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차이와 ‘예술향유’의 불평등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작품 1점에 1968억원! 최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1955)이 남긴 기록이다. 한국 미술시장 전체 규모의 약 3분의 2에 육박하는 금액에 이 그림을 구입한 이가 누군지는 아직 모른다. 카타르 전 총리라는 설이 있지만 불명확하다. 다만 그게 누구든 100억원을 ‘껌값’ 정도로 여기는 어마어마한 자산가임에는 틀림없다. 허나 끔찍하게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그림 보는 눈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 작품 가격과 작품성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닌데다, <알제의 여인들> 또한 피카소의 전 작업에 있어 기념비적 위치를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피카소의 화사(畵史)를 보면 대작 <전쟁과 평화> 등의 일부를 제외하곤 50년대에 이렇다 할 대표작이 나오지 않았다. 큐비즘 시대를 연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비롯해 <꿈>, <게르니카>, <우는 여인>, <생의 환희>와 같은 이전 시대 작품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품이 다수다. 어쩌면 당시 피카소는 전위성이 위축된, 옛것을 재탕하던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많은 누군가는 이 그림에 엄청난 액수를 지불했다. 비록 미술사적 의의가 크진 않으나 피카소의 중기와 말기를 잇는 고리 하나를 자신의 거처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처럼 수백, 수천억원에 달하는 역사적인 그림들을 구입하며 미술시장을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게 하는 이들은 매해 늘고 있다. 왜 그럴까.

Picasso, Les femmes d’Alger(Version “O”), 1955. | COURTESY CHRISTIE’S

Picasso, Les femmes d’Alger(Version “O”), 1955. | COURTESY CHRISTIE’S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글로벌 저금리 시대에 갈 곳을 잃은 투자자금이 미술품 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공인된 작가의 브랜드, 높은 환금성, 작품 각각이 지닌 ‘미학적’ 바탕 등도 ‘투자가치’를 높이는 척도이다. 더구나 미술품은 금과 부동산처럼 물리적 실체가 있는 실물자산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매력’도 한몫한다.

하지만 진실한 요인은 따로 있다. 바로 남보다 다른 특별한 것을 찾으려는 슈퍼리치들의 ‘초지위 효과’가 첫 번째이고, 사치와 허영마저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힘으로 용인하고 있는 후기자본주의체제가 두 번째이다. 이는 원천적으로 극소수만 점유할 수 있는 미술품을 통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심리의 실제적 실체와 미술이라는 고급콘텐츠의 독점을 매혹적인 산업으로 둔갑시킨 구조의 민낯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로부터 발생하는 예술향유의 불평등이다. 즉 극소수 자본가들이 인류문화적 공공자산을 독차지함으로써 예술 감상과 소비라는 다수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가 일반인들의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차단하고 차별하며, 천문학적으로 뛰는 예술품 가격이 자본 불평등, 계층 간 불평등을 증명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매한가지다. ‘국민화가’라 불리는 이중섭의 작품조차 그것을 소장하고 있는 소수의 개인이나 사기관이 베푸는 ‘은혜로움’에 의해서만 열람 가능하다. 박수근을 일컬어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개인 누군가의 안방에, 거실에 걸려 있고 그것으로부터의 독립은 요원하다. 미학적·미술사적으로 가치 있다는 평가를 받는 많은 작품들의 운명 역시 두껍고도 짙은 예술향유의 불평등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나날이 놀랍도록 새롭게 ‘창조’되는 인간불평등의 역사에 비하면 예술향유의 불평등이 뭐 대수일까 싶기도 하지만.

<홍경한 미술평론가>

문화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