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자들의 의식 두드리는 북소리”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우연히 이산하 작가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55분 40초. 그런데 이상해서 잠시 후에 다시 보니 여전히 8시 55분 40초였다. 시계바늘이 멈춰 있다. 그가 제주 4·3항쟁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고문받고 구속됐던 그 시간. 28년 전, 아들의 고통을 접한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계바늘은 그의 아버지 사망시간에 멈춰 있다.

이제 과거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제게 시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시간이에요. 오늘도 내일도 8시 55분 40초를 기억하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임종을 지키지 못한 감옥 속의 아들, 사망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은 공안검찰, 속절없이 애만 태운 어머니의 시간이 함께 사는 거죠. 그 시간이 글을 낳고요.”

죽은 시간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는 시간이군요. 최근에는 청소년 소설 <양철북>을 12년 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낳으셨어요. 이산하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더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문학에 열병을 앓던 고교시절엔 시보다 소설을 더 많이 썼어요. 시는 내 몸에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감각을 개발하는 거라고 한다면, 소설은 이미 사용한 감각들을 재구성하는 거죠. 제가 살아온 과정을 어떤 그릇에 담기 위해서는 시보다도 서사를 재구성하는 소설이라는 그릇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산하 작가

이산하 작가

책 제목이 <양철북>이라서 귄터 그라스의 장편소설인 <양철북>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선생님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양철북인데, 굳이 그렇게 지은 이유는 뭔가요.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주인공 오스카는 1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과 폴란드 국경지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생일선물로 ‘양철북’을 받아요. 원래 오스카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의 지능을 가졌지만 몸은 추락사고로 3살 때 성장이 멈춰버린 ‘난쟁이’이지요. 이 오스카가 선물 받은 양철북을 늘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요.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듯 북을 두드리지요. 이 북소리는 곧 잔혹한 나치독일과 그 나치에 저항하지 않고 비굴하게 사는 국민들을 고발하는 오스카의 목소리이기도 하구요. 조금 과장한다면 제가 다녔던 고교시절이 1970년대 중·후반의 폭압적인 유신독재시대였는데, 나치시대처럼 그 폭압에 굴복하고 비겁하게 사는 국민들을 야유하고 조롱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로서 ‘양철북’이라고 제목을 빌려와 이름을 지었어요. 물론 북소리를 듣고 잠자는 영혼들이 깨어나기를 바랐다면 더 큰 과장이겠지요.”

19살 철북이와 30대 법운스님이 한 달여 동안 전국 산사를 여행하는 이야기인데, 보통 10대들이 겪기 드문 체험이에요.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면 실제의 경험일 텐데, 모두 사실인가요?
“80%는 사실이고 20%는 소설적 구성과 형상을 위한 다소 변형된 사실이에요. 물론 오래전의 이야기라 기억의 재구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고등학교 때 저는 방학이 되면 대구 경산의 깊은 산속 암자로 들어가 책을 읽거나 글을 썼어요. 매화와 붉은 능소화로 뒤덮인 작은 암자의 주지스님은 제 외할머니였는데, 외할머니는 벌레들이 화상을 입는다며 뜨거운 물도 식혀서 버렸고, 또 ‘앞으로 착하게 살려면 우선 독해져야 한다’는 삶의 지침도 내려준 분이었어요. 그 암자에 어느 날 백구두를 신은 젊은 괴짜스님이 하나 흘러들어 자기를 따라오라고 해서 졸지에 전국의 산사기행을 하게 되었지요. 대학에서 세계역사와 인도철학을 전공했다는 스님의 법명은 법운이었는데,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서 파계승이자 끝내 ‘자발적 죽음’을 택한 지산스님과 비슷했어요.”

<적멸보궁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산사기행집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겠군요.
“그 시절의 추억을 못 잊어 그로부터 25년 후에 전 주말마다 혼자 전국의 절들을 찾아 떠났는데, 예전에 스님과 함께 생쌀을 씹으며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었지요. 제 나름대로의 ‘만행’이랄까…. 그리고 1년 후 <적멸보궁 가는 길>을 냈어요. 또 그때 스님과의 짧은 여행, 긴 여운을 소설화한 것이 <양철북>이구요. 두 권 모두 제 인생의 데미안이자 첫 번째 스승인 바로 그 법운스님에게 바치는 글이지요.”

법운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안타깝게 아직도 스님을 찾지 못했어요. 어느 깊은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거나 또 어쩌면 이미 입적했을지도 몰라요. 청도 운문사에서 교련복을 입은 저와 잿빛 승복에 ‘백구두’를 신은 스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어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섬진강가에서 별을 보며 불던 스님의 처연한 하모니카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와요.”

이 소설에는 헤세의 <데미안>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의 의미가 중요해 보여요.
“난생하는 생명들에게는 ‘줄탁’(?啄)이라는 신비한 교감이 있어요. 가령, 닭의 경우 알 속에서 노른자위를 먹으며 다 자라난 새끼병아리는 알 속에서 어느 한 점을 부리로 쪼아요. 그 순간 알 밖의 어미닭도 바로 그 자리를 쪼아주지요. 그러니까 새끼와 어미의 부리가 서로 만나 알의 어느 한 지점, 그 한순간이 있지요. 알은 결코 저절로 깨지지 않아요. 알 속의 새끼가 밖으로 나오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알 밖의 어미가 그것을 도와주려는 연민과 배려가 있어야 하지요. 탄생이란 이토록 삼엄해요. 배움 혹은 깨달음도 여기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봐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도 바로 이 같은 줄탁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 소설에서는 열 손가락과 혀에 상처를 내 거기서 흐르는 피로 불경을 옮겨 적는 ‘혈사경’이 법운스님의 부화(孵化)라면, 철북이의 부화는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어요. 어쩌면 한참 뒤의 ‘한라산’을 쓰게 된 결심 과정이 오히려 더 ‘줄탁’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법운스님과 이산하

법운스님과 이산하

문득 여기서 ‘우문현답’을 하나 바라고 싶어지네요. 철북이는 꼭 양철북을 쳐야 하나요?
“본문 속의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답을 할게요.

‘오스카가 와 성장을 멈추고 난쟁이가 되어버렸십니까?’

‘아, 그거야… 잔인한 나치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 아니겠나. 자라서 어른이 돼봐야 학살자나 동조자로 변할 테고….’

‘그라머 양철북은 와 자꾸 두드립니꺼?’

‘“그런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북소리 아니겠나. 니가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 북이 데미안의 알 같은 존재라는 것도 스스로 깨닫게 될 끼다. 그라고 오스카처럼 눈알에 힘을 한 번 팍 주면 교실 유리창도 와장창 박살날 끼다. 앞으로 넌 펜으로 힘껏 북을 쳐라.’

‘네가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절대고독 의 중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수도자요, 작가가 아니겠느냐.’ 저는 이 구절이 좋았어요.
“이 대목에서 수도자와 작가, 그러니까 법운스님과 철북이가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일되는 지점을 성년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모든 성장소설이 그렇듯 <양철북>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자기 이름 찾기’지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때 묻은 세속의 혈연적 이름을 버리고, 스승으로부터 받은 새 이름으로 수행정진하는 존재가 바로 스님이잖아요. 자기 밖에서 제 이름과 하나가 되려던 법운스님은 자기 몸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해요. 양철북도 그와 다르지 않지요. 그래서 오대산에서 법운과 헤어지는 장면은 곧 귄터 그라스로 대표되는 기왕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고, 또 그 순간이야말로 모든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하나의 아버지가 되려는 성년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현기영 소설가는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맑고 순결한 울림을 들려줄 수 있다니 놀랍다. 이 아름다운 언어로 소설까지 써 내는 이산하에게 질투를 느낀다”며 이 소설을 높이 평가했어요. 소설에서 사투리가 뿜어내는 풍자와 익살은 정말 만만찮구요. ‘불교적 깨달음’, ‘알을 깨는 성장통’이라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해주는 느낌이에요.
“제가 경상도 출신이라 그런지 서울 표준어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열차나 고속버스 같고, 지방 사투리는 골목길을 달리는 마을버스나 오솔길을 달리는 자전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만큼 사투리가 많은 정서를 함축한 시적인 표현으로 보여 의도적으로 썼지요. 또 수행승과의 밀착여행이다 보니 심심찮게 돌출하는 무거운 불교적 화두를 경쾌하고 발랄하게 풀기 위한 것도 있구요.”

현기영 선생님과의 인연이 깊으시지요.
“현기영 선생님은 참 고마운 분이에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실린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제주 4·3항쟁을 처음 접하고 충격 받았는데, 그 충격의 씨앗이 자라 10년 후 ‘한라산’이라는 작품으로 꽃피었는지도 몰라요. 물론 현기영이라는 작가의 존재는 석방 후에 처음 대면했지요. 제 소설에 대해 과찬하신 건 약 40년이나 은폐되어온 제주 4·3학살에 대해 전혀 제주인이 아니면서 처음으로 폭로해 고난을 자초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여담입니다만, 제 결혼 주례 선생님이시기도 해요. 아끼는 마음에 주례를 어찌나 길게 하셨는지, 단상에 있는 꽃들을 세고 또 세도 끝나질 않더라구요.(웃음)”

소설에는 법정스님, 안도현 시인 등 철북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와요. 스님과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소설에도 나오지만 그 중에 특히 ‘화두가 안 풀린다’며 자살한 70살 노승의 영정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 ‘엄마가 보고 싶다’며 대숲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린 동자승을 달래기도 했고, ‘악마들이 청와대로 다 몰려와 지옥이 텅 비었다’며 유신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젊은 스님들도 만났고, 희한하게 예쁜 수녀와 신부도 만났어요. 그 중에서도 국내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청도 운문사의 새벽예불이 지금도 가장 인상 깊이 남아요. 대웅전 법당의 붉은 촛불 아래에서 수백명의 복사꽃 같은 어린 여승들이 합송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고혹적이면서도 장엄했고, 장엄하면서도 도저했고, 도저하면서도 삼엄했고, 삼엄하면서도 처연한 비장미의 최절정이었지요. 천둥 같은 전율, 벼락 같은 충격을 받은 전 한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어느새 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구요.”

이산하의 문학 콘서트에서 현기영 선생과 함께

이산하의 문학 콘서트에서 현기영 선생과 함께

여러 재미있는 장면들이 많은데 작가가 직접 뽑는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스님과 강가를 걸으며 노숙할 때가 많이 그리워져요. 물론 언제나 그렇듯 스님은 소주를 ‘나발 불고’ 전 생쌀을 오물오물 씹고. 그럴 땐 스님이 불쑥불쑥 물어요. 가령 ‘어이, 니 성경과 불경을 딱 한 줄로 줄이면 우찌 되노?’ 이렇게요. 그러면 전 ‘아이고, 스님도 참…. 아, 내가 그걸 알면 미쳤다고 스님을 졸졸 따라다니겠습니까?’ 하고 응수해요. 그때 우리는 배가 고프면 강가에서 밥을 지어 먹었고, 어둠이 내리면 근처 아무 암자로나 흘러들었어요. 그렇지만 여름이라 거의가 이슬을 맞는 노숙이었지요. 아까 말했지만 법운스님은 늘 소주를 병째 마셨고 난 생쌀을 뽀드득뽀드득 씹었어요. 생쌀은 씹을수록 고소해 스님의 안주이기도 했어요. 스님은 술에 ‘이빠이’ 취할 때마다 엄마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어요. 그러면 전 퉁명스럽게 ‘또 운다. 아, 중놈이 엄마가 어딨노?’ 이렇게 핀잔을 주구요. 그러면 스님은 ‘그래, 니 말이 맞다! 우하하하…’ 하고 웃어요. 그렇게 한바탕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나면 스님은 슬그머니 하모니카를 꺼내 불어요. 모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같은 동요들이었어요. 어느 날은 백구두에 대한 제 의심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먼저 해명하기도 했어요. ‘니 자꾸 이 구두를 꼬롬하게 보는데, 니는 잘 모르겠지만, 원효대사의 그 위대한 해골바가지다 아이가.’ 스님은 목마를 때마다 구두를 훌쩍 벗어서 시냇물을 꿀맛처럼 떠먹곤 했지요. 전 그 백구두 해골바가지로 한 번도 물을 떠먹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백구두로 너무 떠먹고 싶어요.”

<한라산>으로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 이후 최대의 필화사건의 주인공이 되셨어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정국이 들끓던 1987년 봄에 진보적인 무크 <녹두서평>에 발표된 장시 <한라산>으로 제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것을 말하는데, 세상이 좀 시끄러워졌지요. 세간의 평에 의하면 두 가지 충격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한 시인으로서 감히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인 그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린 충격이고, 또 하나는 40년 만에 폭로된 제주도의 참혹한 양민학살사건의 충격이지요. 1948년 미군정 하의 제주 전체 인구 28만 가운데 5만~7만명의 양민들이 무고하게 학살된 사건이에요. ‘한국판 제2의 아우슈비츠’지요. 당연히 미군정 하에서 자행된 만행이니까 미국이 배후이고, 그 끔찍한 학살사건을 40년 동안 숨겨온 걸 폭로한 게 바로 장편서사시 ‘한라산’이란 작품이에요. 그 사건으로 출판사의 김영호 대표와 신형식 편집장, 그리고 저까지 구속되고 무크 <녹두서평>에 글을 발표한 10여명의 팔자들이 모두 수배되었지요.”

당시 미국 펜클럽 회장이었던 수전 손택의 구명운동이 석방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1987년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제가 구속됐을 때 변호사가 찾아와 미국 펜클럽 회장인 수전 손택 여사가 저를 미국 펜클럽 명예회원으로 위촉해 ‘이산하 시인 구명위원회’를 만들고자 하니 본인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고 해서 승인했지요. 그 후 긴 법정투쟁 기간 동안 수전 손택은 뉴욕에서 노태우 정부를 향해 수차례 ‘이산하 시인의 석방’을 촉구했어요. 그렇지만 별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자 수전 손택이 직접 서울로 날아와 청와대 바로 턱밑에서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88올림픽을 앞둔 정부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세계 여론을 의식해 수전 손택에게 모종의 언질을 준 것으로 알아요. 그때 수전 손택이 감옥에 있던 저에게 몇 차례 면회신청을 했지만 불허가 됐지요.”

그럼 수전 손택은 만나지 못했나요?
“석방 이후 수전 손택의 미국 펜클럽과 ’이산하 시인 구명위원회‘로부터 초청 받았지만 안기부의 해외 출국금지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못 갔지요. 물론 프랑스·영국·독일 등 유럽의 초청까지도 모두 무산되었고, 가까운 일본 방문마저 석방 10년이 지난 2000년에야 겨우 가능했으니까요. 결국 암투병하던 수전 손택은 2004년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전 끝내 그분을 만나지 못했지요. 수전 손택은 해마다 4·3이 오고 그의 <타인의 고통>을 볼 때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며 얼마나 제대로 걸어왔는지, 그 발자국의 깊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요.”

석방 뒤 10여년간 절필하는 동안 무슨 일을 했나요?
“전민련과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국제민주연대 같은 인권단체에서 일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라는 인권잡지 편집위원장을 맡아 한홍구, 유시민, 차미경 등의 편집위원들과 같이 잡지를 만들고, 또 여러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을 하기도 했어요.”

요즘 근황과 앞으로 작품활동 계획은요.
“주로 글 쓰는 게 근황이라 특별한 건 없어요. 내년엔 산사기행집 한 권과 지난해 다녀온 아우슈비츠 기행집 한 권 등 두 권의 책을 낼 생각이에요. 가장 하고 싶은 건 신자유주의의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계 곳곳의 공동체마을을 순례하는 겁니다.”

‘네가 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가슴에 남는 구절이다. 기어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젊은 스님 법운과 이제 막 성년식을 앞둔 문학소년 양철북은 이 여행을 통해 법운스님과 철북이라는 자기 이름을 찾아간다. 여행에서 만난 온갖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성장의 어미들이 된 것이다. 법운(法雲)스님은 ‘구름처럼 자유로운 진리’라는, 양철북은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북소리’라는 자기 이름을 찾은 건 아닐까. 고교시절 실존적 고뇌에 찬 한 스님과의 짧고도 긴 여행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이산하가 오래도록 치열하게 꿈꾸어 왔던 문학적 화두의 싹이 어디에서 어떻게 돋았는지, 그 비밀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박상미의 공감스토리텔링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