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클라레, 블랙잭 & 마고 등-기발한 상상력, 시계 그 이상의 개성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이름이지만, 크리스토프 클라레(Christophe Claret)는 현 시계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계 제작자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 브랜드로는 물론이고 율리스 나르덴, 해리 윈스턴, 지라드 페리고, 프랭크 뮬러 등 수많은 쟁쟁한 회사들로부터 시계 제작을 의뢰받아 컴플리케이션의 고수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30여년간 묵묵히 시계 제작 외길을 걸어온 시계 장인이자 가장 혁신적인 시계를 만드는 제조사로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크리스토프 클라레를 소개하고자 한다.

1962년 프랑스 리옹에서 출생한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어린 시절부터 시계 제작자의 꿈을 품고 10대 중반 스위스로 유학길에 올라 제네바 시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그의 스승 중에는 최고의 시계 마스터로 불리는 로저 드뷔도 있었다. 졸업 후 그는 자신의 고향집 창고를 개조해 빈티지 시계 복원 및 수리를 전담하는 작은 공방을 마련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9살 때의 일이었다.

2014년 발표한 브랜드 최초의 여성용 컴플리케이션 시계, 마고

2014년 발표한 브랜드 최초의 여성용 컴플리케이션 시계, 마고

카지노 게임을 시계 안에서 표현
이후 1987년 크리스토프 클라레의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율리스 나르덴의 대표 롤프 슈나이더가 클라레가 만든 오토마통 기능의 쿼터 리피터(15분 단위로 타종하는 미닛 리피터를 달리 이르는 말)를 보고 한눈에 반해 율리스 나르덴을 위한 리피터 시계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그리고 2년여의 개발 끝에 1989년 바젤 페어에서 산 마르코 자케마르 시계를 공개한다. 미닛 리피터 타종에 맞춰 다이얼 안에 위치한 각각의 형상들이 움직이도록 설계된 산 마르코 자케마르 시계는 율리스 나르덴의 부활에 일조함은 물론, 클라레 자신의 성공에도 큰 디딤돌이 된다.

업계에서 확실하게 이름을 알리게 되자 클라레는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스위스 시계산업의 성지 중 하나인 라쇼드퐁의 르 로클로 이주해 1989년 매뉴팩처 클라레를 설립한다. 이후 한동안 독자적인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고군분투의 세월을 보낸다. 물론 이 와중에도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고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상에 둘도 없는 맞춤 제작 시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1999년에는 르 로클의 마누와 뒤 솔레이 도르로 불리는 한 고급 건물 단지를 인수해 매뉴팩처의 설비를 크게 확대하고 본격 시계 브랜드로서의 서막을 알렸다.

그리고 2004년 그는 후배 시계 제작자인 장 뒤낭과 연합해 해리 윈스턴의 장대한 오퍼스 시리즈에 참여한다. 오픈 워크 처리한 다이얼로 무브먼트를 시원하게 노출시켜 미닛 리피터와 투르비용 기능을 전시하고, 케이스 뒷면에는 커다란 문페이즈와 날짜 표시 핸드를 갖춘 오퍼스 4는 플래티넘 케이스로만 총 20개 한정 제작되었다.

이후 매뉴팩처 20주년을 맞은 2009년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듀얼타우라는 시계를 공개한다. 빈티지 부가티 자동차(T35) 바퀴에서 영감을 얻어 벨트로 연결된 큰 휠들이 회전하며 시와 분을 가리키고, 커시드럴 공을 추가해 모노 푸셔 크로노그래프의 기능을 작동시킬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6시 방향에는 투르비용까지 더해 독창적인 설계 안에 전통을 자연스럽게 녹였다. 하지만 크리스토프 클라레를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층 유명하게 만든 계기는 따로 있었다. 2010년에 완성한 블랙잭이라는 시계다. 블랙잭은 카지노에서 딜러와 플레이어가 각각 2장 이상의 카드를 꺼내 그 합이 21에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단순히 카지노 게임을 상업적으로 모방한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시계 안에서 실제 게임이 펼쳐질 수 있도록 블랙잭 축소판 시계를 세계 최초로 선보인 것이다. 케이스 좌측 상·하단의 푸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상단에는 딜러의 카드가, 하단에는 플레이어의 카드가 펼쳐지며 승패를 확인할 수 있고, 케이스백에는 카지노 룰렛을, 케이스 하단 측면에는 소형 주사위 모형까지 확인할 수 있어 카지노 현장의 분위기를 시계 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블랙잭 시계의 기대 이상의 반향에 고무된 클라레는 이듬해엔 바카라를, 2014년에는 포커를 연달아 발표해 이른바 카지노 3부작을 완성한다. 크리스토프 클라레가 카지노에서 영감을 얻은 일련의 시계들을 선보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시계를 통해 브랜드의 이미지를 재고하기 위해서였으며, 더불어 기발한 상상력을 실제 제품화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결과적으로 클라레의 전략은 적중했고, 일부 시계 애호가들과 수집가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하나의 기계식 시계가 때론 남자들의 장난감이 될 수 있음을 적절한 결과물로 입증해 보인 셈이다.

소녀들 놀이에서 영감 얻은 마고
뿐만 아니라 2012년 바젤월드에서는 케이스 양 측면에 부착된 별도의 사파이어 글라스 튜브 안에 작은 구형의 볼들이 각각 부유하며 시간을 표시하는 전무후무한 시계 익스트림 원을 공개한다. 속이 텅 빈 스틸 소재의 볼은 사람의 머리카락 굵기보다 얇은 수백 개의 다이니마 나노섬유로 구성된 케이블과 그 끝에 연결된 2개의 자석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이러한 소재나 설계를 우주공학이 아닌 하나의 시계에서 볼 수 있다는 자체가 혁신이었다. 그 밖에도 투르비용과 4개의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시계 안에 구현한 미닛 리피터 소프라노를 비롯해, 18세기 마린 크로노미터에서 볼 수 있는 데탕트 이스케이프먼트를 응용해 항구적인 내구성과 높은 정밀도를 보장하는 마에스토소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한층 무르익은 기술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브랜드 최초로 여성용 컴플리케이션인 마고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마고는 소녀들이 잎사귀를 하나씩 떼어가며 ‘그는 나를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놀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으며, 실제로 2시 방향의 푸셔를 누를 때마다 꽃잎이 하나씩 지면서 다이얼 하단에는 ‘그는 나를 사랑한다’ 혹은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나타나는 식이다. 마고는 크리스토프 클라레의 절정의 기술력과 섬세한 여성성, 완벽한 콘셉트가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해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 여성용 컴플리케이션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는다.

또한 올해 바젤월드에서는 2개의 파라볼릭 미러를 활용해 미라스코프로 불리는 일종의 착시효과를 연출함으로써 다이얼 중앙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형상을 홀로그램처럼 보여주는 아벤티쿰과 전작 아다지오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 미닛 리피터 시계 알레그로를 선보여 변함없는 창작력을 보여줬다.

크리스토프 클라레의 시계는 사실 몇 줄의 글보다는 시계를 실제로 한 번 손에 올려놓고 작동을 해봐야만 그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국내에서 만나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뚜렷한 개성과 창의력, 기술력이 없는 한 살아남을 수가 없는 최고급 시계 제조분야에서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벌써 25년째 성공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외부의 큰 지원이 없는 독립 브랜드로서 지금까지 매번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열정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며, 그 중심에는 이 시대 최고의 컴플리케이션 대가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클라레 자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시계, 전설의 명기를 찾아서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