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이 ‘헬조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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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를 때 왜 하필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를 소환했을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조선’과 뭐가 다른가.

“엄마. 오늘은 친구들과 ‘소수박물관’이라는 곳을 다녀왔어요. 지금은 사라졌거나, 본래 의미를 잃은 것들을 전시하는 곳이래요. (목소리를 낮추며) 이건 비밀인데요, 학교에서는 그 박물관 견학을 금지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우리를 몰래 데리고 간 것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들어간 전시실에는 ‘언어’들이 가득했어요. 쿠데타와 혁명, 살리기, 정의, 정직, 정상화, 올바른, 역사… 이런 언어들의 본래 의미와 현재 의미를 비교한 설명이 적혀 있었어요. 엄마. 멀쩡하게 사용되던 언어들이 어쩌다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 거예요? 선생님께 질문하니 난감해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올바른’은 엄마가 종종 간식으로 주시는 핫도그 이름 아니었어요? 그 다음 우리가 방문한 전시실은 ‘개념’이었어요. 음… 이 전시실에는 우리나라 모형이 통째로 전시되어 있었어요. 저번에 할머니가 하늘나라 가셨을 때 놓여 있던 사진처럼 검은 띠를 둘렀고요. 설명도 간단하더라고요. ‘대한민국-개념상실’ 어쩐지 무서웠어요. 선생님도 이 전시실에서는 급하게 나가시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역사’ 전시실이었는데, 우리가 현재 배우고 있는 역사교과서 내용과 많이 달라 당황했어요. 국사 선생님은 “이제 너희는 유관순을 아는 학생들이 된 거야!”라며 자랑스러워했었는데, 그 ‘일본 근대화기’에 살았다는 이완용에 대해서는 왜 가르치지 않았던 걸까요? 그리고 5·16이 쿠데타였어요? 헐! 우리는 선진화를 앞당긴 혁명적 결단이라 배웠는데, 왜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다른 거예요? 어른들은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국사를 ‘효도사관’이라 부르던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무튼, 그곳은 이상한 곳이었어요. 저는 이제 숙제를 해야겠어요. <환단고기>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데… 엄마도 이 책 읽었어요?”

김애란의 소설 <침묵의 미래>에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등장한다. 소설은 “지구상에 사라져 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그 가치를 알린다는 취지로 설립”된 박물관에 존재하는 ‘언어의 영(靈)’의 말을 빌려 사멸하는 언어, 제국에 의해 말살되는 것들에 관해 서술한다. 교과서 국정화가 확정되던 날, 이 소설에 빗대어 위와 같은 풍경을 상상하다가 나와 이 글을 읽을 독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 멈췄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장례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기록을 더 공유하게 되었다. 2015년 11월 3일은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한 날이다. 교과서 국정화 발표에서부터 허울뿐인 행정예고 과정을 거쳐 예정보다 앞당겨 확정고시를 하기까지의 과정은 뻔하고, 뻔뻔했다. 우리는 “전체 책을 보면 그런 기운(패배주의적)이 온다”는 대통령의 발언이나 “국정화 반대하면 국민이 아니다”, “교과서 국정화 반대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았는지 수사해야 한다”는 등의 새누리당 의원들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비웃거나, 허망하게 발각된 ‘국정화 TF’의 존재, 국민의 의견을 받아야 하는 행정예고 기간에 ‘하필이면 실수로’ 팩스를 꺼놓은 치밀한 ‘일못’들에 분노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무능한 정권’을 한탄했지만 그들은 그 어느 정권보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서만) 동물처럼 유능할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를 때 왜 하필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를 소환했을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조선’과 뭐가 다른가.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자신과 관련된 역사를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라고 선을 그은 것처럼 역사를 ‘가족사(家族史)’쯤으로 여기는 ‘(여)왕’이 군림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교과서마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따라 하고 있으니 지금 이곳이 조선, 그것도 ‘헬(hell)조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번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권력자들의 지향은 더 명확해졌다. 헬조선은 우리가 소환한 게 아니라 권력자들의 노스탤지어다. “조선은 원래 우리 세상이었어! 민주주의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무엄하도다!” 이렇게 선전포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지금 침묵하면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을 ‘소수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것이다.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들 유니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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