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미술가 이병복 <하> “꼬불꼬불 돌아가도 그게 다 운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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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옷을 만들면서도 대사나 배우의 동작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해. 상식적인 재료가 아닌 조선 백지, 지푸라기, 쌀 포대, 노끈, 비닐 같은 걸 다 이용해. 다른 재료보다 열 배 이상의 노력이 들지만 그 과정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어. 새로운 정신 구현을 하는 거니까.”

‘이병복 사형!’

6·25전쟁이 터지고 인민군 세상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빨갱이로 돌변해서 이병복 선생의 가족을 위협했다. 당시 큰아버지, 아버지, 막내 삼촌이 군 장성 또는 정부 고위 관료였으니 인민군이 덮치면 반동으로 몰아붙이기 가장 쉬운 집안이었다. 하루는 빨갱이 단체로 불리던 남산미술연구소 친구들이 찾아와서 인민군에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게 집안을 살리는 길이라고 선생을 설득했다. 무서웠지만 그길로 따라가서 문화선동부 직원이 됐다. 이틀 동안 서서 잠을 자며, 김일성 장군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납북됐고, 며칠 만에 세상은 인민군 세상에서 국방군 세상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머리채를 잡힌 채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조서에는 이병복이 김일성대학과 모스크바대학 졸업,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 중에 빨치산으로 남한에 투입됐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집안을 살리려면 여기 취직해야만 한다고 해서 일했다고 항변했지만, 처분이 내려졌다. ‘이병복 사형!’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여달라고 악을 쓰는 동무도 그 안에서 만났지. 나도 빨리 죽이든지 결판을 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린 인솔군인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어. 한숨처럼 ‘죽기에는 나이가 아깝네요.’ 그랬지. 그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내게 살짝 손짓을 하는 거야. 내가 제일 먼저 죽는 줄 알고 따라갔지. 언덕을 올라 철조망까지 따라가니 쪽문이 있어. 갑자기 쪽문을 열쇠로 열더니 그가 소리쳐. ‘뒤돌아보지 말고 재주껏 뛰어!’ 간신히 떨리는 다리를 추스르고 뛰다가 뒤를 돌아봤어. ‘아이고, 이름이라도 알아야지요!’ 그랬더니 ‘가요! 살아 있으면 다 알게 돼요!’ 하더라구. 살아서 이 기사를 본다면 좋겠다. 그럼 연락이 올까?”

무대미술가 이병복

무대미술가 이병복

선생의 인생에서 사랑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열여섯에 송도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만난 문학청년과 12년 동안 서로의 간절한 마음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그는 강제로 학병에 끌려가게 되자, 청혼을 해왔다. 하지만 공부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선생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곧 소식이 끊어졌다. 얼마 후, 그가 학병을 피하려고 서둘러 장가를 들었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듣는다.

“눈으로 봐야만 믿겠더라구. 친구를 하나 데리고 경의선 급행기차를 타고 찾아가는데 나는 넋이 나간 상태였지…. 만났지만 서로 아무말 없이 여관 벽에 기대고 앉아 밤을 새우고 새벽에 헤어졌어.”

역사가 생이별을 시켰으니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하지만 그 때문에 연극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그 무렵 1948년에 연극을 시작하셨는데요, 우리나라 최초 여성 신극단체 ‘여인 소극장’에서 ‘문설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셨지요. 예명을 정지용 시인이 지어주셨다구요.
“정지용 선생이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였어. 우리 할머니는 신문에서 ‘여인 소극장, 이병복 출연’ 기사를 보고 큰 손녀딸이 광대가 됐다고 상심해서 밥도 안 잡수시고…. 선생과 의논했더니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계속하라고 그래. 문학소녀 ‘문’, 이병복은 각설이 같으니까 ‘설이’, ‘문설이’가 된 거야(웃음). 그런데 내가 연극을 시작한 무렵, 이북에서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졌어. 그가 학생사건의 주동자로 수배를 받아서 남쪽으로 도주를 해온 거야.”

다시 만났겠군요. 운명일까요.
“소식 듣고 찾아가니 작은 다방을 차렸더라고. 눈만 뜨면 목공일, 페인트칠…. 일을 거들었지. 그 무렵 그의 만삭 아내가 애기를 업고 찾아왔어. 불쌍해서 집에서 집히는 대로 훔쳐다 먹였지. 그러다 덜컥 그 부인이 해산을 하게 된 거야. 우는 애는 내 등에 업고, 무의식 중에 신생아를 받아 싸매고, 탯줄 잡아매고, 어매! 그 피는 또 다 어째…. 방바닥에 엎드려 두 팔로 피를 긁어모아서 바께스에 담아내니 내가 피투성이야. 아이고…. 이 얘기가 왜 나왔니…. 세월이 진짜 흘러갔네.”

참 멋진 여자다…. 날 버린 남자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이에겐 생명의 은인이 돼주셨네요.
“멋진 여자가 아니고, 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착해서 해준 게 아니야. 역사 때문이지…. 전쟁 잘못이지…. 그걸 어째? 그 무렵 아버지가 모든 걸 눈치채고, 마지막 자존심은 가져주길 바란다고 신심으로 당부하셨지. 그때서야 질긴 인연의 끈을 내려놓았어.”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는 장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담배를 배운 딸에게 훈계 대신, 동경에서 예쁜 라이터를 선물로 사다 주신 신식 어른이었던 아버지는 납북되기 전의 모습, 마흔일곱 살의 따뜻한 키다리 아저씨로 영원히 남아 있다.

선생님은 타고나길 사랑이 많은 분이세요. 그 사랑은 진짜 인연을 만나서 다 쏟으셨어요. 권옥연 화백은 내조의 여왕과 살다 떠난 행복한 예술가였어요.
“권이 꽤 멋있었거든. 데이트하는데 갑자기 ‘병복씨, 결혼합시다’ 그래. ‘참 한가하시네요. 납북된 아버지, 동생들, 어머니…. 이 판에 시집을 어떻게 가요?’ 했더니 두꺼운 큰 손으로 내 뺨을 철썩 때리더라고(웃음). 그런데 관상쟁이 백운학 선생이 ‘이 사람은 니가 동으로 가라면 동으로, 서로 가라면 서로 가는 사람이니 천생 배필감이다’라는 말에 결혼했지. 남편이 가운데 자고, 시어머니가 왼쪽, 내가 오른쪽에 비스듬히 누워 자야 하는 작은 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

남편을 한국의 피카소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은 가난도 꺾지 못했다. 남매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1957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연극 공부나 의상 공부는 꿈도 못 꾸고, 권 화백을 내조하는 데 집중했다. 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혜택이 많았기에 소르본대학에서 불어 교수학을 공부하고, 조각 아틀리에에서 조각 연수를 받았다. 남는 시간은 6개월 코스의 입체 재단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무대미술? 그런 건 생각도 못했지. 양재학교에서 입체 재단을 배울 때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나는 척척 해내니까, 나 때문에 진도에 지장이 있다고 자격증을 줄 테니까 나가달라고 하데(웃음). 테라코타를 주무를 때도 처음 하는 사람 작품은 구우면 다 터지는데, 내 거는 하나도 안 터져. 살롱드메, 레알리테 누빌 등 유명한 전시회 심사위원인 자보 선생이 내게 충고를 했어. ‘병복은 한심하다. 재능은 남편보다 많은데 살림만 사느냐? 남편 제치고 너도 해라. 제대로!’ 그때 깨달았어. 꼬불꼬불 돌아가도 그게 다 운명이야.”

1961년에 귀국한 후에도 남편의 작품활동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네오 의상실’은 그 때문에 탄생했다. 프랑스에서 배운 대로 손으로 한 땀 한 땀 작업을 했고, 패션계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혼자 뒷방에서 옷만 만들었다. 이병복의 옷이 유명해지면서 ‘네오 컬렉션 패션쇼’도 열었다. 전문 모델이 무대에 서고, 무대의상도 선보이는 파격적인 패션쇼로 소문이 났다. 이병복 선생은 의상실의 수입이 늘면 권 화백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큰 규모의 전시회를 기획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병복 선생의 작품‘초심’

이병복 선생의 작품‘초심’

네오 의상실이 가장 번창한 시기에 20년 역사를 가진 의상실의 문을 닫으셨어요. 그 후 1966년에 극단 ‘자유’, 1968년에 복합 문화공간인 카페 ‘떼아뜨르’가 탄생했고요. 무대의상을 영혼을 가진 배우처럼 다루는 장인이라고 연극인들에게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숨통이 트이니까, 여인 소극장에서 했던 연극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연출가 김정옥을 만나서 <극단 자유>를 창단했지. 밥을 굶어도 연극을 하기로 했으니 매일 적자여도 극단 살림 살면서 허리띠를 조였고. 옷감 살 돈이 없어서 종이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 언젠가 배우가 의상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보고 소리쳤지. ‘무대의상은 영혼을 가진 한 명의 연기자야. 소품이 아니야!’ 나는 의상 디자인을 하기 전에 늘 연습에 참가해서 배우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해. 옷을 만들면서도 대사나 배우의 동작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해. 옷이 사람 되고 사람이 옷이 되는 거니까. 나는 상식적인 재료가 아닌 조선 백지, 지푸라기, 쌀포대, 노끈, 비닐 같은 걸 다 이용해. 다른 재료보다 열 배 이상의 노력이 들지만 그 과정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어. 새로운 정신 구현을 하는 거니까.”

극단 <자유>를 이끌고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연극과 한국의 독특한 무대미술을 알리는 데 공헌을 하셨어요. 1997년에는 세계미술가협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금곡 무의자 박물관에서 축하무대로 펼친 야외공연 <왕자 호동>은 한국 연극사의 큰 사건으로 불려요.
“외국 나가서 공연할 때마다 한국의 고유한 멋과 분위기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야외에서 연극 공연, 음악 공연을 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려고 우리가 번 돈을 모두 때려넣어서 금곡에 땅을 사 모으고, 박물관도 만들었지. 권의 의지가 만들어낸 땅이야.”

이병복의 공연 장소이자 권옥연의 벽화 작업실이었던 금곡 무의자 박물관은 부부가 공유했던 예술공간이다. ‘무의자(無衣者)’는 옷을 입지 않은, 즉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는 권 화백의 호를 따랐다. 권 화백의 묘소도 그곳에 있다. 너무나 다른 부부는 서로의 예술영역을 존중하면서 자극을 주는 동지로서 60년 넘게 부부로 살았다.

이병복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호칭은 참 많지만, 선생님은 ‘화가 권옥연의 아내’라는 걸 가장 먼저 앞세우시지요.
“나는 권이 그림 그리는 거 참견 안 하고, 권은 나 하는 일에 참견 안 하고. 둘 다 자존심이 강해서 말은 안 하지만 차가운 눈으로 서로를 비판하지. 그림이나 연극이나 어차피 제3자가 보는 거잖아. 내 연극 보고 그가 ‘에이, 그거 뭐…’ 그러기도 하고, 나는 그의 그림을 보고 ‘여보, 인제 그만 그려. 거기 당신 개칠하면 극장 간판돼.’ 그러기도 하고(웃음) 그러면서 서로 자극 받고. 권은 내가 일 잘할 수 있게 크고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고,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해 줬어. 그래서 우리는 잘 맞춰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

파리 유학시절의 이병복

파리 유학시절의 이병복

두 분은 서로 깊이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권이 죽기 전에 벽화를 그려보고 싶다 그랬어. 권이 원하는 폭이 250㎝짜리 캔버스를 사려고 파리까지 내가 갔지. 너무 커서 한국으로 어렵게 들여왔어. 그런데 어느 날 ‘여보, 나 무서워. 하얀 캔버스가 무서워서 못 그리겠어.’ 그러는 거야. 쫓아가서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면서 나도 울었어. 텅 빈 무대에 섰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영천 이씨 가문은 고매한 양반 집안의 문화를 중시해서, 대대로 첩실을 두지 않았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남편을 평생 존중했던 건 가문의 영향이겠지요.
“여자가 자기를 모르면 이북에서 온 간첩이래(웃음). 여자로서는 늘 외로웠지. 나중엔 심지어 여자 스님들도 팬클럽이 돼서 금곡에 와. 참 가지가지 했지. 여성 팬들이 와서 ‘사모님, 뭐 도와드릴까요?’ 이래. 그럼 내가 ‘가주시는 게 부조입니다.’ 그랬지(웃음). 다시 태어나도 꼭 권하고 결혼해서 내가 남자 팬들 끌고 다닐 거야(웃음). 엄마, 마누라 노릇 잘하며 살 거야. 한 번도 그는 내 차지가 된 적이 없으니까…. 다음 세상에서는 내가 서방질도 좀 하고(웃음). 여성스런 아내가 되지 못했고, 아이들에게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주는 다정한 엄마가 되지 못했던 게 후회돼.”

권 화백님도, 아드님도 하늘나라에서 선생님이 여전히 왕성한 활동 하시는 걸 보면 기뻐하실 거예요.
“우리 큰아들…(울음), 나는 그 시절 연극에 미쳐서… 에고… 어미 노릇도 못했네. 고생 안 시키면 그게 어미인 줄 알았다. 좋은 학교 보내고 공부시키는 게 유산인 줄 알았어. 유학 끝나고 힐튼 호텔 지배인으로 일했는데, 부인이 성형외과 의사였어. 돈벌이가 잘돼서 밤에도 수술을 해. 밤에 집에 가도 아무도 없으니, 부인 퇴근할 때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다 들어가고. 스트레스로 내장이 다 썩은 것도 몰랐다…. 나는 외며느리로 살면서 시어머니를 평생 모셨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대단한 양반이었어. 남편은 시어머니 차지였지. 그래서 난 아들을 멀리서 바라만 봤어. 그 아이 아프고 4년을 별 지랄 다했는데, 결국 가더라고….”

그때가 가장 바쁘실 때였잖아요. 금곡 박물관 열고, ‘왕자호동’ 공연하고….
“남편 전시회 뒷바라지도 해야 되고, 아이들 유학비 대고, 바느질 해가지고 극단 뒷돈 대느라 어미로서는 한 게 없다. 아이들은 할머니 밑에서 컸지. ‘왕자 호동’ 야외공연할 때 큰아이가 외국인 관람객이 많은데 모기가 이렇게 많아서 어쩌느냐고, 경동시장 가서 무쇠솥을 4개 사고 마른 쑥을 잔뜩 사와서 군데군데 놓고 쑥을 태워 모기를 쫓았어. 향 좋은 쑥 안개가 은은하게 깔리면서 환상적인 공연을 할 수 있었지. 그길로 쓰러져서 병원에 들어갔어. ‘예수를 믿으면 나 낫는대. 엄마, 부처님은 보이 프렌드로 두고, 예수 좀 믿어주면 안 돼?’ 아들이 부탁했는데, 말이라도 대답 안 한 게 미안해.”

선생님의 아픔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잖아요. 아드님 발 작품도 그렇고요. 함박눈이 내리는데, 빛 한 줄기가 승천하는 이 그림도 아드님 생각하며 만드셨다고요?
“태진이가 가기 이틀 전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계속 피를 토해. 하얀 휴지통에 피로 물든 휴지가 쌓이니까 엄마 못 보게 숨기려고 애를 쓰는 거야.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보라를 헤치고 종로바닥을 다니면서 까만 쓰레기통 2개를 샀어. 근데 그걸 써보지도 못하고 다음날 갔다… 에고…. 49재 때 꿈을 꿨는데, 함박눈이 쏟아지는데 빛 한 줄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거야. 우리 태진이가 승천을 하는 거 같아서 휴지를 뜯어 붙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

권 화백님 편찮으실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108개의 ‘초심’이를 만드셨다구요.
“오야지(남편) 세상 뜨기 전에, 슬픔을 내색 안 하자니 힘들어서 초심이를 맹글었다. 오야지가 떠났을 때 금곡에서 초심이들과 저승 가는 송별회를 열고 싶었는데, 국가에서 고옥 수리하느라 난장판이 돼서 못했어. 이거 봐. 어이그…. 참 이쁘지?”

표정이 다 달라요. 이 아이는 초심이 78번이네…. 작품과 사진을 함께 전시하면 좋겠다. 몇천 가지의 ‘초심’들을 볼 수 있겠어요.
“108개의 표정. 한 작품 한 작품이 조명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 달라. 사진을 찍으면 더 다양하지. 내년이 <극단 자유> 50주년이거든, 내가 80에 대표 그만두면서 극단도 뽀개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되더라고. 지금은 후배들이 하고 있는데, 자유극단에서 소품들, 탈과 의상들 전시회 하고 싶어.”

선생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내가 살면서 내 품에서 죽음을 맞은 이가 한둘이 아니다. 내가 빼닮은 우리 할머니도 내 품에서 보냈고, 오야지도, 아들도…. 사람이 살면서 웃고 울고, 기복이 많아야 깊이도 있고 어른 노릇도 한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 배우 앞에 세우고 남편 앞세우고 나는 뒷방 음지에서만 엎드려 일했지. 하지만 적은 일 옳게 하는 사람이 큰일도 옳게 한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 조금만 이 백성들 생각했으면 좋겠어. 나도 지금 대통령 찍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선생님의 무대의상들을 다 꺼내서 우리들이 입고 금곡 박물관에서 의상 쇼 하는 거 어때요?
“그럴까? 금곡 박물관이 2만평인데, 가랑잎 긁기 행사할 때 기별할게. 꼭 와. 감도 따고 산수유도 따고…. 어휴, 참 힘들게 살았다…. 세월이 정말 갔네. 오늘 우리 둘이 주책이다. 인터뷰가 아니고 눈물 짜기 위해서 만난 거 같다. 두 여자가 웃고 우느라….”

2015년, 이해랑 연극상 특별상을 받았을 때 선생의 수상소감은 짧았다. “아이고, 염치없어라. 젊은 사람이 받아야지 이 무슨….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2006년에 무의자 박물관에서는 기획전 <이병복 없다>가 열렸다. 작품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병복으로부터 작품들 또한 자유로워지라고 이별의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내년 <극단 자유> 50주년 행사 때 선생이 원하는 전시회를 열게 된다면, 이번 제목은 이렇게 붙여 달라고 부탁드렸다. <이병복, 있다!> 대한민국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병복은, 영원히 있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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