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먹고 나팔 불어 주는 먹물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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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는 ‘편의적인 침묵’으로 위안을 삼거나, 돈을 먹고 기득권의 나팔을 불어 주는 ‘생계형 대변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나마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조차 많지 않다.

이번 칼럼으로 독자들과 작별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무엇을 써야 할지 머리가 멍하기도 하고, 또 쓰고 싶은 말이 넘쳐나기도 한다. 붓방아 끝에 횡설수설 주제를 잡아 보았는데 ‘장고 끝에 악수’ 꼴이 되지나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섣부른 한 줌의 지식을 자랑하다가
한국 사회는 분명 퇴보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을 때 젊은이들은 몸에 태극기를 두르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불과 13년이 흐른 지금 이 땅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조리의 도가니가 되고 있다.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많고, 뜻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잠시 잊고 살았던 단어들도 다시 귀에 들린다. 가난. 빽. 독재.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섣부른 한 줌의 지식을 자랑하다가 역사를 그르친 경우도 있고, 노골적으로 권력의 참호 속으로 피신했다가 깨어난 포스처럼 부활한 다크 사이드를 제대로 규율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청년단체 청년공감 회원들이 지난 10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청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불만 스테이지’를 열며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청년단체 청년공감 회원들이 지난 10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청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청년불만 스테이지’를 열며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섣부른 한 줌의 지식이 역사를 잘못 이끈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부득이 생존해 있는 선배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개인적 감정은 없다.) 김영삼 정부 때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몇몇 경제학자들이 교육에도 경제학의 시장원리를 도입해 효율성(교육 용어로는 수월성)을 제고하자는 취지로 개혁의 방향을 잡았다. 경쟁이 있으면 시장 성과가 높아지고 소비자 후생이 증가한다고 배웠기에 그들은 ‘대학 설립 준칙주의’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일정한 설립요건만 갖추면 누구든지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허물어 대학 간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첫째, 대학은 경쟁의 원동력이 되는 이윤 동기에 의해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 설립된 대학은 대부분 진리 탐구라는 심오한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 손쉬운 학생 장사에 몰두했다. 이윤 동기는 존재했으나 그것이 대학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오히려 섣부른 이윤 동기의 확산은 기존 대학들마저 진리 탐구라는 최소한의 립서비스를 던져버리고 노골적인 비용절감에 편승하도록 하는 악영향까지 미쳤다.

그들이 간과한 두 번째 측면은 경쟁에는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이었다. 경제학 교과서에 경쟁의 혜택은 잘 나와 있지만 경쟁의 비용은 잘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경제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종종 경쟁의 성과를 과대평가하는 편견을 가지기 쉽다. 잘 드러나지 않는 경쟁의 비용 중 하나가 퇴출비용(exit cost)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기업은 그 산업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이것이 맨입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퇴출비용이 큰 산업의 경우 진입을 적당한 수준에서 통제하고 그 대신 규제를 통해 성과를 조율한다. 금융산업이 그 대표적 예다. 교육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거기다 섣부른 준칙주의를 적용했으니 그 결과는 불문가지다. 지금 대학 구조조정이 당면 현안인 이유가 노령화에 따른 취학인구 감소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정책이 핵심을 찌르지 못하니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런 경우 다크 사이드는 잠시 참호 속으로 피신해서 ‘지나가는 소나기’를 피한 후 때가 되면 다시 고개를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예가 어디 한둘이겠는가만은 이왕 예를 교육으로 잡았으니 그쪽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교육개혁의 핵심은 사학재단의 개혁이다. 이들이 고등교육의 공급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이 겉멋에 홀려 있는 동안 문제 해결의 진정한 본질인 사학재단에 대한 개혁은 한 걸음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학교는 여전히 설립자나 그 후손의 사유재산이고, 이 재산은 매매의 대상이고, 이 권리는 언론과 관료, 법원이 철석같이 단단하게 보호해주고 있다. 설립자는 그 대가로 이들에게 이사 자리 하나씩 나누어주거나 그 아들 딸을 교수로 채용해주면 그만이었다.

‘대학 공공성 실현 대학생 네트워크 모두의 대학’ 회원들이 지난 10월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부의 대학 구조개혁 평가 결과에 대해 비판하고, 교육부에 공개질의서를 보내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회원들은 고등교육 재정을 늘리고, 사학재단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김영민 기자

‘대학 공공성 실현 대학생 네트워크 모두의 대학’ 회원들이 지난 10월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부의 대학 구조개혁 평가 결과에 대해 비판하고, 교육부에 공개질의서를 보내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회원들은 고등교육 재정을 늘리고, 사학재단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김영민 기자

우리 사회 퇴보에 혁혁한 공을 세우다
물론 ‘개혁의 가랑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사립학교법을 개정해서 이사회에 의무적으로 개방이사를 두도록 했지만 지금 개방이사를 두고 있는 사학재단은 거의 없다. 사학재단들은 불편한 개방이사를 두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나머지 이사들만 자기 맘에 맞게 선임하는 눈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눈가림조차 불법이다. 사립학교법은 이사회에 결원이 생기면 개방이사부터 선임토록 했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인 교육부는 참여정부 때까지는 눈을 부라리며 이 조항을 들이댔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먼 산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유명 사립대학들은 사립학교법을 위반하고 있다. 다크 사이드는 완벽하게 깨어난 것이다. 지식인은 침묵했다. 그만큼 역사는 퇴보했다.

얄팍한 지식과 뿌리 깊은 기득권의 어색한 만남이 역사의 진전을 막고 역류시키는 현상은 비단 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에도, 공무원 사회에도, 법원에도 존재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정치권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투명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검증받고, 선거에서 떨어지면 처참한 ‘지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얄팍한 지식, 돈 먹고 나팔 불어주는 지식이 뿌리 깊은 기득권의 하녀 노릇을 하면서 우리 사회의 퇴보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 거대한 부조리와 비상식의 기득권 체제를 보면서 망연자실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어디서부터가 되었건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처럼 먹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는 ‘편의적인 침묵’으로 위안을 삼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돈을 먹고 기득권의 나팔을 불어주는 ‘생계형 대변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나마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조차 많지 않다.

사회는 그 구성원의 노력만큼 발전한다.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 되어가는 이유는 사회의 발전을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문제를 찾아내고 얄팍하더라도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고수가 있어서 얄팍한 지식을 교통정리해주면 더욱 좋겠지만 고수가 없다고 한탄만 해서는 안 된다.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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