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180도 회전 케이스 손목시계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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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츠로 작동하는 전자식 시계와 달리 기계식 시계에 있어 무브먼트의 품질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무브먼트는 사람 몸의 심장과 같다. 튼튼한 심장을 가진 시계를 선택해야 오랜 내구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소개할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는 무브먼트 제작의 마스터라고 할 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소형 기계식 무브먼트에서부터 각종 기상천외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까지 예거 르쿨트르는 자신들의 매뉴팩처(Manufacture·공장이라는 딱딱한 뉘앙스의 표현보다 시계업계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는 시계 전문 생산시설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못만드는 것이 없다. 게다가 이들은 창립 초창기부터 외부의 도움 없이 100% 자체 기술과 인력으로만 이 전 과정을 소화해낸다는 점이 특별하다.

폴로경기 도중 시계손상 해결 목적
19세기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주로 무브먼트 제조사로 이름을 날렸던 예거 르쿨트르는 그 당시엔 ‘르쿨트르’라고만 불렸다. 까르띠에,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심지어 콧대 높기로 유명한 파텍 필립조차도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사용한 예가 있을 정도로 스위스 고급시계 무브먼트 제조사로서 잔뼈가 굵은 업체였다. 

리베르소 그랑 컴플리케이션 트립티크 뒷면 다이얼

리베르소 그랑 컴플리케이션 트립티크 뒷면 다이얼

1833년 앙트완 르쿨트르에 의해 스위스의 유서 깊은 시계 생산지 발레드주 계곡의 르상티에에 터를 닦은 이래 이렇듯 무브먼트 제조사로 유명했던 이들이지만, 지금과 같은 시계 브랜드로서 틀이 잡히기 시작한 건 앙트완 르쿨트르의 손자인 자크 데이비드 르쿨트르대에서였다.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자크 데이비드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워치메이커 에드몽 예거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이름을 각각 따서 1937년 예거 르쿨트르라는 새 브랜드의 시작을 알렸다.

예거 르쿨트르의 손목시계 제조 역사의 새 장이 열리기 시작한 1930년대 초반, 이들의 운명을 바꿀 하나의 시계가 등장하는데, 바로 리베르소(Reverso)이다. 리베르소의 등장 배경은 이러했다. 1920년대 말 영국군 장교들이 여가 중 말을 타고 경기하는 폴로 게임을 즐겼는데, 이때 시계가 과격한 스포츠 활동으로 인해 전면부 유리와 함께 다이얼판이 손상되는 일이 잦았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당시 르쿨트르사에 의뢰해서 탄생하게 된 게 다이얼을 감싸고 있는 전면 케이스를 180도 회전시켜 보호하는 리베르소였다.

지금의 사파이어 크리스탈과 같은 강도 높은 글라스 소재가 없던 당시로서는 전면부 다이얼을 미리 파인 홈을 따라 롤러식으로 옆으로 밀어 회전시켜 케이스 안쪽으로 감추고 노출되는 바깥쪽은 스틸 케이스로 보호하는 리베르소의 발상 자체가 파격적이었다. 그 당시 어떤 업체도 이런 시도를 한 예가 없었고, 지금 관점에서도 무척 창의적인 발명이었다. 

예거 르쿨트르는 이 반전 케이스 디자인과 관련해서 당시에 이미 여러 특허권을 취득했고, 이후 리베르소가 큰 히트를 치자 등장한 여러 브랜드의 모방 디자인에 관해서도 강력하게 대처해 리베르소를 예거 르쿨트르만의 유일무이한 시계로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다.

리베르소 그랑 컴플리케이션 트립티크 전면 다이얼

리베르소 그랑 컴플리케이션 트립티크 전면 다이얼

리베르소가 등장한 30년대 초반은 또한 1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엔 산업 전반적으로 제조단가가 많이 들지 않도록 최대한 단순한 형태와 기능의 제품들이 선호됐다. 한편에선 아르데코(Art Deco) 사조의 유행과 대량생산 체제의 확대로 인해 예술·건축·의복 등에서도 곡선보다는 심플한 직선과 반복적인 패턴이 유행했다. 

시계 업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 유행한 시계들 중에는 대체로 사각 시계들이 많았다. 이미 아르데코 사조를 예견한 듯한 까르띠에의 탱크(Tank)를 비롯해서, 예거 르쿨트르의 리베르소 같은 시계들이 당대에 이미 아이코닉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듀오페이스 시계로 또 한 차례 화제
특유의 아르데코 스타일과 시계 앞뒤가 전복되는 독창적인 구조 덕분에 리베르소는 등장과 동시에 예거 르쿨트르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계식 시계 업계 전반이 침체기였던 1970~80년대 중반까지를 제외하면 리베르소는 꾸준히 여러 버전으로 출시되었고, 어느덧 손목시계 역사에서 클래식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1994년에는 리베르소 최초의 듀오페이스(양면 다이얼) 형태의 시계들이 등장해 또 한 차례 화제가 되었다. 듀오(Duo)란 말 그대로 다이얼 앞면은 기본 현재 시간을, 뒷면에는 세컨 타임 시간을 동시에 표시하는 것으로, 여행을 자주하는 비즈니스맨들에게 특히 각광을 받았다. 

하나의 크라운으로 각각의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시계의 편리성과 기술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닛 리피터(소리를 내는 해머와 진동시키는 공으로 구성된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기능) 리베르소를, 이어 1996년에는 크로노그래프 기능과 레트로그레이드 기능을 양면 다이얼에 각각 조화시킨 또 하나의 참신한 리베르소를, 그리고 2000년도에는 퍼페추얼 캘린더(날짜, 요일, 월, 연도, 4년에 한 번 오는 윤년까지 자동으로 계산해주는) 기능의 리베르소도 선보여 화제를 낳았다.

그랑 리베르소 울트라씬 듀오페이스

그랑 리베르소 울트라씬 듀오페이스

2006년에는 손목시계 역사상 최초로 총 3개의 다이얼을 하나의 시계 안에 구현한 또 하나의 걸출한 그랑 컴플리케이션(Grande Complication) 모델인 ‘트립티크’(Triptyque)를 선보여 시계업계 관계자 및 애호가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특별한 시계는 기본 시간(다이얼 전면) 및 별의 운행 주기를 보여주는 항성시와 황도십이궁도, 일출과 일몰 시간을 반영한 균시차(다이얼 뒷면)는 물론, 케이스 안쪽 바닥 플레이트에는 퍼페추얼 캘린더까지 표시해 복잡시계의 끝을 보여준다. 

이 모든 다양한 기능들이 하나의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Calibre. 175)로 조작되고 기능한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로 트립티크는 예거 르쿨트르가 가진 기술력의 한 정점과 리베르소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워치메이킹의 진정성이 어느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 예거 르쿨트르는 기계식 무브먼트라는 재료를 마치 연금술사처럼 자유자재로 만지고 변형해 손목시계 역사상 가장 참신하고 혁신적인 시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온 저력 있는 브랜드다. 사람으로 치면 벌써 82살이나 된 리베르소는 예거 르쿨트르 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서, 이들의 도전과 혁신의 역사 중심에 늘 서 있을 것이다.

장세훈 <시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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