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 연광철, 세계가 인정하는 거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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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윤과 연광철을 만나다 <하>

“광철아, 대학 가라.” 아버지가 소 두 마리를 팔아오셨다. 생각지도 않게 대학생이 되었고, 1990년 달랑 700달러를 들고 유학길에 올랐다. 1993년부터 국제대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그의 활약은 나열하기 힘들다. 2011년 뉴욕 타임스는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고 연광철을 정의했다.

1 소년 연광철
충북 충주 외딴 마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하다가 머리카락을 태우기 일쑤였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나무하러 갔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처음 들었다. 농사꾼 아버지는 시골길을 함께 걸을 때 쇠퉁소나 하모니카를 불어주셨다. 20릿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한겨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무서워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버스가 다니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의 아침은 날마다 분주했다. 버스비를 빌리러 식전부터 이웃집에 다녀오셨다. 공고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리라 결심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건축과에 갔다. 열심히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전교생이 거의 통과하는 시험이었으나 낙방을 하고 말았다. 취업을 할 수 없게 된 소년은 어둡고 무서워서 끝이 보이지 않던 밤길이 떠올랐다.

“마을에선 잡히지 않던 주파수 하나가 산에 올라가니 잡혔어요. 클래식이란 걸 그때 우연히 처음 들었죠.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지금도 그 선율이 기억나요.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이란 건 한참 후에 알게 됐어요. 공고에 다닐 땐 음악수업도 없었어요. 고2 때 한 번 아이들의 정서가 너무 메말라 있다고 ‘음악 경연대회’를 학교에서 연 적이 있었는데 거기 나가서 <선구자>를 부르고 1등을 했어요. 친구들은 여름방학부터 취업 나가는데 저는 전교생이 다 붙는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으니…. 이제 어떻게 먹고 살까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노래 생각이 났어요.”

독일 오페라 본고장에서 비교대상이 없다고 말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연광철. 그의 드레스코드는 운동화, 백팩, 청바지다.

독일 오페라 본고장에서 비교대상이 없다고 말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연광철. 그의 드레스코드는 운동화, 백팩, 청바지다.

2 “광철아, 대학 가라”
처음으로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악이 뭔지도 모르는, 그저 쇠퉁소와 하모니카를 좋아했던 아버지께 청주대학교 음악교육학과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광철아, 대학 가라.” 아버지는 소 두 마리를 팔아오셨다. 그러나 레슨을 받을 곳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청주 시내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는 분을 찾아가서 레슨을 받고, 생각지도 못했던 대학생이 되었다.

“인생이 갑자기 바뀐 사건이었죠. 입학을 했지만 오페라를 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아니 못했어요. ‘대학 입학’이 목표였고, 그 목표를 겨우 이룬 것이었죠. 노래는 좋았지만 ‘선생’이 되긴 싫었어요. 그래서 노래를 열심히 불렀어요. 할 게 그것밖에 없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노래밖에 없었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요.”

3 궁금한 게 많았던 촌놈, 도전을 시작하다
갑자기 대학생이 된 청년 연광철은 그저 노래가 즐거웠다. 그런데 노래를 할수록 궁금했다. ‘어떻게 노래하는 게 잘하는 걸까.’ 집에 전축이 없었던 청년은 같은 과 친구들 집에 가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외국 성악가들의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했다. 그걸 집에 들고 와서 듣고 또 들었다. 유학을 가고, 오페라를 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대학 졸업 때까지 초콜릿도 못 먹어 본 촌놈 연광철. 3학년이 됐을 때,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나 궁금해서 국내 콩쿠르에 나가기 시작했고, 나갈 때마다 상을 받았다. 그런데 맨날 2등이었다.

“지방대니까 1등은 줄 수 없었던 거죠. 87년에는 세 개의 대회에서 다 2등을 했으니까요. 대회에 나가서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애들 보면서 한 번도 부럽진 않았어요. 그런데 궁금해서 열심히 들었죠. 서울 애들은 어떻게 노래하나…. 4학년 때 김덕기(서울대 음대 지휘과 교수)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요. 청주에 오페라단이 생겼을 때 지휘자로 오셨는데, ‘가능성이 있으니 유학도 가고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처음으로 해주셨어요. 그때 갑자기, 내 발음이 맞나. 내가 잘 부르고 있나, 독일 애들은 어떻게 부르나 궁금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가게 됐어요.”

4 플라시도 도밍고가 선택한 보석
1990년에 700달러를 들고 불가리아 소피아 음대로 유학을 떠난 베이스 연광철은 이후 베를린 국립음대에 입학했고, 1993년에 이르러 국제대회에서 이름을 떨친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다. 당시에 도밍고는 “세계 오페라계의 떠오르는 보석”이라고 극찬했다. 1995년엔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와 내한 공연을 했다. 이후 파리, 뮌헨, 헬싱키, 바르셀로나 등에서 도밍고와 함께 갈라 콘서트를 열면서 관객의 극찬을 받았다.

“8개국에서 예선을 했어요. 각 나라에서 4명씩 32명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는데, 저는 독일에서 예선 탈락했어요. 그런데 스웨덴에서 1명이 기권을 한 거예요. 그때 관계자들 사이에서 ‘뮌헨에서 떨어진 한국인 소리 좋더라. 걔 부르자’고 결정이 난 거예요. 그리고 결선에서 1등을 했죠. 제게는 소중한 인연입니다.”

수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연광철(왼쪽)과 사무엘 윤의 이중창 모습.

수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연광철(왼쪽)과 사무엘 윤의 이중창 모습.

5 덩치는 작지만, 노래는 거인처럼
이후 연광철의 활약은 나열하기 힘들다. 세계 무대에서 극찬을 받았고,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우렁차고 깊고 아름답다. 2011년에 뉴욕 타임스는 연광철을 일컬어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올해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명성이 높은 바그너 오페라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7월 25일~8월 28일) 무대에 서고 있다. 오페라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노르웨이 선장 달란트, ‘발퀴레’의 훈딩 역을 맡아서 활약 중이다. 30회 공연 중 16회 무대에 오른다.

7월 26일 막을 올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오른 연광철. 청명하면서도 묵중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와 달란트 선장의 혼령이 접신한 듯한 그의 연기력은 공연을 보기 위해 10년 전부터 티켓을 예매하고 기다려온 수천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네덜란드 선장 역을 맡은 사무엘 윤과 20분가량 이중창을 부를 때에는, 두 한국인 거장이 창조해낸 세계 최고의 오페라 공연을 바그너가 직접 설계한 극장에서 보고 있다는 감격에 가슴도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로엔그린’과 ‘지크프리트’에서 파프너(Fafner) 역할을 맡아 열연 중인 루마니아 배우 솔린 컬리반(43)은 “연광철은 왜소한 동양인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소리를 낸다. 그는 맡은 배역의 연기를 완벽하게 창조해낸다. 바그너 무대 최고의 베이스 가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휘자가 요구하는 발음이 따로 있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무대에서 독일인보다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고 제스처와 표정, 눈빛 연기까지 완벽한 캐릭터를 창조해내기로 정평이 났다. 비교 대상이 없다고 독일의 오페라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는 마치 접신한 무당처럼 연기하고 노래한다.

“나는 몸집이 다른 배우에 비해서 작기 때문에 가볍고, 돈에 밝고, 장사꾼처럼 보이는 달란트를 연기해야 해요. 연출은 큰 동선을 정해주는 것이고, 결국 내 몸에 맞게 연기하는 건 접니다. 오페라는 서양예술이니까 동양인이 서양의 예술 속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그 연기를 해내려면 연구를 많이 해야 돼요. 동료인 사무엘 윤과 함께 이중창을 부른 이번 무대는 제게도 좋은 경험입니다. 사무엘 윤은 바이로이트 무대에서 맡은 역을 아주 잘 소화해냈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갈 사람입니다.”

6 내 노래와 연기는 텍스트에서 출발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대단한 음악적 감수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음악적 지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적인 지휘자 대니얼 바렌보임은 연광철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에 대한 가장 합당한 평가다. 바그너 오페라는 스토리가 탄탄하고 바그너 자체가 문학가로서도 중요한 사람이기에 바그너 문학에 대한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그너 오페라에는 작센 지방의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고 사전에 없는 단어도 많이 등장하기에 텍스트를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 바그너가 생각하는 독일의 정신문화를 알아야지만 그의 작품을 노래할 수 있다고 연광철은 힘주어 말한다.

“발음과 연기력에 대한 칭찬은 외국인이라는 걸 알고 봤는데 생각보다 잘하니까 칭찬을 많이 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노래의 시작은 언어예요. 배역이 주어지면 텍스트 대본을 사서 읽고 또 읽으면서 가사가 제 입에 완전하고 자유롭게 붙었을 때 노래를 시작합니다. 언어에서 노래로 가야죠. 그런데 대부분의 성악가는 뜻을 이해하기 전에 노래를 먼저 시작해요. 춘향전을 잘 이해하려면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하듯이, 독일 문화에 대해 충분히 공부해야만 노래도 연기도 온전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요. 그 점에서 다른 성악가들과의 차이를 느껴주시는 게 아닐까요?”

7 여전히 작은 꿈을 꾼다
“다 이룬 사람, 연광철도 여전히 꿈을 꾸나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마지막에 건넸다.

“고향에 과수원이 있어요. 그리로 내려갈 겁니다. 꽃의 일생, 열매의 일생을 지켜보고 싶어요. 사실 노래는 자연의 삶처럼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화초를 키우면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내 노래가 나빠지면 언제든 교수직을 그만둘 겁니다. 저도 늙어가고 있고 트레이닝하지 않으면 안 돼요. 노래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만 노래하라고 저는 말해요. 저는 오로지 노래만 생각합니다. 국립오페라 단장직을 왜 거절했냐구요? 필요한 때 필요한 사람이 해야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도 항상 말합니다. 작은 무대를 소중히 여기고, 뜻은 크게 갖되 작은 꿈을 꾸자. 그 작은 꿈을 하나씩 성취해가는 기쁨을 누리자. 그래야 더 큰 꿈을 꿀 수 있으니까요. 제 꿈은 늘 작았어요. 청주대학교 입학하는 거, 내 힘으로 아이들 키울 수 있도록 월급 받는 극장에 취직하는 거…. 작은 꿈을 하나씩 이루다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요.”

세계가 인정한 거인 연광철. 기자를 만나서 인터뷰하는 걸 싫어하기로 소문난 그를 만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으로 이동하던 중에 승낙을 받고 바이로이트로 향했다. 그의 드레스코드는 운동화, 백팩, 청바지. 무대 위의 거인을 만날 생각에 잔뜩 움츠려 있던 나는 진솔하고 편안한 그와 마주하자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16회의 공연에 오르느라 짬이 없는 상황이지만, 약속한 시간의 두 배를 선 뜻 내주고, 허름한 바이로이트역 담벼락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겠다는 억지도 받아주고, 허겁지겁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인터뷰어의 무거운 캐리어를 끌어주며 버스 시간을 걱정해주었던 따뜻한 사람 연광철.

화초를 키우면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바이로이트를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바이로이트 | 글·사진 박상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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