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뮤지컬에 미친 무당 박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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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콘텐츠는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요. 프로듀서는 고작 ‘최초의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내 꿈이 연출가의 꿈이 되고, 배우의 꿈이 되고, 스태프의 꿈이 되는 거죠. 서로의 꿈을 교환하면서 드디어 작품이 탄생하죠. 그 꿈에 최종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 관객이고요.”

해남 촌놈, 고등학교 때 처음 연극을 보기 시작했고, 그저 연극이 좋았다. 학교는 재미가 없었고, 책만 보면 잠이 쏟아졌다. 은행원이 되면 출세하는 줄 알고 상과대에 지원했으나 당연히 떨어졌다. 큰 맘 먹고 재수를 했지만, 이번엔 타고 가던 버스가 추락해서 3개월이나 입원을 했다. 상과대 진학은 또 실패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촌놈은 엉뚱하게도 연기학원에 등록한다. 3개월이 지난 후, 전봇대에 붙은 일용잡부 모집 광고지들 사이에 끼여 있던 작은 광고지 하나가 눈에 번쩍 들어온다. <연구단원 모집-극단 동인극장> 청소, 라면 끓이기, 선배 양말 빨기 등 잡일을 하며 극장에서 살았다. 성실했으나 재능이 없고 외모마저 별 볼 일 없는 청년은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단역으로 출연했다. 매일 똑같은 야전잠바와 청바지를 입고 다녔으나 늘 대본을 제목이 보이도록 접어서 뒷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연극쟁이, 광대로 불리는 게 훈장이어서 기죽어 본 적이 없었다. 32살에 3개월간 공연하고 처음으로 출연료 100만원을 받아보았고, 34살에 처음으로 월셋방을 마련했다. 그러나 곧 일이 끊겼다. 오랜 조연출 생활이 시작됐다. 마침내 직접 연출할 기회가 와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극단 대표인 김상열 선생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배우는 텄다 싶어서 연출을 시켰더니 그것도 젬병이군.”

악평도 꿈을 꺾진 못했다. 그래도 연극판에서 살고 싶어서 프로듀서가 됐다. 런던이나 뉴욕의 작품을 도둑질해서 공연하던 시절에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한 뮤지컬을 국내 무대에 처음 올렸다. <렌트>, <시카고>, <맘마미아!>, <아이다>와 같은 대작들을 국내에 소개하며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렸다. <맘마미아!>는 10년 동안 1300회가량 공연을 올리며, 누적 관객 수 180만명,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선진 제작 시스템을 한국에 처음 도입해 50억원에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서 <댄싱 섀도우>, <아리랑>과 같은 창작 뮤지컬을 만든 사람, 중·대극장 중심의 연극을 적자를 보면서도 만들고, 프로듀서로는 처음으로 ‘이해랑 연극상’을 받은 사람, ‘연극계의 미친 놈’, ‘불의 전차 같은 제작자’로 불리는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 이야기다.

박명성대표, 신시컴퍼니 갤러리에서

박명성대표, 신시컴퍼니 갤러리에서

제작비 100억원이 넘는 <아이다>를 할 때,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을 불러와서 연극 <산불>을 <댄싱 섀도우>라는 뮤지컬로 만들 때, 이번에 뮤지컬 <아리랑>을 올릴 때도 ‘박명성이 또 미쳤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어요.
“미쳤다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생각해요. ‘내가 아직 쓸 만한 프로듀서구나!’ 그건 프로듀서에게 칭찬이 아닐까요? 누구도 하지 않은 작품을 한다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거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어요. 새로운 꿈을 꾸면 반드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요. 새로운 건 성공 확률이 낮으니까. 실패하더라도 기죽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배우면 되고, 그건 나의 경쟁력을 기르는 똑똑한 실패인 거죠. 절망은 희망을 낳아요. 내가 만든 작품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내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죠. 프로듀서는 새로운 콘텐츠를 남보다 먼저 창출하는 혁신경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갈 때 감동이 있고 이야기가 있죠. 저는 아마 20년 후에도 돈키호테처럼 미쳐서 새로운 도전, 무모한 도전을 하는 프로듀서로 살고 있을 거예요. 저는 흥할 줄 알아도 갔고, 망할 줄 알아도 갔어요. 30년 전에도 이렇게 살 줄 알았고, 앞으로도 이렇게 갈 거예요. 내가 정한 나의 운명입니다.”

저서 <뮤지컬 드림>,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를 읽고 책 마지막 장에 제가 썼어요. ‘박명성, 연극과 뮤지컬에 미친 무당’.
“맞아요.(웃음) 프로듀서나 연극쟁이들이 하는 일은 무당과 같아요. 실제로 굿에 미쳐서 전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어요. 무당은 죽은 사람에게 빙의돼 산 사람과 대화를 나누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산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무당이에요. 굿이 끝나고 나면 한이 풀리고 위안을 얻잖아요? 연극쟁이도 이 시대 사람들의 응어리를 작품으로 만들죠. 잘 만든 연극은 관객에게 위안을 줍니다. 차이가 있다면 무당은 우환이 있는 사람들이 부르면 가서 굿을 하지만, 프로듀서는 굿판을 차려놓고 ‘정신적 우환’이 있는 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관객을 초대하죠. 프로듀서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굿판의 기획자이기에, 장사꾼이 아닌 예술가가 돼야 해요.”

저서에 성공한 작품과 실패한 작품의 제작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이유는 뭔가요.
“후배들을 위해서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뉴욕, 런던의 화제작을 한국에서 올리면 무조건 성공할 거 같나요? 많은 프로듀서들이 완성된 작품만 보고 흥행 가능성을 점치지만, 작품을 만드는 처절한 제작과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만 실패 확률이 줄어듭니다. 저는 라이선스 작품을 선택할 때도 그 점을 가장 중시해요.”

박명성 대표

박명성 대표

연극배우로는 실패했지만, 프로듀서로서는 빨리 대성하셨어요. 비결이 궁금해요.
“연극에 입문하고 여러 면에서 다 젬병이었기 때문에 많은 경험을 했죠. 특히 당시 조연출은 연기 빼고 모든 걸 다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오케스트라와 주연 빼고는 다 해봤죠. 이 모든 경험이 처음부터 프로듀서가 된 사람보다 내가 유리한 지점입니다. 협력사들의 생리와 작업환경을 속속들이 다 알기 때문에 각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무엇인지 간파하는 능력이 생긴 거죠. 연극과 뮤지컬을 만드는 일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만나서 실시간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현장의 미세한 기류를 읽고 조화를 이뤄내는 게 중요해요. 경험 없이는 현장을 읽을 수 없죠. 경험을 쌓아가면서 현장을 읽는 안목, 현장 사람들의 정서를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게 중요해요. 조급증 있는 사람들에게는 뒤치다꺼리나 하며 긴 조연출 생활을 하는 게 시간낭비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게 콘텐츠 곳간을 채우는 시간이거든요. 젊었을 때 콘텐츠 곳간을 꽉꽉 채우다보면, 곳간에 쌓인 콘텐츠의 압력이 어느 순간 폭발해요. 그때 ‘작품성 있는 역발상’, 기막힌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죠. 기발한 연출로 촉망받던 신인 연출가 상당수가 왜 금방 사라지는 줄 아세요? 콘텐츠가 부족한데 조급하게 세상에 나오면 금세 밑천이 떨어지고 맙니다.”

박명성의 콘텐츠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는다면요.
“모든 콘텐츠는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요. 프로듀서는 고작 ‘최초의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내 꿈이 연출가의 꿈이 되고, 배우의 꿈이 되고, 스태프의 꿈이 되는 거죠. 서로의 꿈을 교환하면서 드디어 작품이 탄생하죠. 그 꿈에 최종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 관객이고요. 제가 연극판에서 먹고살고 있는 비결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프로듀서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발산할 수 있도록 꿈의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입니다. 아이디어를 존중해줄 때 쾌감을 맛보게 되고, 성장이 이뤄지죠. 하나하나 지시하는 건 작은 실수는 줄일 수 있지만, 사람을 키울 수 없어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비법은 절대로 없어요. 오직 진심! 갈등이 생길 때 가장 쉽고 어리석은 방법이 사람을 버리는 거예요. 나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절대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같이 갑니다.”

사람 중에서도 주연배우보다 앙상블을, 배우보다는 스태프를 더 챙기신다고 들었어요.
“공연을 한 번 못해도 돼요. 환불해주면 돼요. 그러나 절대로 사람이 다쳐서는 안 돼요. 그건 앞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회의를 느끼게 하거든요. 사고가 나면 팀 분위기는 침울해지고 공연도 잘되기 힘들죠. 스태프들은 흑막 뒤의 마술사예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기를 돋보이게 하지만, 박수 받지 못하는, 그러나 컴컴한 데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공연에만 미쳐서 장인정신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무대예술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더 존중 받아야 해요.”

신시컴퍼니는 뮤지컬, 연극을 만드는 공연기획사들의 연구 대상인데요, 신시의 성공비결도 ‘사람관리’ 리더십의 결과라고 보면 되겠군요.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길기로 유명하고, ‘공연계의 공수부대’라고 불려요. 회사를 그만둔 사람들도 회사 욕은 안하더라구요.(웃음)
“바보지. 회사 욕도 하고 그래야지.(웃음) 공연예술계는 이직률이 아주 높아요. 한 작품 끝나면 다른 기획사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우리 식구 중에 절반 이상이 10년 이상 같이 일하고 있어요. 열정과 의리로 똘똘 뭉쳤죠. 회의도 1년에 한 번 해요. 월급 올려줄 때. 회사 사정이 안 좋아도 매년 초에 10%는 올려주려고 노력해요. 저는 절대로 일장연설 같은 거 안 해요. 회식 때도 우린 재밌게 같이 놀아요. 제가 일일이 지적하면서 일하면 실수는 줄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일일이 지시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때 식구들은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고 견뎠을 거예요. 질책과 추궁보다는 그 사람이 가진 재능을 발산할 수 있도록 지지해줘야 해요. <댄싱 섀도우>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때, 신시가 문 닫는다는 소문까지 났었죠. 그때 식구들은 ‘악착 같은 앙상블’을 만들어 냈어요. 덕분에 국내 기획사 중에서 가장 많은 연극을 올리는 회사가 됐어요. 아직 연극은 수익보다 손실을 보는 작품이 더 많지만, 연극에 실패하면서 연극으로 돈 버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입니다. 튼튼한 맷집을 기르고 있는 중이죠.”

창작 뮤지컬 <아리랑>

창작 뮤지컬 <아리랑>

뮤지컬에서 돈 벌어서 연극에 투자하는 이유가 뭡니까.
“프로듀서로 살면서 상을 참 많이 받았어요. 이해랑 연극상도 1991년에 제정된 이후 프로듀서로서는 제가 처음 받았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온 것에 대한 보상이자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과거에 대한 인정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족쇄입니다. 연극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면 ‘먹튀’가 되는 거잖아요?(웃음) 연극은 제게 고통이자 좌절이며 구원입니다. 가장 암울한 시절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고, 내겐 종교와 같아요. 예술가보다는 사업가로 치부되지만 저는 연극쟁이고 앞으로도 연극에 미친 사람으로 살 거예요.”

오늘 제가 제2의 박명성을 꿈꾸는 학생 장원석군을 데리고 왔는데요, 박명성을 롤모델로 삼는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나 같은 프로듀서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감히’ 나를 뛰어넘으려는 생각도 바람직하지 않고요.(웃음) 자기 자신만의 꿈을 꾸고, 독창적인 비전을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되세요.”

창작 뮤지컬 <아리랑>이 공연 중입니다. 12권짜리 소설을 뮤지컬 무대에 올리겠다는 발상을 했다는데 놀랐고, 2시간40분이라는 한정된 무대에 ‘아리랑’의 감동을 담아낸 연출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감동을 기록하고 싶어서, ‘내 속의 조상이 나와 함께 울고, 미운 너와도 손잡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만났다. 슬프지만 지독하게 아름다운, 나의 아리랑’이라고 메모했어요.
“가슴에 팍 꽂히는 카피네요. 떨리고 설레고 두려운 마음이었어요.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우린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잖아요. 우리 역사 자체인 <아리랑>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10년이 넘었고, 3년 전에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을 원작으로 삼기로 결정했어요. <댄싱 섀도우> 이후 가장 위험한 도전이고, 주변의 걱정도 엄청났죠. 또 일 저질렀다고.(웃음) 손실이 더 클 것 같다고 주변에서 걱정했지만, 저는 저질러놓고 세밀한 전략을 세우는 프로듀서로 살고 싶어요. 조정래 선생께서도 ‘박명성이는 하겠다, 해라! 원작료 생각 말고 하고 싶은 작품 만들어봐라, 나에게 대본도 주지 마라, 공연 첫날 관객으로 보러 가겠다’며 흔쾌히 허락하셨고, 공연을 보신 후에도 사흘 연속 전화하셔서 ‘박명성 대단하다. 박명성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 하겠느냐’고 말씀하셔서 울컥했어요. 극본, 연출, 가사를 맡은 고선웅 연출은 제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고, 그의 역량이 밀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어요. ‘아리랑’은 폐막일까지 흥행성적이 좋아도 수익을 내기는 어렵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시카고>와 <유린극장>을 동시에 무대에 올린 이유도 손실을 완화하기 위해서죠.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성공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이럴 줄 알았다!(웃음)”

일본군 몰래 꿇어 엎드려서 신아리랑을 숨죽여 부르는 장면에서는 나도 숨죽여 함께 울었다. 내 속에 사는 조상들의 눈물이 내 몸을 빌려 흘러내리고 있었다.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진도아리랑, 신아리랑의 선율이 가슴을 울린다. 슬프지만 지독하게 아름답다는 말 외엔 표현할 길이 없다. 마지막 장면, 상여는 꽃가마가 되고 아리랑은 죽음을 넘어서 화해와 용서, 희망의 노래가 된다. ‘호시절 온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말어… 아홉 번 죽어도 살아야 혀, 견디고 이겨야 혀….’ 김제 사투리로 부르는 노래는 더 깊은 슬픔에 젖게 하고, 날것으로 들려주는 일본어 또한 당시의 시대상을 실감케 하는 데 효과적이다. 서양 악기와 해금이 어우러진 오케스트라, 전자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판소리와 육자배기 민요의 선율이 만들어낸 음향은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는 처음 만난 풍성한 음향으로 감동을 더했다. ‘원수의 발굽에 밟히고 밀려 깊고 어둔 산중으로 쫓겨 가네’와 같은 가사처럼, 격동기를 살았던 우리 민족이 외부의 힘에 떠밀려가는 듯한 모습은, 무대 바닥에 무빙워크를 설치해서 잘 살려냈다. 객석 옆면까지 확장된 프로젝션 맵핑은 3층에 앉은 관객들까지 입체적인 공연에 빠져들 수 있게 했다. ‘미친 사람’ 박명성이 손실을 보더라도 10년 이상 이어갈 창작 뮤지컬과 연극을 계속 만들 수 있으려면, <아리랑>이 잘됐으면 좋겠다. 성공한다면 나도 이렇게 말할 거다. ‘이럴 줄 알았다!’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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