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업계 대표주자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 “슬픈 장례문화 아름다운 이별로 바꿔야 합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1월은 ‘천사의 달’이라고 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뇌졸중·심근경색 등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어르신들이 유난히 많고, ‘11월의 저주’라고 불릴 만큼 유명연예인들의 자살이나 사고가 많은 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창졸간에 떠난 부모님이나 가족의 상을 치르면서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는 이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 등의 도움으로 결혼식처럼 패키지로 장례가 치러진다. 국내 상조업계의 대표주자인 프리드라이프의 박헌준 회장을 만나 ‘아름다운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2002년에 처음 상조회사를 만드셨는데, 13년 사이에 상조업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13년 사이에 ‘천지개벽’을 했다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된 그 무렵만 해도 장례문화는 어둡고 슬프고, 업체들이나 관계자들의 횡포로 얼룩진, 피하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5000만 국민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 자식에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은 일,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장례업입니다. 우리 인륜지대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면서도 제일 음지에 있었죠. 저는 우리 장례문화가 낙후된 것은 지도자들, 특히 정치인들의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표 되고 돈 되는 일에는 나타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장례식장이나 화장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안 보이죠. 교육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월급 많고 폼나는 직업만 가지라고 하지 궂은일에 나서라고 교육시킵니까. 사실 언론이 가장 문제입니다. 그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 장례문화나 장례업에 관심을 갖고 주목했습니까.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SKY 대학병원, 삼성·현대 등 대기업 소속 병원들이 다 병을 고치기보다는 장례식장 수입에 열을 올리는데도 왜 비판하지 않습니까. 모두 애써 외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상조회사들이 생기면서 문제 있는 회사도 더러 있지만 그래도 장례가 아름다운 이별로 승화되도록 노력하고 있고, 장례지도사 등이 전문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못 배우고 힘 없는 이들이 음지에서 하던 천한 직업으로 여겨지던 일이 그나마 전문직이 되고, 상주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관행들도 정리되었습니다.”

상조업에 뛰어든 계기가 있나요.
“사실 제가 이런저런 사업으로 돈을 꽤 벌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정치·경제 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아 회의를 느껴 캐나다로 이민을 갈 예정이었습니다. 1년 동안 이민 준비를 했는데, 출국 예정 한 달 전에 친한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장에 가 보니 지하실이라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나고, 저쪽에서는 불경을 읽고 이쪽이서는 찬송가를 부르고, 구석에서는 고스톱판이 벌어지고…. OECD 가입국이라는데 장례문화는 5000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더군요. 제가 만약 죽어서 영혼이 되어 본다면 너무 슬프고 불쾌할 것 같았습니다. 제 의지로 온 세상은 아니지만 평생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품격 있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 어머니 상가에서 며칠을 지켜보며 대한민국에 아직 할 일이 있다, 5000만 국민이 다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이 일에 해답이 있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현대해상에서 보험업무를 하며 모은 돈 110억원 가운데 제 노후자금을 빼고 남은 돈으로 상조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2002년 일입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상조업계 대표주자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 “슬픈 장례문화 아름다운 이별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 큰돈을 어떻게 벌었나요.
“저는 충북 제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중학교에 합격했는데도 돈이 없어 진학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약간의 돈과 보리쌀을 훔쳐 야반도주해서 상경했죠. 그 후 신문배달, 아이스케키와 찹쌀떡 장사 등을 하며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 후 울산 현대중공업에 근무했는데, 어느 날 버스에서 제 ‘사부님’을 만났죠. 어느 남자분이 버스에서 악어지갑을 파는데 어찌나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만만하게 악어지갑을 팔던지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따라다니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했죠. 결국 그 분 도움으로 물건을 받아 버스에서 파는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너무 부끄러워 버스에 올라탈 용기도 없고 입도 떨어지지 않아 소주 3잔을 마시고야 겨우 ‘차내에 계신 신사숙녀 여러분, 아프리카에서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악어지갑입니다’란 말을 했습니다. 1970년대였는데, 당시 산업 발전으로 급속도로 세상이 바뀌었고 국민들의 욕구도 높아졌어요. 마침 정부에서 ‘독서주간’을 선포했기에 그때부터 책을 팔았어요. 백과사전, 대하소설 등을 정말 미친 듯이 팔았죠. 그 다음에는 다들 가족끼리 놀러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 무렵이라 야외텐트를 팔았는데, 회사 앞이나 공원에서 삼각텐트를 펼쳐놓고 팔아 대박이 났습니다. 그 다음엔 뭘까요. 그런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겠죠. 그래서 무비카메라로 품목을 바꿨습니다. 마침 올림포스와 제휴한 현대전자에서 카메라를 만들어서 현대계열사를 다니며 할부로 급여에서 공제할 수 있게 팔았더니 날개돋친 듯 팔리더군요. 레저붐이 불 때인데, 스포츠와 레저를 합쳐 ‘레포츠’란 용어를 만든 것도 제가 최초일 겁니다. 그런데 현대해상에서 저를 스카우트했어요. IMF가 터져 나라가 온통 나리인데 보험을 팔아보랍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을 돌아보니 국민소득이 2만 달러가 되면 보험산업이 발전하더군요. 당시 국내 보험업계는 포화상태여서 다들 말렸지만 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항상 낮은 곳에서 기초부터 시작했습니다. 보험설계사 시험을 보고 1997년 1월에 보험일을 시작해 그 해 말에 전국 연도대상을 받았어요. 남들과 달리 특화된 영업을 했고, 보험아줌마가 아닌 청년들을 채용해 신선하고 신뢰를 주는 설명을 했습니다. 처음엔 모두 저를 ‘미친놈’이라고 했는데, 아직도 그 ‘미친놈’은 진행형입니다. 좋게 미친 놈이니 다행이죠. 아무튼 보험업도 성공해서 2001년까지 받은 수당이 110억원 정도였습니다.”

현재 국내 상조업계 영업실적 1위인데, 비결이 뭔가요.
“저는 경영학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경영이 뭔지는 압니다. 경영은 이론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내 협력자를 잘 다뤄서 내 편으로 만들고 그들과 이익을 나누는 것입니다. 상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버스 행상, 책이나 보험 외판할 때 가르친 제자들을 상조업계로 끌어들였습니다. 처음 상조회사를 차리려고 상조업계를 연구해 보니 다 주먹구구식이더군요. 그래서 다른 회사들이 3년간 분할해서 받는 불입금을 저는 파격적으로 10년으로 연장해 부담을 낮췄습니다. 상조회사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대부분 서민입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없고 힘 없고 친지도 드문 이들을 위해 가족의 사망신고에서 장지까지 풀서비스를 해주고 1대 1 서비스를 해드리니 1년 동안 5만명의 회원이 모이더군요. 영업의 기본은 수당이 가장 적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업수당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고객에게 불리한 거예요. 수당이 적고 고객에게 유리한 상품이 고객을 설득하기가 쉽고, 여러 가지 상품을 파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하나만 선택해서 집중연구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런데 영업만으로 장례문화나 상조업계가 달라지던가요.
“아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례에 대한 국민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먼저 상조업계 최초로 CF광고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모델을 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할 수 없이 제가 모델로 나서서 ‘슬픔을 이용해 장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멘트의 광고를 찍어서 화제가 됐죠. 그 후 홈쇼핑업체를 설득해 홈쇼핑 판매를 시작해 또 대박이 났습니다. 대중들의 욕구를 읽은 덕분이죠. 장례는 서로서로 돕는 품앗이 문화인데, 핵가족화가 되다 보니 얼마나 막막합니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친척처럼, 이웃처럼 전문업체에서 나서서 180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무사히 치르게 한다는 개념을 알린 겁니다. 부르는 게 값인 횡포문화, 염습 등의 혐오문화, 어둡고 슬픈 문화 등 장례문화의 편견들이 깨지고 장례과정에 의전관리사들이 도와주니 이젠 많은 분들이 상조회사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상조업계 대표주자 박헌준 프리드라이프 회장 “슬픈 장례문화 아름다운 이별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수많은 상조회사들이 문을 닫고 또 비리를 저지른 곳이 많은가요.
“고객이 맡긴 돈이 자기 돈이라는 착각을 하는 이들이 많아서입니다. 갑자기 상조회사가 우후죽순 증가하다 보니 고객 불입금으로 다른 곳에 투자하거나 개인이 횡령한 업체가 있었죠. 투명하지 않게 경영을 하니 결국 피해는 소비자들이 보게 됩니다. 2010년부터는 소비자 피해보상법이 마련되어 상조회사는 고객 불입금의 50%를 예치하거나, 공제조합을 만들거나 은행 지급보증을 받는 등의 방법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연고자들끼리 운영하는 작은 규모의 회사도 있지만 최근에는 다들 정화하는 추세입니다. 우리 회사는 업계 최초로 4년 연속 200억원 규모의 흑자를 실현했고, 지난해에는 ‘2014 올해의 CEO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180여명의 장례전문인력 직영체제를 구축해 1대 1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고, 24시간 종합상황실 개설과 전국 GPS시스템 구축을 통해 고객만족과 직결되는 상조서비스 인프라를 개선한 덕분입니다.”

은행 부채도 없고 이익도 많은데, 기부에 인색하다는 지적도 있더군요.
“소문을 안 내서 그런 오해를 받습니다. 우리 회사는 과로사한 서울시 공무원, 소방공무원, 외국인 노동자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 드립니다. 세월호 때도 우리 직원들이 현장에 가서 학생 및 사망자들의 시신을 다 처리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처참한 형국에, 그 예쁜 아이들이 머리가 깨지거나 팔이 잘리는 등 처참한 사체로 변한 모습을 보면 부모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43명의 장례지도사들이 일일이 시신을 수습하고 원형 복구를 해서 그분들의 고통과 충격을 덜어드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7개월 동안 현장에 머물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지요.
“우선 내년이나 후년을 목표로 상조업체에서는 최초로 주식 상장을 할 예정입니다. 또 ‘쉴낙원’이라는 이름의 복합장례문화공간을 만들 계획으로 인천이나 김포 등에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온 가족이 와서 고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고, 멋진 커피숍에서 커피도 마시고, 세련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는 곳입니다. 공원과 공연 전시장도 갖춘 복합문화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외국의 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며 영혼이라도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가족들은 자주 찾아오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례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꼭 노래나 드라마만 한류가 되라는 법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회사를 5년 안에 청년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엔 장례만이 아니라 웨딩과 여행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연봉·복지 등을 최고 수준으로 하는 것은 물론 전문직으로서의 긍지감도 주려고 합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부모상을 당해 당혹해하던 유가족들이 ‘덕분에 편하고 무사히 고인을 보내드렸다’고 감사할 때입니다. 또 장례업에 종사하던 분들의 명칭을 바꾼 것도 보람 있는 일입니다. 정말 궂은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인데 너무 혐오스러운 용어를 쓰는 것 같아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나누는 도우미도 의전관리사, 염습을 하는 이들도 장례지도사로 바꾸고 진행을 하는 이들은 의전지도사 등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또 제가 3남매를 두었는데 큰사위도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둘째딸은 미국에 유학가서 염습 등 시신을 수습하고 메이크업하는 일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도 장례지도사로 일했는데, 회사 직원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들은 장지까지 가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까지 맡으면서 인생공부를 한다고 하니 기특할 뿐이죠.”

본인의 장례식은 어떤 모습이기를 기대합니까.
“다 웃고 즐거워하길 바랍니다.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살다가 행복한 나라로 가니 눈물이 아니라 박수와 웃음 속에 떠나고 싶어요.”

버스에 올라타 가짜 악어지갑을 팔던 청년이 이제 우리 장례문화를 바꿔가고 있다. 문화인이나 정치인들을 만나면 철학보다 표나 돈 냄새가 더 나는 경우가 많은데, 신기하게 스스로 ‘영업에 미친 놈’이라고 주장하는 장사꾼 박 회장의 이야기에서는 ‘문화’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의 세일즈 전술에 세뇌된 탓일까….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유인경이 만난 사람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