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 비행용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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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계를 사람에 빗대어 의인화하는 것이 어찌 보면 난센스 같지만, 그럼에도 브라이틀링의 시계들은 한결같이 매우 강인해 보이고 남성미가 넘친다. 브라이틀링의 홍보대사로 10여년 가까이 활동 중인 영화배우 존 트라볼타의 광고 속 이미지들을 보자. 남성적인 매력의 트라볼타와 브라이틀링의 시계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남성성의 한 총체를 대변해 보여준다.

최근에 브랜드 앰버서더로 합류한 세계적인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또 어떠한가. 현대사회 남성들에게 고급 시계란 시계 자체의 미적·기계적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한편으로는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액세서리로서의 접근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브라이틀링의 시계들은 그 터프한 외관에서부터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젊은 남성들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내비타이머(Navitimer)는 1952년 첫 론칭한 이래, 항공시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남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시간을 표시하는 동시에 간단한 조작 버튼을 통해 초 단위를 측정할 수 있는 기능) 시계 중 하나이다. 내비타이머가 현대 기계식 손목시계의 클래식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창립 초창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884년 스위스 상티미에에 레옹 브라이틀링이 작은 시계 공방을 오픈할 때부터 이들은 ‘전문가를 위한 장비’를 모토로 일찌감치 크로노그래프 시계 제작에 총력을 바쳐 왔기 때문이다.

브라이틀링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미국 영화배우 존 트라볼타

브라이틀링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미국 영화배우 존 트라볼타

레옹의 아들 가스통 브라이틀링은 1915년에 이미 크라운과는 별도로 스타트·스톱·리셋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적인 푸시 피스를 발명했고, 그 해 브랜드 첫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를 발표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스타트/스톱 기능을 리셋 기능으로부터 분리해 보다 현대적인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완성했다. 이 같은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1936년에는 영국의 왕립 공군 공식 납품업체로 발탁됐다.

3대에 걸친 집념, 브랜드 초석 다져
이렇듯 창립자 레옹, 그의 아들 가스통, 손자 윌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정밀 크로노그래프 제작의 집념과 항공시계 분야를 향한 지속적인 열정이 바로 브라이틀링이라는 브랜드의 초석을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고, 훗날 항공시계의 전설이 된 내비타이머가 탄생할 수 있었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50년대 초반에 미국의 보잉이나 록히드 같은 대형 항공사에서도 브라이틀링의 비행용 인스트루먼트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이틀링은 민간 항공기 비행사들도 간단한 조작을 통해 비행 시 필요한 모든 계측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시계를 제작하고 싶어했다. 그것도 조종석에 부착하는 대시보드 클락이나 회중시계가 아닌 손목시계 형태로.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시계가 바로 ‘내비타이머’였다.

항법을 뜻하는 내비게이션(Navigation)과 타이머(Timer)를 조합한 데서 개발의 취지를 예상할 수 있듯, 이 시계는 그 태생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비행용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의 한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였다. 

특히 다이얼 가장자리와 베젤부 바깥쪽까지 촘촘하게 표시된 눈금들, 분 단위로 표시된 숫자들, 60년대 초반에 추가된 24시간 표시 눈금, 크로노그래프 기능과 함께 유용하게 활용되는 타키미터(Tachymeter) 눈금들은 다양한 종류의 시간을 즉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또한 브라이틀링 특유의 회전형 슬라이드 룰(Circular slide rule) 덕분에 한층 파워풀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슬라이드 룰과 케이스 뒷면에 표시된 각종 눈금들로는 심지어 비행거리 환산 및 평균 비행속도 계산까지 가능했다. 50~60년대 당시 내비타이머 시계를 처음 접한 비행사들에겐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런 내비타이머의 명성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 있다. 1962년 5월 24일 미국 나사(NASA) 소속의 우주비행사 스콧 카펜터가 오로라 7 캡슐에 탑승해 지구 궤도를 세 바퀴 회전하고 돌아왔다. 우주비행 역사의 한 장을 연 카펜터의 손목에는 내비타이머가 착용돼 있었다. 내비타이머는 우주를 비행한 최초의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라는 타이틀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지구 궤도 3회 돌고 온 일화도 유명
1969년 브라이틀링은 당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였던 뒤브와 데프라즈, 뷰렌, 그리고 호이어(현 태그호이어의 전신)와의 합작 프로젝트를 통해 최초의 오토매틱(자동식) 크로노그래프 칼리버를 개발한다. 이는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새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성취였다. 물론 같은 해 제니스에서도 시간당 3만6000회 진동하는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엘 프리메로가 탄생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비타이머 코스모넛

내비타이머 코스모넛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브라이틀링에게도 70년대 쿼츠 쇼크의 여파는 거셌다. 1979년 파일럿 출신의 워치메이커이자 마이크로일렉트로닉 전문가인 에르네스트 슈나이더가 브라이틀링의 경영권 일체를 인수하게 되고 이후 수년간은 큰 성과 없이 조용한 행보를 이어간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시작된 90년대 후반, 브라이틀링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1999년부터 자사 생산 모든 시계들에 스위스 크로노미터 검증기관(COSC) 인증을 받게 하고, 2002년에는 라쇼드퐁에 기계식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만을 전문적으로 연구·개발하는 특별 공방 브라이틀링 크로노메트리를 설립한다. 또한 창립 125주년이 되는 2009년에는 첫 자사 개발 무브먼트인 칼리버 B01을 공개했고, 이듬해 마침내 B01 칼리버를 탑재한 ‘내비타이머 01’을 발표했다.

내비타이머 컬렉션은 현재 첫 자사 칼리버 버전인 내비타이머 01 외에도 세컨 타임존(24시간 표시) 기능을 추가한 내비타이머 월드, 60년대 초 스콧 카펜터가 착용한 역사적인 모델을 계승한 내비타이머 코스모넛, 그리고 시간·날짜·요일·월·크로노그래프 기능 외에도 문페이즈, 4년에 한 번씩만 조정하면 되는 윤년 인식 캘린더까지 포함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버전의 내비타이머 1461도 출시하고 있다.

내비타이머는 1950년대 초반부터 6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브라이틀링을 대표하는 플래그십 컬렉션으로 우뚝 서 있다. 내비타이머의 매력은 ‘전문가를 위한 장비’에 걸맞게 실제 파일럿들에게 유용한 슬라이드 룰을 적용해 다각도의 비행 계측이 가능한 최초의 손목시계였다는 점이다. 항공시계를 동경하고 나아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의 로망을 반영한 멋진 디자인의 시계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내비타이머의 큰 성공 이후로 수많은 브랜드에서 비슷한 디자인과 기능의 아류작들이 출시됐지만, 그 어떤 시계도 내비타이머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하나의 시계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수대에 걸쳐 회자되며 결국 클래식의 반열에 오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비타이머는 지난 20세기를 대표하는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의 명작이자 항공시계를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시대를 초월한 아이콘이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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