지역은 문어를 제수용으로 쓰기 때문에 비싸도 잘 팔립니더. 문어는 삶는 동안 맛이 두 번 변하거든예. 처음에 딱딱해졌다가 살짝 부드러워집니다. 쪼매 더 삶으면 딱딱해져! 그 다음에 다시 부드러워져! 자 드셔 보이소. 이기 두 번 부드러워 진 맛입니더. 문어 숙회! 5000원 뿌라스(플러스) 해서 삶아가야 진짜 맛있는 문어 숙회를 먹는기라! 전문가의 손길!(웃음)”

일요일 오후 5시. 자갈치 시장은 파장 분위기였다. 노래하는 나운도, 민요가수 명지은 커플이 북을 치며 자갈치 시장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어디든 찾아가서 공연합니다. 돈 벌면 자선공연하러 다닙니다.’ 북을 실은 리어카에 매달린 플래카드의 글씨가 석양에 반짝거렸다.

아지매들과 나눠 먹으려고 엿을 한 팩 샀다. 연지 아지매는 숨겨두었던 막걸리 한 병을 다 마신 뒤였고, 유연 아지매와 순이 아지매는 판을 접고 일찍 퇴근하고 안 계셨다. 전화번호를 받아 놓길 잘했다. 멋진 언니들, 자갈치시장의 인생 철학자들. 장사 쉬는 날, 술 한 잔 사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다시 돌아와야 할 자갈치시장.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지 아지매가 ‘백 세 인생’을 부르며 좌판을 접느라 분주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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