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은 세습되고 교육되어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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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단순한 관계들이 아닌가? 왜 우리는 그 관계들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쳇바퀴처럼 생각만 하고 그 관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주입시킬 수밖에 없을까?

친언니의 출산으로 첫째 조카의 육아를 또다시 부모님과 함께 맡게 되었다. 갓난쟁이 때부터 할머니집에서 자라 이미 할머니집이 제 집 같은 우리 조카는 너무 편안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언니 부부가 바쁜 탓이었을까? 조카는 이미 만화채널의 번호를 꿰고 있었고 어린이 만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너무 재밌는 만화라면서 함께 보자는 조카의 말에 나 또한 동심의 세계로 빠져보자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 2월 유선서비스 설치 하청 근로자들이 원청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고용 책임을 요구하며 '재벌의 갑질을 멈추라'는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유선서비스 설치 하청 근로자들이 원청인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의 고용 책임을 요구하며 '재벌의 갑질을 멈추라'는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만화의 내용이 충격적이고 씁쓸하였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랬다.
A왕국의 초대로 B왕국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시종장 등은 A왕국을 방문했고,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 사절단에는 오늘날의 비서격인 시종장 또한 참석을 했었는데, 갑자기 A왕국의 왕비는 B왕국의 시종장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B왕국의 시종장은 당연히 본인도 초청받아서 방문하였으며, 자신의 오너는 B왕국의 왕이라며 거절했다. 이때 구세주 같이 B왕국은 “그래요. 이 시종장은 나의 신하입니다”라는 말을 꺼냈다. 나는 당연히 시종장의 편을 들어주면서 시종장을 배려하는 말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건 웹툰 ‘송곳’이 아닌 어린이 만화이지 않은가? B왕국의 시종장의 인권 따위는 무시한 채 B왕국의 왕은 A왕국의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갑과 을이 나누어져 있고 갑이 시키면 나의 직장이 아닌 곳에서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씁쓸함이 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생각보다 순수하게 또는 속된 표현으로 약아빠지게 어른들의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흡수시키고 있다. 없어서 못 판다는 미니카 종류의 장난감 또한 “저건 부자들만 살 수 있는 거라고 그랬어. 이건 돈을 많이 벌어야지만 살 수 있는 거야”라고 체념한 투의 조카의 말에서 부모도 아닌 나조차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는 ‘을’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 또한 ‘을’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더욱 심한 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부모의 직업, 아파트의 평수, 아파트의 브랜드 등으로 스스로 갑과 을을 나누고 있다. 게다가 그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까지 일어나는 현실에서 과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까지 갑을관계를 세습하고 길들여지도록 주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갑과 을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단순한 관계들이 아닌가? 왜 우리는 그 관계들이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쳇바퀴처럼 생각만 하고 그 관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주입시킬 수밖에 없을까? 나는 내 자식은 좀 더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좀 더 진취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좀 더 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기꺼이 ‘을’이 되어 일을 하는데, 이런 우리의 노력과 그 모습이 나의 자식들에게까지 ‘을’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그걸 그대로 세습하는 이 현실에서 오늘도 또다시 일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장 아빠는 시간과 돈이 많아 자식들의 학예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대리 아빠는 사장 아빠가 시킨 일을 다 하느라 자식들이 열심히 준비한 율동조차 보러갈 수 없는 현실마저도 우리에게 버거운데, 그런 현실을 너무 빨리 알게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일못’은 아닐까? 제발 아이들이 보는 만화나 책에서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갑을관계가 인생이 전부가 아니며 언제든지 그 관계는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배백합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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