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개의 표정, 김혜자 (1편)- 김혜자의 주름과 안면근육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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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개의 표정을 짓는 배우 김혜자. 착한 엄마, 바보 같은 엄마, 가출하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유괴범 엄마, 살인자 엄마, 까칠한 엄마, 심보가 배배 꼬인 엄마, 광녀 같은 엄마. 그 다양한 엄마들이 내뱉는 대사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혜자예요. 저는 이제 촬영 끝나고 집에 가는 중입니다. 정신은 맑지만 몸이 무겁네요…. 드라마 보시고 좋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작가의 산뜻한 의도를 잘 표현해 보려고 이리저리 상상해 보며 연기하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마음이 몹시 분주하고 여유가 없다는 얘길 하느라고요. 말실수를 잘해서 본래 인터뷰를 겁나 하는데… 이해해주세요♡”

“잘 지내시지요? 제가요… 좀 아픈 중이에요. 그러니까… 앓고 있어요. 이렇게밖에 답을 못 드려 미안합니다. 저는 좀 못됐나 봐요. 그냥 어느 날 써주신 기사를 보고 날 이렇게 써주시다니, 아 행복해, 아 재밌어… 이러고 싶은가 봐요. 웃기지만… 이해는 할 수 있겠다,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배우 김혜자를 만나서 대화하기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느낀 날, 그날부터 10개월간 주고받은 수많은 문자 중 두 통이다. 무료 문자 서비스도 아니고, 유료 MMS 메시지를 이렇게 길게 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거절의 메시지를 이토록 정겹고 따뜻한 문장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그 화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사람. 그의 문장에 ‘김혜자 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김혜자의 주름과 안면근육에 관한 연구>

10개월 동안 노트북 바탕화면에 떠 있는 폴더 이름이다. 수만 개의 표정을 짓는 배우 김혜자. 착한 엄마, 바보 같은 엄마, 가출하는 엄마, 이기적인 엄마, 유괴범 엄마, 살인자 엄마, 까칠한 엄마, 심보가 배배 꼬인 엄마, 광녀 같은 엄마. 그 다양한 엄마들이 내뱉는 대사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 사람이다. ‘짓다’라는 동사가 집과 농사 그리고 글에는 어울리지만, 표정에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 내게, 표정을 짓는 것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한 배우 김혜자.

/ 박상미

/ 박상미

하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인간 김혜자가 아닌 광대의 피가 지어낸 수만 명의 표정이 김혜자 속에 산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잠자던 수만 명의 표정이 깨어나서, 어느 순간에 그의 얼굴에 등장해야 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김혜자의 호출을 기다린다.

배우 김혜자의 작품을 거의 다 보았지만, 영화 <마더>는 연구 텍스트이자 매학기 강의 자료로 쓰는 바람에 100번은 본 영화다. 영화 <마더>에서 아들이 죽인 소녀 아영이의 장례식장에 진한 화장을 하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찾아간 광녀 같은 엄마는 광인의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소리친다.

“사실은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여러분들,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도 여러분들은 절대 헷갈려서는 안 돼. 내 아들은 아니야!”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안면근육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의 무표정 연기 장면만 모아서 모니터를 한 적이 있다. 그 순간에도 인물의 심정은 눈밑 근육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미세한 감정의 요동에 따라 파르르, 눈동자의 움직임과 함께 움직인다. 마치 자신의 감정에 따라 안면근육을 연주하는 것 같다. 엄마의 부릅뜬 눈 속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휙휙 돌아갈 땐 프레스티시모(극히 빠르게)로. <마더>의 마지막 장면, 자신이 저지른 살인 현장에 떨어트리고 온 침통을 아들로부터 건네받고,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관광버스로 향하는 엄마가 눈을 질끈 감을 때는 그라베(무겁고 느리게)로.

그에게 연기란 한 영혼에 접신한 무당처럼 빙의돼서, 육체를 빌려준 인간 김혜자는 망각하고 오로지 그 인물에 매몰되는 굿판이 아닐까. 일흔이 넘은 여배우의 주름살 고랑마다 감정의 물결이 흐른다. 피부의 탄력이 상실되고, 진피 속의 근육섬유가 퇴화되어 생긴 주름. 상실과 퇴화를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해내는 주름이라면, 김혜자도 아닌 주제에 나도 서둘러 그것을 갖고 싶었다. 김혜자의 주름이 늘수록 그에게 거는 기대치가 커지는 이유다.

그 사이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고, 인터뷰는 포기하고 지내던 어느 날, 느닷없는 문자를 받았다. “벌써 가을이에요. 잘 지내시지요? 저는 이제 아플 겨를이 없어요. 저는 매일 연극 연습 중이에요. 이제 얼마 안 남아서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연습실 오셔서 보셔도 돼요. 그 말 하려고…. 오늘도 평안하세요.” 발신인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상대의 체온을 38도로 데우는 문장은 ‘김혜자 체’였다.

“거지같이 말해도 부자같이 써주세요.”

생각보다 더 작고 가냘픈, 화면에서보다 주름이 적고 맑은 은 피부를 가진 맨얼굴의 여배우가 하늘하늘 걸어 나오는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극단 로뎀의 <길 떠나기 좋은 날>의 주인공 소정 역을 맡아 매일 6시간씩 연습 중인 그를 찾아갔다. 흴 소(素), 고요할 정(靜). 지금 그는 혜자가 아닌 그야말로 ‘소정’의 모습이었다. 다리를 다쳐 모든 걸 잃은 축구선수 ‘서진’이 입원했던 병원의 간호사였던 소정은 모든 걸 잃은 남자에게 격려와 사랑을 끊임없이 주는 아내이자, 가난한 나라의 얼굴 까만 청년과 결혼하겠다는 딸을 응원해 주는 엄마의 역할이다. 정작 자신은 암에 걸리자 남편에게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수녀님을 따라 요양원으로 가는 고요한 여인.

실제로 뵈니까 피부가 참 하얗고 맑으세요.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는 주름이 너무 깊고 마귀할멈 같은 모습이어서 깜짝 놀랐었는데…. 얼굴이 참 생기 있고 평온해 보여요.
“내가요…. 내 얼굴이 변한 걸 느껴요. 예전에 나는 쭈뼛쭈뼛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씩씩해졌어요. 내 성향이 자기연민에 잘 빠져서 서글픔, 공허함 같은 걸 많이 느끼죠. 근데 이제는 또 이런다, 또 오는구나… 그만 가렴… 그러면서 금세 극복해. 나는 참 씩씩해졌어요.”

마음에 근육이 생긴 걸까요.
“맞아.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신다는 걸 확실히 느끼면서 내가 달라졌어요. 연습하느라 힘들어도 생기가 있어요. 특히 이번 극은 하상길 연출가의 창작극이자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극이어서 연구할 게 많아요. 배우가 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연기도 금세 생기를 잃어요.”

작년에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고 나서 배우 김혜자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상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일흔셋 할머니 배우가 2시간 동안 혼자 10살 꼬마 아이부터 70대 할머니까지 11개의 역할을 소화해내는 모습도 놀라웠어요. ‘왜 하느님은 아픈 사람을 만드는 거야?’, ‘삶이 왜 고통스러워야 해?’, ‘왜 이렇게 인생이 불공평해?’ 제가 신께 묻고 싶은 질문들을 어린 오스카가 대신 다해줘서 속이 시원했어요. 하지만 힘든 무대를 끝냈으니 당분간 연극 좀 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연극은 그 후로 그만하려고 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던지는 질문들을 다했으니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작품만 선택하는데, 나를 아끼는 연출자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주셔서 하게 됐어요. 이 작품은 꿈처럼 아름다워요. 그래서 너무 꿈처럼 보이지 않도록 연구할 부분이 많아요. 가난한 나라 총각과 결혼하려는 딸을 세상이 비웃지만 엄마는 격려하거든요? 어떻게 세상 말에 개의치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죠. 우리가 잊고 살지만요. 사실, 사랑만 가지고 다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할 수 있는데 우리 마음이 너무 강퍅해진 게 아닐까? 우리 본성은 이게 아니야…. 보는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연기해야 돼요.”

극의 대사는 선생님 마음과 일치하나요.
“대사가 꿈처럼 곱게 써져 있어요. ‘먼 산 잔설 남아 있어도 남양 언덕 밑 햇살 따뜻해. 고양이 졸고 있는 오늘은 참 길 떠나기 좋은 날이로구나.’ 이 아름다운 시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해야 돼요. 참 어렵지만, 연구를 많이 해야죠.”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부부 이야기더군요. 연기하면서 먼저 가신 남편분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라디오 방송 <김혜자와 차 한 잔을>을 18년간 함께한 박경희 작가에게 인간 김혜자에 대한 사전 인터뷰를 오래 했는데요. 그분이 선생님의 남편분을 표현하길 ‘아내를 이토록 존중하고 아껴주는 남편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내를 딸처럼 귀하게 사랑하다 가신 분’이라고 하시더군요.
“대사에서 여보, 여보 하다 보면… 남편이 그리워요. 이제껏 작품 하면서, 남편 생각이 제일 많이 나요. 굉장히 사랑하는 부부 이야기거든, 서로 끝없이 격려해주고… 나도 이런 사람이었었나… 어머, 내가 나이 드니까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웃음)”

그리운 남편, 어떤 분이셨나요. 미안한 점도 혹시 있나요.
“나는 우리 남편이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 살았어요. 그래서 너무 함부로 했던 게 미안해요. 딱 한 번, 화를 낼 뻔했던 적은 있었어요. 식사하는데 내가 얼마나 약을 올렸으면 밥상 모서리를 들려고 하더라구요.(웃음) 내가 너무 놀라서 진짜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그랬던 기억나요.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으면…(웃음) 우리 아들이 그래요. ‘엄마, 아빠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어, 그러니 나를 아빠 기준에 맞추지 말아요.’”

1998년에 투병하다 가셨지요. 너무 일찍, 59세에 혼자가 되셨어요.
“그 사람 병실에서 의사 붙들고 무조건 아프지 않게 도와달라고 애원했던 거는 기억나요. ‘이 사람 죽죠?’ 물으니, 그렇대. 그러면 이 사람 안 아프게 도와주세요. 몰핀, 그 마약 계속 놔주시면 안 돼요? 부탁했지.”

돌아가신 후에 여주 장지에서 하관할 때, 상여꾼들이 쉬는 참마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서 울면서 돈을 쥐어주며 부탁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간절해서 그 자리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아휴… 그것도 잊고 살았네…. 그쪽에선 망자를 관에서 꺼내서 꽁꽁 묶은 후에 묻더라고요. 그리고 그 사람 위에 흙을 뿌리고 상여꾼들이 꼭 꼭 밟아가며 묻는 거예요. 아휴…. 밟지 마요. 아파요. 밟지 마요… 그랬는데 밟아야만 한대. 그래서 밟는 기분으로 하지 마요…. 안 아프게 정성껏 묻어주세요 그랬지… 장례 끝나고 집에 와서, 라디오 방송 가려고 옷장을 열었는데 남편 냄새가 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

11월 4일에서 12월 20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공연되는 연극<br /><길 떠나기 좋은 날> 을 연습하고 있는 배우 송용태와 김혜자. / 박상미

11월 4일에서 12월 20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공연되는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 을 연습하고 있는 배우 송용태와 김혜자. / 박상미

선생님, 부부란 어떤 관계일까요.
“남편은 이 세상에서 부모보다도 나를 사랑한 사람이었구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내가 못난 부분, 괜찮은 부분까지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었구나… 떠나고 나니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겠어요. 같이 살 땐 그 사람의 소중함을 모르는 게 부부예요.”

가장 고마운 일은 뭔가요.
“나를 끝없이 지지해줬기에 내가 배우 노릇을 할 수 있었어요. 한 번도 트집 잡지 않았어요. 그러니 결혼하고 아이 낳고서 처녀 때 포기한 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죠. 남편은 나를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사람,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면 무너질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저에게 좋아하는 걸 하고 살라고 평생 도와줬어요. 그게 사랑이야. 그 보답으로 나도 반드시 지킨 게 있어요. 연습, 공연, 녹화하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집에서, 집안일은 못했지만 집을 안 나갔어요. 나는 세상도 잘 몰라요. 아이들이 엄마 부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어요.”

다양한 엄마 연기를 많이 하셨어요. 같은 이미지의 엄마를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유가 있나요.
“맞아요. 같은 연기는 절대로 안 해요. 새롭지 않은 건 내가 우선 흥미가 없어요. 나의 새로운 면을 깨워줄 수 있는 역할을 만나면 그 작품을 해요,”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는 진짜 그 일을 당해본 여자처럼 연기를 잘하셨어요. 남편도 떠나고 없는 집에, 남편의 전 여자를 데려와서 함께 지내잖아요. 암에 걸려 시한부를 사는 그 여자를….
“아휴, 힘들지. 남편의 여자인데. 수시로 가슴이 찌르듯 아프겠지. 그런데 같은 여자로서 또 연민이 생기겠지. 남편이 사랑했던 여자니까 증오와 연민이 함께 있겠지. 그 심정이 지옥이지…. 증오만 지옥이 아니야. 근데 작가가 너무 그 심정을 잘 썼어요. 근데 나는 항상 작가가 쓴 거 이상을 표현해보려고 애를 많이 써요.”

독일에서 영화 전공 교수들과 한국영화 세미나를 할 때, <마더>의 김혜자 표정연기를 분석한 적이 있었어요. 화면비율을 2.35대 1로 선택해서 빅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김혜자의 표정은 소름 돋는 연기라고 입을 모았어요. 미세한 감정의 요동에 따라 파르르, 인물의 심정이 눈밑 근육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킬 때….
“어머, 그렇게 자세히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행복해요. 나는 연습 시작부터 배우가 무대에서 입을 옷을 늘 입고 다녀요. 온전히 김혜자를 버리고 그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심정일까, 이 말을 할 때 심정은 어떤 처참한 마음일까…. 내가 온전히 그 인물이 되면 표정이며 목소리며 연기하지 않아도 그냥 나와요. 대사와 대사 사이의 행간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그 행간에 내 표정이 들어가죠.”

특히 <마더>에서 아들이 죽인 소녀 아영이의 장례식장에 찾아가서 “사실은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여러분들,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도 여러분들은 절대 헷갈려서는 안 돼. 내 아들은 아니야!” 소리치는 장면요.
“나도 내 모습이 너무 무서웠어요. 눈이 막 돌아가면서, 눈이 뒤집혀서 그 대사를 하더라고요. ‘어머, 이게 나야? 너무너무 무서워. 이거 좀 없애줘.’ 봉준호 감독에게 부탁했죠. ‘선생님도 모르게 이 표정이 나왔죠?’ 감독이 그래. 난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감독이 너무 좋대.”

늘 따뜻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모성이 광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내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라는 짐승의 처절한 울음을 보여준 엄마였어요. 그 심정을 눈빛과 안면근육의 미세한 떨림으로 대사의 행간을 채워 넣었어요. 한 인간의 감정에 철저하게 매몰된, 그 영혼에 접신한 무당처럼 빙의된 연기. 소름끼치는 표정은 거기서 나오는 거였어요. 주름살 고랑마다 감정의 물결이 흘러요.
“정말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대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런 연기가 나오는 거 같아요.”

봉 감독은 김혜자는 현장에서 마치 신인배우처럼 항상 불안해한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도 정말 오케이냐고 반문한다고 말했어요.
“저는 늘 신인이죠. 처음 맡은 역할이잖아요. 처음 사는 인생이잖아요.”

<마더>에서 춤을 출 때는 정말 무당 같았어요. 엄마의 동작은 춤을 추는데 표정은 우는 얼굴이에요. 이병우 음악감독의 장조와 단조를 오가는 슬픈지 기쁜지 가늠이 안 되는 음악이 그 심정과 아주 잘 어울렸어요.
“맞아요. 저도 그 음악에 빠져서 춤을 췄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 관광버스에서 여자가 허벅지에 침을 찌르고, 하늘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춤 춰. 지금도 그 장면 보면 눈물이 나. 그 여자 심정이 어땠을까…. 봉준호 감독은 5년 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마더>의 엄마를 각인시켰어요. 잠자는 내 안의 감정들을 일깨워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다른 눈을 가진 천재예요.”

수만 개의 얼굴 김혜자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인간 김혜자의 뜨거운 심장이다.

“내가 만일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동으로써 얻어야 한다.” 2004년, 그가 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읽고 가슴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그는 1992년부터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거두는 따뜻한 엄마로 살고 있다. 그의 책은 30만부가 넘게 독자의 손으로 갔고,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다. 10억원에 달하는 인세는 월드비전 통장으로 고스란히 입금되고, 매달 아프리카 어린이 103명에게 밥값을 3만원씩 보내고 있다.

“내가 안 보내면 그 아이들 굶어요. 나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아이들에게 돈 보내는 일이 1순위예요. 2019년 것까지 미리 다 낸 상태예요. 돈이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해서요.” <계속>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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