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없는 동시대 한국미술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서구의 많은 작가들은 오래 전부터 도시와 문명, 환경과 같은 화두 아래 아이디어와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을 선보여 왔다.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도시 쓰레기와 플라스틱 폐기물을 나열하거나 압축하는 방식으로 대량소비 및 대량생산 시대에 있어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토니 크랙을 비롯해, 소리의 경험을 통해 타자의 기억을 영입시키는 인상적인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크리스찬 마클레이, 불안정성의 안정성 및 사회 평형에 자극을 가하는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생전 큰 인기를 얻었던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관념성의 비물질적 측면에 방점을 둔 작업들이 잔뜩 부유하기 시작했다. 추상적 언어를 통해 미술과 일상성을 전치시키고 병합하는 작품도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계장치나 전자기기, 웹사이트를 이용한 예술작업과 더불어 동시대 한국 미술의 양대 흐름으로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지적인 사고 조작으로 점철된 조형도 그것이 ‘좋은 예술인가’라는 질문과는 별개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이 ‘새로운 언어인가’라고 자문할 때도 자연스럽게 긍정하지 못한다. 작가적 의도와 논리는 명징하고 작품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지만, 그에 비해 결과물은 설익은 것이다. 이는 장황한 설명에 비해 그 내용을 결정짓는 발상과 형식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특히 이미 한 세기 전 미술사에 등재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재탕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쉽게 말해 꿈보다 해몽, 말만 그럴싸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토니 크랙. 집적(stack). 목재, 콘크리트, 벽돌, 금속, 플라스틱, 직물, 판지, 종이, 200×200×200cm. 1975. / DACS 2014

토니 크랙. 집적(stack). 목재, 콘크리트, 벽돌, 금속, 플라스틱, 직물, 판지, 종이, 200×200×200cm. 1975. / DACS 2014

제한적인 주제와 꾸며낸 조형이 아니라 가능성의 전달을 의도하는 개념미술이든, 과학과 예술의 접점 아래 치밀한 공학적 지식이 바탕이 된 작품이든, 그런 유형의 결과물들은 시각적 유희를 제공할지는 몰라도 감동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의 본질과 거리가 먼 현란한 기교와 해석의 과잉은 오히려 난해한 관념만 가중시킨다.

예술은 지각과 감각의 자유 원리가 결합할 때 비로소 감동을 분만한다. 단일성·반복성·획일성을 넘어 끊임없는 낯설기를 통해 긴장을 추구하고, 그 긴장을 예민한 감각으로 소환하는 것이 창작의 기초이자, 그것에 대한 경주가 예술가의 책무이다.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이 “미(美)란 감각을 완성하는 것으로, 예술가에겐 감각을 일깨우고 지각의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뜻밖의 것이나 경이로움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산재한 예술은 온통 세련되지만 낯익은 언어만 떠다닐 뿐, 감동이 없다. 기쁨과 쾌감을 동반한 숭고미와의 조우는 목도하기 어렵고, 이성의 틈에 균열을 가하는 탈주와 전복, 의식 너머의 세계와 관계된 낯선 시도 따위도 드물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Untitled(Placebo). 은색 셀로판지에 포장된 사탕, 무한 공급. 1991. 플라토 설치 전경 / 김상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Untitled(Placebo). 은색 셀로판지에 포장된 사탕, 무한 공급. 1991. 플라토 설치 전경 / 김상태

이러니 예술이 자기만족과 안위에 빠져 있다는 지적 앞에 우린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다름의 확인이 불가능한 이유,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대동소이한 내용과 형식의 작품들만 가득해 독창성이 없다는 쓴 소리에 어떤 해명을 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목적과 가치, 그 역할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라는 건 분명하지 싶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문화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