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재순 감독(상)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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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게 지금도 너무 많다”는 백발의 소년은 수줍게 웃는다. 그는 본인이 기획, 연출한 작품 수를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 왜 기록하지 않으셨느냐고 묻자, “작품이 무대에 올라간 순간, 제 역할은 끝난 거예요.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 거지요. 제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 된 거니까, 잊어야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죠.”

“제가 소띠예요. 저는 소처럼 살아온 것 같아요. 소는 평생 밭 가는 존재 아닙니까.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열매를 따는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지 소의 몫은 아니지요. 묵묵히 밭 가는 게 소가 할 일이지요. 누가 알아 주냐고요? 밭은 내 마음을 알 테지요.”

동화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서 만난 아저씨가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구름처럼 희고 고운 백발의 아저씨와 마주앉은 공간이 나에게는 마음을 사로잡는 맛있는 사탕들이 한꺼번에 펼쳐진 그야말로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와 같았다.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78년간 그가 간 밭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할 듯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자료를 정리하면서 한 사람이 이렇게 넓고 다양한 작물을 길러내는 밭을 갈았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거듭 사실을 확인해도 표재순이라는 한 사람이 해낸 것이 확실했다.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이자 한국 문화계 역사의 산증인 표재순. 다양한 분야에서 이 많은 일들을 한 사람이 해내는 게 과연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발상이 샘솟는 백발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위그든 아저씨의 사탕가게 쇼 윈도에 매달린 어린아이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귀에 군침이 돌았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표재순 감독(상)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

88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 제작단장 겸 총연출, 2002 한·일월드컵 전야제 총연출, 경주 EXPO, 하이서울페스티벌 총감독 등 국가 주요 행사 연출을 도맡아 한 사람. 방송국에 30년간 몸담으며 국민드라마 <수사반장>, 최초로 허준을 발굴해낸 드라마 <집념>, <교동 마님>, <대원군>, <조선왕조 오백년>등 45편의 드라마를 기획·연출하고,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기획했으며, 프로듀서, MBC TV제작국장, SBS 프로덕션 사장을 거친 사람. <오즈의 마법사>, <해상왕 장보고>,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빠담빠담빠담>, <멕베드>, <세일즈맨의 죽음>, <성춘향> 등 수많은 연극과 오페라까지 17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한 사람. 1대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대학교수를 거쳐서 다시 연출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 좁은 지면에 나열하기 불가능한 일을 해낸 이는 한 사람, 표재순 감독이다.

요즘 그는 ‘실크로드 경주 2015’의 예술총감독을 맡아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78세 노장을 오늘까지 연출가로 살아오게 만든 힘은 지치지 않는 열정이겠지만,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그는 오늘도 운동화를 신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빠른 걸음으로 다니며 24시간을 촘촘하게 살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경주와 서울, 기차역, 집무실을 따라다니며 겨우 조금의 궁금증을 풀어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하고 싶은 게 지금도 너무 많다”는 백발의 소년은 수줍게 웃는다. 그는 본인이 기획·연출한 작품 수를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 왜 기록하지 않으셨느냐고 묻자, “작품이 무대에 올라간 순간, 제 역할은 끝난 거예요.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 거지요. 제 것이 아닌 관객의 것이 된 거니까, 잊어야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죠. 과거를 기록할 시간이 없었어요. 새 작품을 만들기 위해 또 밭을 갈아야 하니까요” 하며 웃을 뿐이다.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고, 큰형은 장사를 했다. 농부가 되거나 장사꾼이 되는 게 미래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컸다. 호기심이 많아서 무엇이든 새로 접하면 반드시 직접 해봐야 했고, 어른들에겐 엉뚱하고 장난스런 아이로 비쳐져서 맨날 벌 서고 매를 맞았다. 수줍음이 많았지만 무대에 오르는 것도 즐거웠다. 초등학교 4학년 학예회 때는 ‘동명성왕’이라는 연극에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 엑스트라 역할을 맡아서 궁궐 앞에서 창을 들고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는 문지기를 맡았다. 대사도 한마디 없이 배경 그림처럼 서 있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배를 잡고 웃었지만, 문지기도 꼭 필요한 역할이니까 부끄럽지 않았다. 6·25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가면서 가족이 흩어졌고, 큰누님 댁에 얹혀살면서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1년 반 정도 일을 했어요. 영어도 배우고, 사회생활이란 걸 처음 배웠죠. 그 후에는 대구역에 있는 ‘양키시장’에서 미군부대에서 깡통 통조림을 떼다가 파는 장사를 시작했어요. ‘아지노모토’라는 일제 조미료도 팔았지요. 미군부대 중개상한테 싸게 물건을 받아서 포대에 짊어지고 걸어다니면서 냉면집, 중국집에 조미료를 팔았는데 인기가 아주 좋았어요. 온종일 부지런히 다니면 대구 시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는데, 조금 남기고 많이 파는 게 서로 좋은 일이라는 마음으로 무조건 싸게 팔고 어른들에게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했어요. 저를 믿는 단골이 많았죠.”

막내에게서 유능한 장사꾼의 재능을 발견한 가족은 상과대학에 진학하길 권했다. 스스로도 장사꾼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 친구들과 서울 근교 산과 절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절에서 불화를 접하고 절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불교미술에도 관심이 가고 우리나라 역사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왠지 역사를 배우면 그것을 토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세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사학과에 갔지만 공부는 안 했어요.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연극을 시작했죠. 외국 작품을 학생들이 직접 번역하고 연출해서 연세대 노천극장 무대에 올렸어요.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었죠. 최소 5000~6000명이 봤으니 작은 무대가 아니었어요. 큰 무대에 공연을 올리는 설렘과 뿌듯함을 그때 알게 됐죠. <더 레인 메이커>라는 미국 작품은 ‘스타벅’이라는 사기꾼 이야기인데, 제가 맡은 역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의 약혼자였어요. 첫 무대에서 50마디 정도 대사를 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온몸이 땀범벅이 됐던 기억만 나요.(웃음) 연극은 좋지만 배우는 아니구나! 외모도 땅딸막하고 인물도 배우될 그릇은 못 되니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하고 무대감독, 조명, 조연출 같은 스태프의 역할을 했죠.”

1960년에 실험극단 준비과정에 참여하다가 군대에 갔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다시 장사를 해야 했다. 식구들이 명동과 중앙시장에서 식품 도매상을 크게 했기에 가게 일을 도와야 했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를 만나서 가정을 꾸린 뒤로는 돈 안 되는 연극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새벽에 나와서 점방을 차리고 물건을 사들이며 장사꾼으로 살았다. 묵묵히 지켜보던 아내가 어느 날 내뱉은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당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제가 장사꾼 표재순에게 시집 온 줄 아세요? 당신이 갈 길을 가세요.”

그날 바로 장사를 접었다. 1963년 극단 ‘산하’에서 <잉여인간>이라는 작품으로 시작을 했고, 1965년에는 미국 작가 토머스 울프의 작품을 각색한 <천사여 고향을 보라>는 작품으로 처음으로 연극 신인상을 탔다. 그때 미국의 유명한 배우 헬렌 헤이스가 표재순의 연극을 보고 극찬을 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첫 신인상을 받고 난 이후 일본에서 열린 한국영화연극예술상에서 연출상, 대상과 작품상도 받았다. 연극에 투신해서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가 어려웠다. 월급을 받을 수 있는 TV 프로그램 연출 일을 시작했다. JTBC의 전신인 동양TV로 가서 아침 프로그램부터 시작한 후 MBC, SBS를 거쳐 방송국에서 30년간 일했다. SBS 프로덕션 사장이 그의 마지막 직함이었다. 방송국에서 30년을 보내는 동안에도 외부에서 연출자로 왕성한 활동을 쉬지 않고 했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표재순 감독(상)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

대한민국 연출 역사의 신화적 존재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요.
“신화는 무슨, 당치 않아요.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저는 늘 ‘이게 뭘까?’ 궁금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무엇이든 배우고 싶고요. 목수를 만나면 나무를 깎고 싶고,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서 나도 만들어 보고 싶고, 뭐든 새로 접하면 신기해 보여서 나도 당장 해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라요. 너무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연출계의 신화적 존재, 한국 문화계 역사의 산증인,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서 인터뷰 자료가 너무 없어서 놀랐어요. 책도 낸 게 없으시고요. 준비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저한테도 늘 다음에 만나자고 하며 피해 다니셨고요.(웃음)
“제 성이 ‘표’씨 아닙니까. 그래서 ‘표’나게 사는 걸 조심하며 살았어요. ‘표’내지 말고 조용히 소처럼 밭이나 열심히 갈자!(웃음) 인터뷰 할 시간에 작품을 구상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 생각했어요. 남들을 찍는 작업만 많이 했지, 나에게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이대면 가슴이 두근두근, 덜렁덜렁해요. 이렇게 긴 인터뷰를 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후배들을 위해서 성공비결에 대한 책을 쓰신다든가, 기록을 남겨 주시면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인데요. 기록이 없어서 제가 더 속상했어요.
“제가 소띠예요. 저는 소처럼 살아온 것 같아요. 소는 평생 밭 가는 존재 아닙니까.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열매를 따는 일은 다른 이들의 몫이지 소의 몫은 아니지요. 묵묵히 밭 가는 게 소가 할 일이지요. 누가 알아 주냐고요? 밭은 내 마음을 알 테지요. 그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거면 족해요. 그리고 제 생각엔 세상에 가장 쓸모없는 책이 ‘성공비결’을 나열한 책이에요. 그런 책은 넘쳐나요. 읽는 사람들도 멀미가 날 것 같아요. 제가 책을 쓴다면 ‘내가 겪은 인생의 실패’에 관한 것일 거예요. 내 인생의 대박 실수 모음집(웃음). 선배의 실수를 통해 후배들이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보람 있는 일일 테지요.”

성공비결을 배우게 하는 역발상이 감동적입니다. 사실 저는 연극인 표재순, 방송인 표재순, 88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을 총연출한 감독이 각각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보니 같은 사람이더군요. 장르를 넘나드는 기획과 연출을 가능케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요.
“지나온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연출이에요. 어린 나이에 장사를 시작한 경험이 제 연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 할 수 있죠. 식품을 납품하느라 자전거,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배달 다녔던 장사꾼 표재순이 배운 게 너무 많아요. 장사꾼이 고객에게 믿음을 얻고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마음으로 연출가가 관객을 만족시키려 애쓰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요. 뮤지컬, 오페라, 국가행사, 연극, 드라마 등 장르는 달라도 연출이라는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다양한 경험이 한데 뭉쳐졌기 때문이에요. 열정과 열심이 연출가로 살아오게 만든 힘이었어요.”

열정과 열심만으로 안 되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타고난 머리, 샘솟는 창의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 같아요.
“제가 평생 잘한 일이 있다면, 남 흉내 안 낸 거예요. 남 쫓아가지 않고 나 하고 싶은 일을 무조건 열심히 한 거, 그게 다예요.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꾸준히 10년 동안 집중하면, 반드시 잘하게 되고, 그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어요. 남 흉내만 내면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모른 채로 살게 돼요. 열심히 해도 2등에 머무르는 비결이 남 흉내 내는 겁니다.”

국가행사 총감독을 많이 맡으셨으니 체구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말을 많이 하시는 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나 뵙고 느낀 게, 말이 적고 잘 들어주시는 분 같아요.
“연출을 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잘 듣는 겁니다. 저는 회의를 많이 하고 그 장면을 촬영하거나 녹음을 반드시 합니다. 한마디도 귀로 듣고 흘려버려선 안 돼요. 좋은 생각들을 잘 듣다보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르고 가장 좋은 기획을 함께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녹음을 하면 말하는 사람 모두가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좋은 생각만 말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주옥 같은 아이디어를 수집할 수 있고요.”

88서울올림픽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지만 그때의 감동이 생생해요. 폐막식을 보면서 감격해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해온 표재순PD가 개막식과 폐막식 제작단장 겸 총연출을 맡아서 성공적인 연출을 해냈습니다. 수만명의 집단 퍼포먼스를 한국의 색채에 맞게 연출해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이 일은 감독님 인생에서도 소중한 기억일 것 같아요.
“올림픽 행사는 우리 한민족이 만들어낸 작품이었어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고, 제가 교통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거라 생각해요. 우리의 기를 한군데로 모아서 만든 한민족의 작품입니다. 기획단에 이어령 선생님, 변종화 화백 등 역량 있는 분들이 계셨지요. 저희가 아이디어를 내면 기획단이 다시 아이디어를 주시고, 서로 끊임없이 소통했어요. 기획단이 1차 대본을 만들어 주시면, IOC 본부에서 헌법 조항에 맞춰서 인증하고, 승인이 나면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저는 총연출로서 기획된 내용을 실제화시키기 위해 교통정리를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일 뿐이에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국가행사를 맡은 부담감은 너무나 컸을 텐데요, 주어진 짧은 시간에 한국이란 작은 나라를 홍보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웠었나요.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가장 중요하죠. 선조 때부터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자 한국의 전통사상인 천지인(天地人) 하늘, 땅,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삼재사상(三才思想)을 기반으로 했어요. 부담감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지요. 올림픽 개막식 전날 밤에는 개막식이 오전 9시30분인데 낮 12시에 일어나서 털썩 주저앉는 악몽을 꾸기도 했어요.(웃음)”

TV드라마는 편집할 수 있지만, 국가행사나 연극무대는 생방송과 같잖아요. 아무리 완벽히 준비해도 변수도 많을 것이고요. 표재순 감독도 연출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지요.
“2002년 한·일월드컵 전야제의 연출은 일생일대의 최고의 실패작이었어요. 아무리 완벽한 준비를 한다고 해도, 자연현상의 변수까지 예측하고 1만 가지의 돌발상황에도 대비해야 하는 게 일회성 대형 행사입니다. 월드컵 전야제 때 갑자기 비가 왔어요. 한 15분 동안 브레이크가 생겼어요. 중계 도중에 오케스트라가 지시도 없이 다 철수해버렸죠. 조용필씨하고 김덕수씨가 그 시간을 겨우 채워줬어요. 주최 측에서 예산문제로 우리가 요구한 대로 무대를 설치해 주지 않았던 게 문제였어요. 일회성 대형 행사는 만천하에 각인되는 것이죠. 올림픽, 월드컵 같은 행사는 전 세계가 지켜보니까 그 긴장감은 표현이 불가능해요. 한 번 실수를 하면 지울 수 없는 연극도 마찬가지죠. 천재지변의 영향을 입기도 하는 등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많습니다.”

연출가가 고려해야 할 변수에는 어떤 게 있나요.
“연막탄을 터트리는 퍼포먼스를 하려면 바람의 방향도 예측해야 하고, 세워놓은 세트가 무너질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고요. 갑자기 테러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지상에 40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있더라도, 지하에 오디오 시스템과 카메라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갑작스런 변수로 인해서 실패한 경험을 기록하는 일이 후배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한 권은 충분히 써질 거예요(웃음)”

1975년 <집념>에서 2013년 <구암 허준>까지, ‘허준’ 이야기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어요. ‘허준’이라는 인물을 발굴해서 <집념>이란 드라마를 연출하셨어요. 한의학 드라마의 길을 연 선구자라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두세 줄 나와 있는 ‘허준’이란 인물을 발견하고 그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내셨다고요.
“혼란스런 역사 속에 참된 스승의 상을 찾아서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미 알려진 인물을 제외하고 새롭게 발굴해 보고 싶었죠. 진짜 역사 공부는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하기 시작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니까 선조대에 임금님을 모시고 의주까지 몽진을 가실 적에 호종했던 의사 얘기가 한두어 줄 나오더라고요. 그 이상의 자료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모범이 될 만한 인물로 허준을 발굴해 낸 거죠. 우선 허준 영정을 만들어 보려고 주역, 관상, 골상학 하시는 분들을 모셔다가 몽타주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인물을 창조해 내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40회까지는 시청률이 낮아서 사장실에 불려갔어요. 회사 말아먹겠으니 그만 멈추라고 하더군요.(웃음)”

허준’ 이야기의 90%가 픽션이라는 얘길 듣고 놀랐어요.
“60회까지만 지켜봐달라고 애원하고, 아이디어를 냈죠. 드라마 1회마다 두 꼭지씩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생활 속 민간치료 요법을 넣어보자! 태아감별법, 무좀, 치아건강법 같은 것들요. 시청률이 쭉쭉 올라가서 결국엔 200회까지 갔지요.”

- 다음 주에 계속

<박상미 문화평론가>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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