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자립생활대학 학장이 된 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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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던 중에 “안 보이는 거 거짓말 아니냐”고 물으니, “세상의 안 좋은 꼴은 안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사니까 눈빛이 자꾸 맑아진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발레를 자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말레의 ‘지젤’이라는 이름에는 익숙하다. 사랑을 잘못 선택해서 죽음에 이른 지젤…. 자정이 되면 남자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자들, 빌리들의 여왕 미르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승에서 사랑을 성취하지 못한 여자 영혼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젊은 남자를 유혹해 춤을 추게 만들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빌리들. 미르타는 빌리들의 여왕답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춤을 춘다. 이 장면은 지젤이 사랑을 잃고 빌리가 되어 춤추는 장면과 함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미르타는 지젤의 무덤에 마법을 걸어 그녀를 불러내는데….

“현영 언니는 느낌으로 다 알아들어요”
1982년, 무표정으로 절도 있는 춤을 추는 빌리들의 여왕 ‘미르타’ 역을 맡아 열연했던 발레리나 김현영. 2015년, 그는 대전 장애인 자립생활대학 학장이 됐다.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 학생이기도 한 54세 김현영씨의 일과는 분 단위로 계획을 짜서 움직여야 할 정도로 바쁘다. 활동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서 대전역에 도착하면, 지팡이를 짚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혼자 힘으로 고려대 서울 안암캠퍼스 강의실까지 도착한다. 심리학 심화강의를 들을 수 있는 혜화역 만풀 아카데미도 혼자 찾아가서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대전 장애인 자립생활대학에서 강의하고, 전국을 누비며 장애인 자립생활과 의사소통에 대한 강의를 하러 다닌다. 일요일 하루는 주변의 만류로 ‘겨우’ 쉰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장애인 자립생활대학 학장이 된 발레리나

그와 나는 ‘영화와 공감 스토리텔링’이라는 제목으로 개설된 ‘영화치료’ 수업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만났다. 나는 지금도 그가 앞이 안 보이는 게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며 늘 환하게 웃는 학생. ‘영화’ 수업을 들으러 오는 그가 시각장애인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건 내가 둔해서라기보다 그가 학생으로서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던 중에 “안 보이는 거 거짓말 아니냐”고 물으니, “세상의 안 좋은 꼴은 안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사니까 눈빛이 자꾸 맑아진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만 수업 텍스트로 할까요? 강의계획을 다시 짜야 할까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처음 안 순간, 열다섯 살이나 어린 선생인 나는 혼자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아무 상관없어요! 현영 언니는 느낌으로 다 알아들어요! 놀라실 걸요?”

오랜 시간 함께 수업을 들어온 학생들이 말했고, 김현영 학생도 자신 있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는 영화 파일을 수업 전에 미리 메일로 보내달라는 모범생다운 요구를 했을 뿐이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우리가 눈으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까지 소리와 느낌으로 더 깊이 읽어낸다.

4학년 학예회를 준비하면서 발레를 시작했다. 재능을 알아봐준 선생님 덕분이었다. 평생 발레리나로,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 줄 알았다. 다른 삶은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집안은 넉넉했고, 원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게 부모님께서 해결해주셨다. 그 덕분에 무엇이든 다하고 싶고, 다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다.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장애인 자립생활대학 학장이 된 발레리나

너무나도 낯선 단어 ‘망막 색소 변성증’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발레 교수법을 공부하면서 바쁜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밤에 눈이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밤엔 누구나 당연히 잘 보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밤에도 잘 보이는 사람이 신기했고, 대단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그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별은 동화나 영화 속에서 본 영상만 머릿속에 있을 뿐, 실제로 별이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없는 거예요. 달은 보았지만 별은 본 적이 없어요. 친구들은 다 보았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그때도 그저 ‘참 신기하다’는 생각만 했어요.”

시력이 남들보다 많이 나쁘고, 야맹증이 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서 서둘러 공부를 하고 일찍 잠들었다. 익숙해지니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었다. 서른 즈음에 이르러서야 밤이 되면 위험한 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7년 어느 밤, 지방에 강의를 갔다가 고속버스 터미널에 버스를 타러 가는 중이었어요. 제 발 앞에 빗물이 고여 있더라고요. 대수롭지 않게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제 팔을 잡아끌었어요. 차를 수리하는 지하 벙커에 기름이 고여 있었고, 불빛이 반사돼서 반짝이고 있었는데, 제가 거기 발을 내디디려고 한 거였죠. 처음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순간이었어요.”

낮에도 점차 안 보이기 시작했다. 혼자 다닐 수 없는 위험이 자주 엄습해 왔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유명한 안과를 찾아다녔다. 각기 다른 병원 의사들이 같은 병명을 발음했다.

“‘망막 색소 변성증’. 너무나 낯선 단어였죠. 백내장이 오면서 서서히 진행되다가 어느 날 전혀 보이지 않게 될 거니까 대비하라고 그러대요. 대비라…. 그냥 사는 것뿐이지 뭘 대비할 수 있겠어요? 40대 초반부터는 급격히 나빠져서 혼자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가족은 감쪽같이 모르게 행동했어요. 나로 인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불편해지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너무 씩씩하게 행동하니까 가족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강의도 여전히 많이 다녔지요. 거의 안 보일 때까지 강의를 놓지 않았어요. 강의는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요.”

붙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학교마다 한 사람을 정해놓고 그에게만 살짝 고백했다. 거울 앞에서 발레할 때는 학생들의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데 신기했다. 실루엣만 봐도 그들의 시선 방향과 표정까지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느낌만으로 ‘학생, 지금 왜 딴데 보나요?’ 그러니 학생들도 눈치채지 못하더라구요.(웃음)”

강의를 더 이상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눈을 뜨고 싶다는 소망이 절박해졌다. 한 스님을 알게 됐는데, 자신이 운영하는 기수련 공동체에 들어와서 합숙치료를 받으면 40% 정도는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조용히 집을 나와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100% 좋아진다고 말했다면 ‘사기’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40% 정도라고 하니, 믿고 싶고, 양심적인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어요. 핸드폰도 못 쓰게 하고, 외출도 금지, 질문도 못하게 하고, 밥을 먹을 때도 그들이 먹으라는 반찬만 먹어야 했어요.”

계속 의문이 들었지만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그곳밖에 없었기에 온순하게 말을 들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밤, 일이 터졌다.

“잠든 내 곁에 누군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나도 모르게 욕을 하고 난리를 쳤죠. 기수련 시키는 남자들이었어요.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거기서도 여자들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빈방으로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덜덜 떨며 연락할 곳을 생각해 봤지만 한 군데도 없더라고요….”

[박상미의 공감 스토리텔링]장애인 자립생활대학 학장이 된 발레리나

복지관의 수동적 프로그램에 의문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때 문득 평소 다니던 약국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던 친절한 약사였다. 약국은 아직 영업을 할 시간,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없으세요?’ 그의 첫마디였어요. 나 좀 도와줘요,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어디라고 떨면서 얘기했죠. 그가 바로 찾아와서 나를 구출해줬어요.”

그때부터 그 친절한 약사와 가까워졌다. 강의가 없는 날은 약국에서 여자 손님들 상담을 해주면서 서로 도움을 줬다. 든든한 친구가 돼 지금까지 영혼을 소통하는 벗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시기에 내가 가진 모든 걸 버렸어요. 합숙을 하면서 강의해서 모은 돈도 거의 잃었죠.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혼자 살아가기로 결심했어요. 어떻게 홀로서기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노트에 나의 장점을 써 봤어요. 체력이 좋다. 이만하면 머리도 좋다. 무엇이든 도전해 보자!”

하지만 시각장애 1급인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1년 6개월 동안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온종일 공부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강의밖에 없었다.

“대전 복지관에서 장애인 상담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기존의 시스템을 보니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지만, 그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고, 수동적 참여만 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었어요. 장애인이 능동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완고한 벽에 부딪혔죠.”

많은 제안을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복지사들이 다 도와줄게. 가만히 있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복지관에 장애인보다 복지사가 많은 것도 의아했다. 장애인들은 수동적인 프로그램에 길들여져서 자립할 의지는 약해지고, 그러다 보니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불만의 목소리만 높일 뿐이었다. 도움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장애인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은 더 편하게 도와줄 수 없냐고 끊임없이 요구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복지관은 늘 시끄러웠다. 답답했다.

“그 무렵에 ‘장애인 자립생활 연합회’를 발견했어요. 장애인이 주체가 돼 능동적·자발적으로 시스템을 만들고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와 일치했어요. 복지관과 장애인 시설은 주체가 공급자인 시, 정부, 독지가니까 장애인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죠. 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이 주체가 되고, 비장애인은 우리의 조력자가 돼주는 시스템을 추구해요. 대전시에 ‘활동 보조인’ 교육을 내가 해보겠다고 제안했어요.”

발상의 전환이었다. 장애가 덜한 사람들은 비장애인들의 도움만 받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고, 중증 장애인 돕는 일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자립을 배우는 교육은 반드시 필요했다.

“‘장애인 자립생활 연합회’에서 ‘동료상담’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는데, 상담 전문가도 없이 장애인들끼리 하소연하는 시간이었어요.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거나 다름이 없는 상담을 하고 앉아 있는 거지요. 그때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내가 상담 전문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들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죠. 장애인들을 위로한다는 생각으로 ‘장애를 잘 극복하세요, 힘내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뭘 극복하라는 말이죠?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죠? 잘 적응하고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데,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요. 그리고 눈이 안 보인다고 하면, 초등교육도 못 받은 사람 취급을 해요. 그럴 땐 제가 웃으면서 ‘제가 한글은 뗐어요’ 하고 웃지요(웃음).”

지팡이를 짚고 세상 밖으로 나오다
상담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후천적 장애인 친구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장애인들과 어울리는 걸 더욱 꺼린다. 장애인들 사이에서도 고학력 후천적 장애인들은 종종 왕따가 되기도 했고, 복지관의 관장들은 고학력 장애인보다 말 잘 듣는 장애인을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디어 내고 자립을 도와달라고 새로운 제안을 많이 하는 장애인은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기 일쑤였다.

“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지팡이를 짚고 세상 밖으로 나왔어요. 제가 지팡이를 펴는 순간, 다양한 세상의 시선을 느끼게 돼요. 쯧쯧… 혀를 차는 사람,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사람,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웃음). 나는 장애인도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자립 의지가 없는 장애인들을 보면 너무 속상해요. 복지관, 자립센터 등에서 강의할 때도 늘 강조하죠.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걸 인식하자. 부정-분노-체념의 단계를 거쳐서 세상과 타협의 단계로 넘어가자. 그러면 자립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분노를 극복하자.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장애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직시하자! 이 교육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예요.”

센터보다 전문적인, 그리고 인문학 교육도 받을 수 있는 대학이 필요했다. 서울에는 장애인 자립생활대학이 있었다. 찾아가서 직접 강의를 하면서 시스템을 배웠다. 서울까지 올 수 없는 장애인 친구들을 위해서 대전에도 대학을 열기로 결심했다.

“장애인들도 깨어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지방의 장애인들은 정말 사각지대에 있어요. 대전시에 계획안을 냈지만 안 도와줬어요. 내가 교수 모으고 커리큘럼 다 짜겠으니 장소만 제공해달라고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 읍소해서 학생 모집, 면접,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리고 올 3월에 첫 입학생을 받고 개강을 했습니다.”

‘대전 장애인 자립생활 대학교’는 이렇게 문을 열었다. 주 2회 하루 6시간, 장애인 자립생활 실무론, 인문학, 의사소통 강의가 개설됐다. 1년 과정을 마친 학생은 졸업장도 받는다. 재능기부 교수님들이 와서 양질의 수업을 해주시고, 학생들이 낸 학기당 50만원의 등록금으로 차비 정도를 사례비로 드리고 있다.

“저는 남은 삶을 ‘장애인 자립생활 대학교’를 전국에 확산시키는 일에 바칠 겁니다. 등록금 50만원이 없어서 못 나오는 학생들도 있어요. 많은 장애인들이 집에서 나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국가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생리현상 조절도 안 되는 중증 장애인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분들도 배우고 싶어서 나오시거든요. 우리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공부해요. 저는 그분들의 다리가 돼 휠체어를 밀어주고, 그들은 제 눈이 돼 방향을 알려주고요. 저는 앞으로 상담학 박사과정까지 도전해서 공부할 겁니다. 모범이 돼야지요.”

어수룩한 어린 선생은 강의가 끝나고도 해가 저물도록 강의실에 앉아 끝없는 질문을 하고 인생 이야기를 듣고 같이 울고 웃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선생님은 발레리나로 살 때보다 지금이 더 빛나요. 남자에게 한을 품고 죽은 여자, 빌리들의 여왕 미르타보다 지금 김현영이 더 멋져요. 영혼을 소통하는 멋진 남자친구가 늘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랑받는 여자잖아요? 그 힘으로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요. 그리고 선생은 강사인데, 학생 김현영은 심지어 대학 학장이고요!”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 맞는 말이므로 밥은 ‘심지어 예쁜’ 자신이 사겠다고 한다. 그는 내가 만난 언니들 중 가장 당당하게 웃는, 그리고 바쁘게 사는 멋진 언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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