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마피아는 서울대 등 특정학부 사람들이 한전·한수원에 돌아가며 일해서 생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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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대한민국 관료들은 국민들의 학구열을 자극한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grab이란 영어 단어를 알려주더니 이제는 원자력 분야까지 공부시켜(?)준다.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원자력 마피아’란 말을 언급할 만큼 지독하고 무서운 원전 비리가 터졌기 때문이다. “원전 마피아의 탐욕이 거의 방사능 피폭 수준의 재앙을 초래할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정작 대중들은 그동안 원자력에 대해선 정보도 관심도 없던 게 사실이다. 원전 비리 여파로 일부 원전 가동이 중단되어 유난히 덥다는 올 여름에 선풍기를 트는 것조차 걱정할 형편이라니 짜증만 낼 것이 아니라 원자력과 원전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2년 전 <원자력 딜레마>란 책을 펴낸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 5월 <원자력 트릴레마>란 책을 펴냈다. 부제도 ‘여론, 커뮤니케이션, 해법의 모색’이다. 현재 그린코리아21 이사장과 여성과학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 전 장관으로부터 원자력에 대한 과외공부를 받았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원전 마피아는 서울대 등 특정학부 사람들이 한전·한수원에 돌아가며 일해서 생긴 문제”

원자력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전공은 화학이지만 1980년대부터 ‘과학사’를 강의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계기다. 왜 과학자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구극(究極)무기를 개발했을까 궁금했다. 20년 전 <현대사회와 과학>을 저술하면서 원폭 개발사로 다루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얘기다. 당시 과학기술을 총괄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은 원폭 투하로 죄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원자력을 다루면서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원전이 원자폭탄과 어떻게 관련되나.
“원폭 투하 이후 원자력 정책은 ‘평화적 이용’으로 방향을 돌렸다. 노틸러스 잠수함 개발을 거쳐 원자로 개량으로 상업 발전의 시대가 열렸다.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원전의 본바닥인 미국에서는 원자로 모델이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핵폭탄에서 개량된 모델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제4세대 모델에 가깝게 개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든다. 더 안전하고, 고효율이라서 사용후핵연료 발생도 적은 그런 소형 원자로말이다.”

환경부 장관, 국회의원을 마치고 원전 문제로 왔다는 것은 흥미롭다.
“고난도의 퍼즐을 푸는 학생처럼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전은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은 고준위 방폐물이라고 하는 사용후핵연료를 저장수조에서 꺼내서 중간관리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워낙 ‘뜨거운 감자’라서 제대로 손을 못대는 형편이다. 환경부 장관 경력이 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반핵 또는 친핵 어느 한쪽으로 보이지 않나 싶어서다. 원자력에 대해서 양극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중간지대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17대 국회의원 때는 내내 국방위원회에 있었기 때문에 북핵 문제, 핵 비확산, 비대칭 전력 등을 다루었다. 그러고 보니 두 자리가 모두 원자력과 무관한 게 아니었다.”

2009년에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맞다. 그런데 공론화위원회 계획은 일단 수정되어 일반 공론화에 앞서 원자력계 등의 전문분야간 공론화를 위해 추가적인 과정을 밟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장 부지를 선정하기까지만도 19년이 걸렸다. 앞으로 고준위 방폐물 중간관리 사업은 어떻게 전개될는지…. 정부와 원자력계의 진단과 처방이 주목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겪은 뒤, 일본의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것이 가능한가?
“단답형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 목표를 언제쯤 달성한다는 것인지, 원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그 대안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국민적 부담은 어느 정도이고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지… 등등 조건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원전에 대한 사회적 여론의 추이를 수십년간 추적한 데이터를 보면 국가별로 시기별로 큰 차이가 나는 게 흥미롭다. 에너지 부존자원, 산업구조, 인구밀도, 국민소득, 정책 효율성, 국민의식, 리더십 등등의 변수가 현실화 가능성을 좌우한다. 선진국도 원전 정책은 정권이 바뀌고 사회적 여론이 바뀌면서 오락가락했다. 어느 정권에서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국민적 합의와 참여가 뒷받침되는 전제 아래 장기간에 걸쳐 일관성 있게 추진될 때 달성 가능하다.”

원자력 전문가로서 원전을 지어야 하나, 중단해야 하나?
“친핵이냐 반핵이냐의 입장 표명처럼 들린다. 어정쩡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중간지대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미리 정하고 하향식 접근을 하는 것보다는 에너지 정책 전반을 두루 살피는 상향식 접근이 유효하다. 할 거냐 말 거냐부터 정해 놓는 건 세월이 흐른 뒤 틀린 말이 될 것 같아서다. 정확한 답변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환경에 대해 치우침 없이 진단하고, 국가 에너지계획을 바로 세우고 그 속에서 원전의 위상을 결정하는 것이 맞다는 게 개인적 소견이다.”

에너지 계획을 바로 세운다는 게 무슨 뜻인가.
“우리 에너지 정책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에너지 빈국이면서도 단기적 공급 위주에 치우쳤다. 에너지 수요관리 정책은 있었으되 성과를 못올렸다. 에너지 효율이 매우 낮은 상태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에서 드러난다. 단위 GDP를 올리는 데 드는 에너지 양이 일본의 3배이다. 에너지 효율이 OECD 국가 평균의 56% 정도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원전 가동국 30개국 가운데 벨기에, 대만, 스페인에 이어 4위(86%)다. 또한 에너지 가격 체계의 특성상 가장 값비싸게 생산되는 전기가격이 상대적으로 낮게 매겨져 있어 전기 의존도가 높다. 물리적 조건의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너무 낮다는 사실도 그간의 에너지 정책과 무관치 않다. 이들 취약성에 대한 근본적 접근과 해법이 없이, 원전을 할 거냐 말 거냐부터 결정하는 것은 국민에게 큰 부담으로 얹힐 것 같다. 국가 에너지 기본정책도 어느 정도의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결정되는 것이 시대 변화에 맞다고 본다.”

앞으로 우리나라 원전의 과제는 무엇인가?
“핵연료 후행주기 관리가 과제이다. 지금까지는 이른바 핵연료 선행주기, 즉 원전을 지어 돌리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앞으로는 거기서 타고 남은 고준위 방사성 물질을 중간관리하고 최종관리하는 후행주기 단계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수용성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 선행주기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원전은 2009년에 해외로 진출하는 전환기에 섰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국내 원전 관리 역량은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래저래 중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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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뒤부터는 차례로 원전 저장수조가 포화된다고 들었다. 어떤 해답이 있을까?
“한계조건 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나라의 사용후핵연료 관리의 한계는 최종관리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원전 가동 상위 순위 10개국 가운데 최종관리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 국가는 미국과 우리나라뿐이다. 우리나라가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북핵문제, 한반도 비핵화 선언, 한·미원자력협정 등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관리 정책을 결정하지 못한 나라들도 중간저장은 널리 시행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상용화된 방식이 보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민 생명은 물론 국가의 미래가 달린 원자력에서 왜 원전 마피아 등의 문제가 생길까.
“알다시피 서울대의 원자력 관련 학과 등 특정학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한전과 한수원 등으로 돌아가며 일하는 것이 문제다. 또 정부는 5년 주기이고 부처 공무원은 1년마다 순환보직을 하니 원자력업무는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나 계획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진행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 장관이자 김대중 정부 최장수 장관 기록을 갖고 있다.
“1999년 6월부터 2003년 2월까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정부부처 업무평가에서 2001년 제1회, 다음해 제2회에 잇따라 최우수부처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일이다. 환경부 직원들이 장관 앞에서도 무슨 말이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걸 경청한 덕분이다. 남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최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퇴임사에서 개근상에 우등상까지 받게 해줘서 고맙다고, 일 잘 하라고 못살게 군 것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또 여성이 장관직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언론이 평가해준 것에 감사한다.”

장관 재임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4대강 수계특별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업계·관련부처 협의 등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천연가스버스보급사업을 추진한 것, 폐기물관리에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를 도입한 것 등이 무던히도 애를 많이 먹였던 정책사업이라 지금도 천연가스버스를 보면 감격스럽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내정이 돼서 언론에도 모두 발표가 됐다. 그런데 발표 전 날 청와대에 전화해서 사양했다. 새로운 도전의 기회였고 일에서 무서운 건 없었지만 사실 좀 쉬고 싶었다. 장관 그만두고 1년간 치과를 계속 다녔다. 즐겁고 보람차게 일했지만 아마 이를 악물고 일한 결과인 것 같아 건강도 챙기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수부 장관 시절 함께 장관으로 일하며 나를 인정해줘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 임명보다 나의 건교부 장관 임명이 더 파격인사인데 아쉽다는 말씀을 했다.”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과총)가 올해로 창립 10주년이다.
“여성과총은 2003년 창립돼 전국 조직으로 40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융합, 소통, 과학외교’를 모토로 ‘과학기술과 사회’에 관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소프트 터치가 산업기술 등 모든 부문에서 핵심 가치가 되었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유연성·직관력은 질적으로 다른 창의성을 의미한다. 여성과학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여성과학자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

여성과학기술인들이 정규직으로 일하는 비율이 10%대다. 왜 전문가들의 고용률이 이토록 낮은가.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조건이 나쁘다. 실험실에서 고강도 집중을 해야 하니, 가정과 일의 양립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안타깝다.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 인력인데, 우수한 여성인력을 제외시키고 가능하겠는가. 특히 여성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남성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볼 수 있고 포용력도 뛰어나다.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모성 보호와 육아 등 사회적 시스템이 중요하다.”.

평소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엘리자베스 여왕을 롤모델이라고 하던데….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등 탁월한 리더십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설할 때 항상 ‘My loving people’이란 말로 시작했다. 화려한 치장은 왕실의 권위를 위해서였다. 식생활을 비롯해 매우 검소했다. 특히 기상이변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귀족과 부자들에게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을 먹지 말고 그만큼의 식량이나 돈을 내놓아 굶주린 국민들에게 나눠주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 마음씀씀이, 그런 리더십을 널리 알리고 싶다. 이제 여성들도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 특정분야의 전문성과 기능성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더욱 고차적인 소양으로서 상대방과의 의사소통 능력, 애로 타개 능력, 조직을 이끌고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원자력 분야의 전문성이나 장관 시절의 리더십만큼 김명자 전 장관의 나이를 잊은 아름다움과 멋진 패션 감각이 부러웠다. 명예남성 같은 여성리더들과 달리 빨간 립스틱 등 화장과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여성의 특권이니까요. 자신에게 성의없게 보여서는 안 되죠.”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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