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의 예술세계 진면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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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91)은 자신의 ‘자화상’(보물 제590-1호)을 그리고는 화면 위에 이 같은 글을 남겼다. 표암은 18세기 당시엔 아주 드물던 자화상을 많이 남긴 인물이다. 평소 자신의 외모를 볼품없다고 말하면서도 자화상을 남긴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표암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8세기 문인화가로 시·서·화에 일가를 이뤄 당시 ‘삼절(三絶)’로 불렸다. 또 탁월한 식견·감식안으로 이름난 서화비평가이자, 신분과 지위를 넘어 예술가들과 교유함으로써 ‘예원의 총수(영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단원 김홍도(1745~?)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강세황의 ‘자화상’, 1782년(70세), 견본채색, 88.7×51.0㎝ (진주 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국립중앙박물관 기탁).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세황의 ‘자화상’, 1782년(70세), 견본채색, 88.7×51.0㎝ (진주 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국립중앙박물관 기탁).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 25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은 표암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리다.

표암 탄생 300주년을 맞아 마련된 전시회에는 초상화와 화첩, 문집 ‘표암유고’ 등 시·서·화 대표작은 물론 그가 비평의 글을 남긴 당대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까지 선보인다. 모두 103점에 이른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먼저 그 유명한 ‘자화상’ 등 표암 초상들을 만난다. 초상화 중 궁중화원이던 한종유가 표암의 부탁으로 부채에 그려준 61세 초상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이어 관직임명 교지와 각종 필묵 등 표암 관련 자료들, 30대 초반부터 관직을 처음 가진 61세 때까지 안산에서 30년간 재야생활을 하며 교류한 문화예술인들과의 관계도 살펴본다.

전시의 핵심은 그림과 글씨다. 조선 남종화 정착에 이바지한 표암은 무엇보다 음영법·원근법 등 서양화법을 처음으로 전통산수화에 수용했다. 가까운 대상은 크게, 먼 곳 대상은 작게 그리고, 필선도 원근에 따라 농담의 구별을 분명히 했다. 맑은 담채의 농담 차이를 이용한 음영법으로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투시도법으로 거리감을 살린 것이다. 이는 송도(개성) 일대 명승지를 담은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 입구’ ‘태종대’ 등에서 잘 드러난다. 표암은 스스로 “이 첩(송도기행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평했다.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지본수묵채색, 32.8×53.4㎝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지본수묵채색, 32.8×53.4㎝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전시장엔 ‘송도기행첩’ 중 ‘태종대’, 현 경기 남양주를 찾은 뒤 그린 ‘지락와도’, 부안 변산 일대를 그린 ‘우금암도’ 등이 나와 있다. ‘우금암도’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

사군자로도 유명한 표암은 별개로 다뤄지던 사군자를 처음으로 한 벌로 묶어 그렸다. 또 무·해당화 등 다양한 소재를 감각적인 색채로 담아내며 독특한 미적 감각을 자랑하기도 한다. ‘표암첩’, 63면에 글과 그림이 엮어진 ‘표옹선생서화첩’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친필 화평을 남긴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1676~1759), 인물화·풍속화의 관아재 조영석(1686~1761), 조선 남종문인화 토대를 만든 현재 심사정(1707~69), 그리고 특별히 아낀 단원 김홍도 등의 작품이 함께 선보인다. 7월 5일엔 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표암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학술심포지엄도 마련된다.

<도재기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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