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책임은 안중에도 없는 ‘부의 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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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는 상속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공정하게 상속이 이뤄질 때 안정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고, 그런 재벌들은 존경받고 인정받는다.

인터넷에서 ‘우유 한 잔의 기적’ 혹은 ‘우유 한 잔의 가치’로 많이 공유된 이야기가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의 공동 설립자인 하워드 켈리의 선행에 대한 것이다. 하워드 켈리가 가난한 의대생이었던 시절에 학비를 벌기 위해 방문판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하고 저녁이 되었다. 하루 종일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그는 뭐라도 얻어먹기 위해 용기를 내 지나가던 집의 문을 두드렸다. 막상 문을 열고 한 소녀가 나오자 켈리는 차마 먹을 것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

소녀는 그의 배고픔을 눈치채고 큰 잔에 우유를 가득 채워 건넸다. 게다가 켈리가 얼마를 지불해야 할지를 묻자 “친절을 베풀 때는 절대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이 켈리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켈리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 소녀가 큰 병이 생겨 시골에서 존스홉킨스 병원으로 찾아왔다. 켈리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살려냈다. 그녀는 수술이 잘 끝나 감사한 한편 가난한 형편에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치료비 명세서에는 돈이 전혀 청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켈리가 굵은 글씨로 쓴 문구만 있었다. “우유 한 잔으로 치료비가 지불됐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과는 좀 다른 이야기라고 한다. 실제로 켈리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고 학비를 번 적도, 방문판매를 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실은 자연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목이 말라 인근 농가를 방문했을 때 우유를 대접받았던 것이었고 돈이 없어 굶주렸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2월 17일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부지검에 출두, 포토라인에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땅콩 회항’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2월 17일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부지검에 출두, 포토라인에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더 큰 부와 명예 준 하워드 켈리의 선행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옮길 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켈리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한 것을 고쳐서 전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어려운 사람이 성공해서 선행을 베푸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절박한 순간의 작은 도움에 대해 긴 세월이 지나 은혜를 갚는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고 극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켈리가 부자이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부자가 그런 작은 이유로 거액의 수술비를 부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켈리는 자신이 치료한 환자 중 75%의 치료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고, 치료를 받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요양원도 자비로 짓고 운영했었다. 아마도 그런 그의 삶이 그가 설립한 병원을 세계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고 훌륭한 의사로서 존경받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부를 타고난 사람들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어떠한 노력 없이 돈의 한계를 벗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타고난다는 것은 분명 개인에게는 매우 행복한 일일 것이다. 켈리는 그런 부를 인류를 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그리고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에게는 더 큰 부와 명예가 주어졌다.

올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서 하워드 켈리와 같이 부를 타고난 사람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간절하다. 최근의 ‘땅콩 회항’ 사건이나 삼성SDS의 상장으로 수조원의 부를 움켜쥐게 된 삼성가 3세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고난 부를 가지고 인류와 사회를 위한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부를 지키고 향유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대한항공의 기내식 부문을 맡아 한식인 비빔밥을 기내식 메뉴로 도입하여 좋은 평가와 성과를 낸 재벌 3세로 알려졌고, 30대에 세계적인 항공회사의 부사장에 오른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되었었다. 하지만 이번 ‘땅콩 회항’ 사건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자신의 주업인 항공업과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조직 내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그 성과라는 것도 조작되고 왜곡된 것일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오빠와 동생의 과거 언행들이 공개되면서 물려받은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기보다는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이고, 그 부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임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삼성가의 3세들도 온갖 편법들과 금융스킬을 동원하여 삼성전자와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에버랜드와 제일모직의 업종이 바뀌고, 삼성테크윈 등의 방위산업체들은 매각되었으며, 삼성SDS와 제일모직이 상장되는 등의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변화들이 과연 회사와 임직원들, 수많은 고객들, 회사의 주인이라는 주주들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겉으로는 회사의 전략적인 경영 판단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은 오로지 이건희 회장 사후의 상속문제 때문임이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봉건제의 영향과 이른 산업혁명 및 자본주의 도입으로 부와 권력의 세습구조가 오래된 서구에서는 부의 세습이 위와 같은 기술과 편법보다는 상속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공정하게 이뤄질 때 안정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고, 그런 재벌들은 존경받고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와 달리 격변의 근대를 거쳐 1970~80년대의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세습될 재산들을 불법과 탈법, 권력의 비호 아래 성장시킨 우리나라의 재벌들에게는 부의 상속이 그런 절차와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는 인식이 없어 보인다.

경영판단으로 포장된 편법 기업상속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들보다 앞서 출발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만큼 사회에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 재벌들은 의료법인들을 가지고 있고 아들이나 사위들이 법인의 운영을 맡고 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병원을 크게 확장시킨 사람은 있어도 하워드 켈리처럼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어 가며 연구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재벌가의 세습경영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략적인 투자와 경영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분야와 당장의 이익을 위한 의사결정이 대부분이다. 재벌이 인수한 대학재단이 돈 되는 경영학과의 증원을 위해 인문사회학 분야의 정원을 줄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부를 가진 자들의 인식수준이다.

과거 산업화 시기의 공과 과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으니 따로 이야기하더라도 그 부를 대대로 상속시키는 것은 제발 상식에 따라 합법적으로 정당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적합한 사람에게 행했으면 한다. 그리고 쌓여진 부를 가지고 인류와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에 투자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윤원철 KINX 경영지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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